내 이름은 “키무라 별”입니다<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어머니의 나라, 그대 한국에게※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들어가는 말: 몬트리올에서 모국에 보내는 편지
비-전형적인(atypik) 해외(abroad) 입양된(adopted) 무성(a-gendered)의 아시아인(asian) 예술가(artist)이자 활동가(activist) 및 기록보관자(archivist)로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나는 1960년대 후반 중서 유럽에 밀어닥친 첫 번째 한국 아기들의 물결과 함께 아주 어렸을 때 벨기에에 입양되었다.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낙인찍기와 종교적 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래 60여 년 동안 22만 명의 한국 입양인들이 전쟁 시기에 한국을 도왔던 특정 국가들의 선택된 백인 가정에 보내졌다.
운 좋게도 나는 스무 살 때 만든 단편 영화 <입양>(Adoption) 덕분에 한국 정부의 눈길을 끌어 한국에 초청되었다.
1991년 친어머니와 만난 뒤, 많은 입양인을 만나면서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조직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혼자라고 느끼지 않고 교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한국으로 이주하는 큰 결단을 내렸고, 1993년부터 13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다. 여기서 처음으로 이 새로운 사회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친구들과 협력자들과 함께, 성인이 되어 태어난 땅으로 돌아오는 해외 입양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십여 년 동안 나는 입양인의 권리 향상(F4 비자 발급, 뿌리 찾기 등)에 헌신해왔고, 예술 활동도 펼쳐나갔다.
한국 사회를 더 낫게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젊은 세대 입양인들을 점점 더 많이 만나게 되면서, 나는 ‘우연하게’ 처음으로 동성애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한국은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니었다. 커밍아웃을 한 이후, 나는 점차 한국에서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그것이 내가 한국을 떠나 몬트리올에 자리를 잡은 이유다.
유색인 성소수자로서의 새로운 위치, 내 교차성(해외 한국인 입양인, 인터섹스, 퀴어)은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바쁘게 불공정에 맞선 투쟁에 나서도록 만들고 있다!
벨기에 한 동네의 유행 ‘아시아 아이를 입양하세요!’
나는 비(非)전형적인, 해외 입양된, 무성(性無)의, 아시아인 예술가이자 활동가 및 기록보관자로 묘사되고 기억되고 싶다.
내 이름은 키무라 별-나탈리 르무안느(kimura byol-nathalie lemoine)이다. 사람들이 내 이름들에 관해 물을 때, 나는 백 단어로 된 답변을 준비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실제로 나는 키무라 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발견’되어 최초의 정체성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이름이 붙여진 이후에, 유럽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공식 서양 이름을 얻었습니다.
한국인 친어머니가 지어 주신 이름인 ‘별’(byol)은 “너 자신의 레즈비언을 데려오라”(Bring Your Own Lesbian)의 머리글자가 됩니다. 그것은 한국어로 별(star)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일본인인 생물학적 아버지의 성인 ‘키무라’로 불리는 쪽을 더 좋아하는데, 프랑스어로 ‘죽을 것이다’라는 뜻을 가진 ‘끼 무라’(qui mourra)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프랑스어로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더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나, 1969년에 아이가 없는 벨기에인 백인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그 첫 해 부아포르, 벨기에 브뤼셀의 ‘신흥 부자’ 지구는 자기 땅에 온 한국인 고아들을 환영했다. 일본산 벚나무(사쿠라)들로도 유명한 이 특수한 지역은 입양 부모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에서 온 아이들로 넘쳐났다. 가정잡지에는 이 새로운 유행을 장려하는 광고가 실렸다. 차우차우 강아지를 입양하듯이 아시아 아이를 입양하라. 백인 구세주 의식은 자신들의 부유함에 대한 기독교도적인 죄책감에 작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이 길거리에 서서 백인 부모들이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 비교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나는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학교와 사회에서 겪은 인종차별 경험을 못 본 체 했고, 될 수 있는 한 사람들과 교류를 피하기 위해 내향적인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불안을 삼키고 혼자 삭이다가 입양서류상 공식 나이로 16세 때, 실제로는 13살 때 집을 나왔다. 공식적으로 네 살에 입양된 것으로 돼 있었지만, 당시 실제 나이는 두 살(1.5세)이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나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 조심하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시에 두세 가지 일을 했고, 15살(공식 나이로는 18살) 때 처음으로 아파트 임대 계약서에 서명했다. 온수도 나오지 않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자유를 누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미술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미술 형식과 스타일을 배우면서, 나는 항상 내 자신의 아시아인스러움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시아인이라는 것을 증오하고, 추함의 미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표현주의는 내 분노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어두운 생각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방식이었다. 나는 시도 쓰고 있었다.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다, 이용당한 느낌을 받다
1988년 여름, 내 나이 스무 살 때 첫 번째 단편영화 <입양>(Adoption)을 만들었다. 입양 문제를 다룬 이 영화는 영화제에서 상을 탔고, 내 이름을 본 브뤼셀 한국 대사관에서 내게 영화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그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한국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저 유럽의 서양 사람들이 유럽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1년 뒤, 그들은 특별히 ‘성공한’ 해외 입양인을 위해 만들어진 첫 번째 ‘고국 방문’ 행사에 나를 초청했다. 나는 이 행사에서 학생이 아닌 유일한 참가자이자, 친가족과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 유일한 참가자였다.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내 경험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행사를 통해 최초의 한국 입양인 단체의 대표였던 스웨덴 입양인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것은 어느 정도 내 관심을 끌었다.
