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31일, 영국 음악가 안나 칼비(Anna Calvi)가 [Hunter]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앨범은 “만약 내가 몸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남자였다면, 지금 널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첫 번째 곡 “As A Man”에 이어 ‘여성이 남성에게 사냥당하는 것에 지쳤다’며 쓴 곡 “Hunter”가 이어진다. 세 번째 곡 “Don‘t Beat the Girl Out of My Boy”는 여성스러운 남자 아이를 때려서 남자다운 아이로 만들려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머지 곡들의 가사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가득해 듣는 이에게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으며, 화자의 성별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이 안나 칼비가 의도한 바다. 안나 칼비는 인터뷰를 통해 ‘내 음악은 항상 퀴어여야 한다’, ‘나는 늘 음악이 내 몸을 탈출하는 방식이라 느꼈고, 특히 젠더를 수행하는데 갇히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음악은 내 몸을 탈출하는 방식이다
안나 칼비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했다. 바이올린을 6살 때부터, 기타를 8살 때부터 연주했다고 한다. 10살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연주를 녹음했고, 그렇게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놀라운 사실은 20대 중반까지 한 번도 노래를 하지 않았다고 밝힌 것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싫어하는 정도였다고. 그러나 안나 칼비는 노래를 하고 연주를 하면서부터 빠르게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를 비롯하여, 여러 밴드가 그들의 투어 오프닝 무대를 내주곤 했다.
2011년 1월, 첫 앨범 [Anna Calvi]를 발표한 뒤에는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세계적인 음악가 브라이언 이노(Brian Eno, 그는 엠비언트라는 장르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영국 최고의 음악 시상식 중 하나인 머큐리 시상식에 후보로 올랐다. 머큐리 시상식은 그 해 나온 앨범 중 12장만을 골라 후보로 올리고, 그 중 단 한 장에게만 시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후보로 오른 것만으로도 음악성을 크게 인정받는 것인데, 안나 칼비는 2014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 [One Breath]로도 또 한 번 후보에 오른다.
[Anna Calvi]가 자신의 이름을 붙이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린 앨범이라면, 두 번째 앨범 [One Breath]는 ‘스스로를 열어야하는 순간과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가에 관한 것’이라고 밝힌다. 안나 칼비는 ‘그것은 무섭고 스릴 있는 일이며, 희망으로 가득 차있기도 하다. 왜냐면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상냥하고 미소 짓는’ 여성 내러티브는 그만
2018년 발표한 앨범 [Hunter]는 그 결이나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다. 전작들에서도 여성으로서 음악을 하는 것에 관한 고민을 얘기했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좀 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물론 앞선 앨범에서도 “I’ll Be Your Man”, “Suzanne And I”처럼 기존의 젠더에 관한 통념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작품은 존재한다.(두 곡에서 그는 화자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추측할 수 없게 그렸다. 이를테면 노래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는 여성으로 추정되지만, 가사 속 화자는 남성으로 추정되는 점 등이다.)
안나 칼비는 ‘성별은 이분법이 아닌 스펙트럼이라고 생각한다’, ‘내 음악은 젠더를 넘어섰으면 한다’, ‘나 자신을 남성이나 여성 중 하나로 선택하게 하고 싶지 않다’ 등의 이야기를 다수의 인터뷰를 통해 꺼냈다. 이번 앨범 [Hunter]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의 문화는 여성이 남성에게 사냥당하는 것으로 포화상태가 되었다. 나는 원하는 게 무엇이든 나가서 가져오는 헌터로서의 여성이라는 내러티브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종종 내 목소리가 거친 힘이 되었으면 한다. 여성은 상냥하고 조용하고 미소 짓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런던 이브닝 스탠다드>와의 인터뷰 중에서
그는 나아가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을 구분 짓는 것조차 거부한다. 또한 페미니스트들 가운데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그룹을 비판하고, 폭넓은 젠더 상상력에 관해 역설한다. 안나 칼비는 그 어떤 혐오도 세력화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당연히 여성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바로 잇거나 동일시하지 않으며, 우리 안에는 더 많은 특성과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안나 칼비가 이러한 주제 의식을 담아 작품으로 펼쳐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젠더 연구가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이 <젠더 무법자>에 담은 메시지-남자 아니면 여자로만 구축된 이분법적 체제를 의심하라-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의 곡처럼 화자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정체성을 알기 힘든, 그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멋있는 작품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의외로 한국 작품들 중에서도 이렇게 해석해볼 여지가 있는 곡들이 존재한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박효신의 “야생화” 등은 서정적인 가사에 ‘너’와 ‘나’가 누구인지에 관한 정보 없이 그 관계의 아름다움과 처연함만을 전달한다. 또한 이 곡들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은 완성도나 독창성이 높은 것일 수도 있지만, 감수성이 높은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예뻤다”부터 “어머님이 누구니”까지 꾸준히 타인의 성별을 개인의 욕망으로 대상화하는 내용의 가요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곡도 있으니 선별해보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최근 예능인 박나래는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지지한다는 나이키 캠페인의 모델로 발탁되어 화제가 되었다. 비록 예능 프로그램에서지만, 박나래는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원하는 남성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하이퍼섹슈얼(과잉성욕자)이라며 좋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단지 재밌게 보일 뿐이겠지만, 어떤 누군가에겐 미츠키(Mitski)의 [Be The Cowboy]나 안나 칼비의 [Hunter]와 비슷한 맥락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서 욕망을 분리할 수는 없다
[Hunter]를 들은 어떤 매체는 안나 칼비를 ‘무서운 여성’이라고 표현했다. 그에 대해 안나 칼비는 ‘나는 성욕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여성이 왜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는지가 흥미롭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또한 ‘음악을 하고 무대에 서는 나는 강하고 용감하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한 쪽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것에 의지하기도 한다’고도 털어놓았다.
‘나에게 욕망이란 생존이다. 나를 숨 쉬게 하는 에너지로부터 욕망을 분리할 수는 없다. 육체와 정신으로부터 해방된 나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망만큼은 내게 너무 강하다.’ -영국 런던의 비영리 예술단체이자 매거진 컨템포러리(cuntemporary.org) 인터뷰 중에서
아마 안나 칼비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어떻게 동시대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 불리는 브라이언 이노나 데이빗 번(David Byrne) 같은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작업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세 편의 뮤직비디오는 꼭 감상해보길 권한다. 그의 음악적 성과와 메시지가 동시에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Anna Calvi - Hunter (Official Video) https://bit.ly/2wEcWTs
[필자 블럭(bluc): 음악에 관해 글 쓰는 일과 기획 일을 하는 프리랜서이며, 2019년은 공부가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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