나는 한국을 향한 훨씬 더 큰 분노를 품고 벨기에에 돌아왔다. 돈을 받고 우리를 보내고 나서 다시 우리를 사들이는 위선이 그다지 존경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고, 다시 한 번 이용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1년 뒤인 1991년, 나는 다시 한국에 초청받았다. 이번에는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산민들을 위해 주최한 세계 한민족 체전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시 대사관을 통해 내게 한국계 벨기에인 팀으로 참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 그들은 우리에게 친가족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날 때까지 주최 측은 내 친가족을 찾아내지 못했다. 나는 이 반도 나라에서 체류 기간을 불과 일주일도 안 남겨 놓고, 예기치 못하게 친가족을 찾았다. 그것은 좋은 경험이었고, 내게 힘과 더 나은 자아감각을 불어넣어 주었다.
입양인 ‘활동가’에서 ‘예술가’로
그 해 벨기에로 돌아온 뒤, 나는 한국 입양인 단체 유로-코리안 리그(E.K.L)를 다른 입양인 다비트 박 넬리선 및 한국인-벨기에인 부부 정 미애 쿨롱과 필립 쿨롱과 함께 공동으로 설립했다. 유로-코리안 리그에 한국에 대한 더 ‘직접적인’ 정보가 필요했으므로, 나는 1993년 우리 공동체를 위해 한국 소식을 전하는 통신원으로서 1년 간 한국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1년 계획은 13년으로 늘어났다. 한국 사람들은 나를 입양서류에 기록된 이름인 ‘조미희’로 불렀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 쪽이 더 편했을 것이다. 나탈리 르무안느는 너무 외국인처럼 들렸고, 그들에게 아마도 우리를 멀리-너무 멀어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원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을 곳으로- 보내 버린 부끄러운 선택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를 배우고, 그들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1년은 금방 가버렸다. 나는 유로-코리안 리그 한국 지부 뿐 아니라 고국으로 돌아오는 한국 입양인들을 위한 최초의 단체를 세우기 위해 1년 더 머물렀다. 나와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던 스웨덴 입양인 엘리사베트 에릭손의 도움과 그녀의 뛰어난 조직 능력 덕택에, 우리는 외국어 수업을 듣는 한국 학생들과 영어 동아리 회원들과 연대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감동적인 순간들, 우여곡절들, 좌절의 순간들을 거치며 한국을 경험하는 멋진 시간이었다.
한국 문화를 배우면서, 내가 그것에 대해 거의 몰랐기 때문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내가 유럽에서 온 사람인데도, 대개 미국이나 호주에서 온 유학생을 통해 접한 외국 문화를 가진 사람으로 나를 대했다. 한국 사람들이 내게 말하거나 나한테서 기대하는 일들은 내가 익힌 문화와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벨기에 유로-코리안 리그가 Ko-Bel로 이름을 바꾸면서, 나는 유로-코리안 리그 한국 지부의 이름을 K.O.A.(Korean Overseas Adoptees, 한국 해외 입양인들)로 바꾸었다. K.O.A.는 한국어 발음으로 ‘고아’를 뜻하는 말이다. 나는 입양인의 친가족 찾기와 함께, 입양인이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이산민 자격으로 한국에 체류할 권리를 얻는 일과 같은 입양인 권익 활동에 집중했다. 우리는 1948년 이후에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한국을 떠난 ‘교포’에게만 주어지던 F-4 비자를 입양인도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애썼다. 우리 한국 입양인들은 모두 한국 땅에서 태어났고, 1953년 이후에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굳이 “입양인”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런 특별 비자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기간 중에 북조선은 한국이 고아들을 서양으로 보낸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당시 한국은 1996년까지 해외입양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1996년은 국제입양이 문제가 된 해였고, 많은 한국 언론이 이 문제를 다루었다. 많은 기사들과 TV 프로그램들이 해외입양에, 특히 귀환한 입양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K.O.A.는 입양 문제에 대한 주요 정보원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나는 그 문제에 대한 내 견해를 표명하도록 초청받았다. 내가 일반적인 입양인들이 체류하는 것보다 더 오래 한국에 있었으므로 언론의 신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영어교사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과 같은 경제적 수준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럽의 한국 입양인과 미국의 한국 입양인 간의 경제적 상황은 차이가 컸다. 한국이 유럽이 아니라 미국에 식민화되었기 때문에 둘은 확실히 다른 경험이다. 슬프게도 내가 가진 돈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부업으로 미술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믿고 다른 한국계 유럽인 예술가 두 사람과 함께 내 첫 전시회 “서양에서 동양까지”를 열 기회를 준 사람들을 만났다. “서양에서 동양까지”는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활동가일 뿐 아니라 ‘예술을 하는 활동가’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활동하는 예술가’로, 다음에는 그냥 예술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40세 이하의 예술가는 한국의 나이 위계 때문에 프로 작가가 아니라 신인으로 간주된다. 나는 상업화되거나 돈벌이가 되진 않았지만 20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내게는 전시회를 열도록 1만 달러를 지원해 줄 가족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카페 갤러리 뿐 아니라 전문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하는 길을 만드는 것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나는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중간자적 위치가 나에게 문을 열어준 동시에, 똑같은 이유로 문을 닫았다고 생각한다.
‘문화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아이를 해외로 보낸 한국
점점 사람들과 ‘함께’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 시기에 여성과의 첫 사랑을 경험했다. 나는 내가 이성애 규범적인 특권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한국 사회의 편견과 불공정, 폭력에 직면했다. 나는 ‘못생겼다’는 것 뿐 아니라 남자처럼, 일본사람처럼 생겼다(나는 둥글둥글한 얼굴이 아니다)는 편견에 부딪쳤다. 내 불쌍한 얼굴은 길거리, 가게, 식당에서 아저씨, 아줌마들로부터 폭력을 당했다. 아무 이유 없이 뺨을 맞거나, 택시 승차를 거부당하거나, 구타를 당했고, 동성애자에 대해 썼다는 이유로 연재하던 신문 칼럼에서 잘리는 일도 겪었다.
나는 더 자유롭다고 느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시스젠더 여성에게 기대하는 옷 입기를 중단했다. 내 키는 아시아 여성들의 평균을 넘어 내 연령대의 아시아 남성과 더 비슷했기 때문에, 단지 남녀 공용의 티셔츠와 스웨터를 구하려고 미국인 옷 가게와 남성의류점에서 옷을 사기 시작했다. 나는 애초부터 여성스러운 옷을 정말 좋아하지 않은데다 내가 가진 아시아인의 신체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가능한 몸을 많이 가리는 옷차림을 좋아했다. 나는 20대 후반까지도 남자 청소년, ‘학생’으로 자주 오인 받았다.
내 정체성의 층위들은 세월이 갈수록 예기치 못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들을 끌어안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양파를 한 겹씩 벗겨내는 것처럼 나의 불안감에 답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친가족에게도, 양가족에게도 강한 유대감을 가지지 못한 나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들의 ‘이미지’를 실추시킬까봐, 즉 체면을 잃게 할까봐 고민하지 않았다. 내게는 정체성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한국 사람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로 이루어진 스스로 선택한 가족,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그들이 있다는 것, 인간 관계망이나 우연한 파티들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가끔씩 TV와 신문에 나오면서 나는 서서히 인지도가 늘어났고, 내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한국 영화제작자들과 작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간혹 한국인 해외입양인들이 ‘두 개의 문화를 가지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들이 한국 문화에 얼마나 무지한지 자주 깜짝 놀란다. 대개 그들은 한국에 온 적이 없거나, 짧은 방문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1년이나 2년 이상 한국에 살아본 입양인들은 자신들이 한국에 대해 얼마나 몰랐는지 깨닫는 경우가 많다. 한국을 짧게 방문한 입양인들은 아마도 자신만의 한국 문화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걸 진짜 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문화는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오다가 붙잡으려고 하면 사라져 버리는 유령 같은 것이 아닐까?
한국 정부는 고아들을 멀리 보내면서, 애초에 고아들이 해외에서 겪을 ‘문화 적응’ 문제를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설사 그랬다 해도 문화 말살이라는 문제는 ‘당연히’ 한국인으로 남을 아이들의 ‘행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유전자 속에 있는 것과 배워진 것에 대한 탐구는 내가 한국에 살며 한국의 문화와 사회적 관습을 체험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해답을 얻었다. 나는 놀랍게도 내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면에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 속에 있는, 벨기에에서 자라면서 눌러진 그런 내적 에너지를 찾아낸 것은 멋진 일이었다. 나는 벨기에에서는 사회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던 다혈질 성격이 한국 사회에서는 정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십년 넘게 살고 난 뒤, 나는 지금에야 내가 두 개의 문화를 갖고 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존재는 한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
영화 <베를린 리포트>(1991)와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 MBC 드라마 <1.5>(1996),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마이 파더>(2007)를 볼 때, 나는 한국의 미디어가 우리를 묘사하는 방식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살면서 신문, TV, 라디오에 인터뷰할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나는 입양된 아이라는 말(입양아)을 입양된 사람(입양인)으로 바꾸기 위해 싸웠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입양되긴 했지만, 우리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아이로 태어나지만 아무도 한국아(한국 아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인(한국사람)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 사소한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는 몇몇 기자들의 머리를 조금씩 일깨우기 시작했다. 이 차이는 사소해보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우리(성인 입양인)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에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비(非)원어민인 내가 그들에게 자신들의 언어 사용에 대해 가르치는 것에 놀랄 때가 많다.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내가 한국을 떠난 시기)까지 우리는 신문에서 점점 더 많이 ‘입양인’이라는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한국을 떠난 후, 기자들에게 나만큼 이 문제에 대해 까다롭게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 같다.
나는 한국 사회가 언론 보도와 대중문화를 통해 ‘독일의 간호사와 광부,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들, 카자흐스탄의 한국인들, 일본의 자이니치, 중국의 한국인들 등과 함께 우리’의 존재와 역사를 전지구적 한국사로 기록해야 한다고 강조하려 한다.
“왜 한국인들은 아이들을 먼 나라로 보냈는가?”
올해 5월, 한국을 기반으로 하는 활동가이자 미술가-작가-영화감독인 태미 고 로빈슨이 경복궁 근처에 있는 ‘쁘띠 샤토’(작은 성) 뿌리의 집(Koroot) 게스트하우스에서 <1988~2018 해외입양인 귀환 30년>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기념행사에 나를 초청했다. 초청된 한국 입양인 연사들로는 시몬 은미(뿌리의 집), 한분영(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T.R.A.C.K.), 제니 나(국외입양인연대 A.S.K. 공동창립자), 크리스 박(한국입양인참여연대 SPEAK)이 있었다. 그리고 연대하는 한국인 활동가인 김도현(뿌리의 집), 메기 김(한국미혼모가족협회 K.U.M.F.A.)과 변호사 한 분이 이 굉장한 모임의 토론자로 참여했다. 국외입양인연대 전 대표였던 김 L. 스토커가 행사 전반을 매끄럽게 진행해주었다.
내가 한국에 있던 시절(1993~2006)부터 알던 사람들과, 한국과 해외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입양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젊은) 활동가들을 만나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각 참여자들의 이야기와 청중들의 질문 혹은 논평들은 나를 감동시키는 동시에 좌절하게 했다. 또한 친어머니들을 위한 더 많은 권리와, 해외입양을 막을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위한 투쟁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나는 우리가 아기들과 어린이들을 ‘버리는 것’을 완전히 중단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이름과 생일 같은 최소한의 정보도 주지 않고 자기 아이들을 ‘멀리 떠나보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본적인 권리이다. 하지만 입양인에게 그것은 평생을 두고 그들을 도울 수 있고, 정체성 찾기 과정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은 비용이 들지 않고, 그들을 위험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해외로 입양될 사람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해달라는 요구를 입양기관이 존중한다면, 그것은 이미 커다란 발전이 될 것이다. 해외 입양인으로서 나는 생일과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가장 큰 괴로움을 겪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사람들이 내게 이름이나 진짜 생일을 제공해줄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내가 가치가 없었는지 말이다. 이번 행사에서 그 모든 훌륭한 공동체의 활동가들과 설립자들 사이에 오고간 얘기들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 한국 입양인들은 한국 역사의 일부, 그것의 어두운 측면에 속한다. 자녀가 있는 해외 입양인들은 그 역사의 후유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게 될 것이다. 그 아이들은 한국 정부와 사회가 그들의 부모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 ‘왜 한국인들은 아이들을 먼 나라로 보냈는가?’ 정당한 질문이다. (번역: 권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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