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교통 성추행,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최하란의 No Woman No Cry] 대중교통 안전하게 이용할 권리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편집자 주]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하러 전주를 오가다
얼마 전, 나는 전주 성폭력예방치료센터와 함께 두 달 반 동안 진행한 셀프 디펜스(Self-Defense) 수업을 끝마쳤다. 서울 사는 내게 10주 동안 전주를 오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지만, 십대부터 오십대까지 삼십여 명의 여성들과 함께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참가자 중에는 심각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도 있었고, 성희롱과 성추행 경험자들도 있었다. 또 미디어를 통해 접한 여성폭력들에 공포심을 가진 참가자들도 적잖이 있었다.
몇몇 참가자들은 자신의 피해에 대해 얘기했고 그런 일을 다시 겪게 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질문했다. 자연스레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훈련했고, 나는 우리가 배우고 연습한 테크닉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설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늦은 밤 KTX 안에서 승객들의 코골이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참가자들의 질문과 사연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그럴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과 이 경험을 나누고 싶어졌다. 이 글은 그때의 소중한 질문과 사연 가운데 대중교통 안에서 일어나는 성추행 대처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도, 많은 여성이 대중교통 성추행을 겪는다
셀프 디펜스 교육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질문 중 하나가 대중교통시설에서 일어나는 성추행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대중교통에서 성추행을 경험한다는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2016년 여성가족부의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20.6퍼센트)은 상대방이 고의로 가슴, 엉덩이 등을 건드리거나 일부러 몸을 밀착시키는 등의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 발생 장소는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이 압도적이었다.(78.1퍼센트) 일반적인 성폭력 양상과는 정반대로 가해자의 87.8퍼센트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대중교통 성추행 신고는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발생 건수에 한참 못 미칠 것이다. 왜냐면 피해자가 몸을 움직여 이동해서 가해자의 고의적인 신체 접촉을 확인할 수 있고 신고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신고하기 용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교통 성추행은 주로 사람이 많은 혼잡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공중에 붕 뜬 것처럼 타고 가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앞뒤 양옆이 밀착돼 실려 가고 있으면 성추행 신고는커녕 한 발짝 움직여 피하기도 힘들 것이다. 또 바쁜 아침에 제시간에 출근하는 게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는 애써 무시하며 불쾌한 시간을 견뎌내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대중교통 성추행은 ‘안전’의 문제
서울시에 따르면, 2017년 서울 지하철 1~9호선의 평균 혼잡도는 135퍼센트다. 그 중 민영화된 9호선이 평균 혼잡도 175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혼잡도 175퍼센트는 정원 160명에 평균 280명을 태우고 운행한다는 뜻이다.
이용자들이 바라는 차내 혼잡도는 100퍼센트 내외로 판단된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150퍼센트 혼잡도를 권고하고 있다. (<서울시 지하철의 혼잡비용 산정과 정책적 활용방안>, 서울연구원) 사실 100퍼센트도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권고치 150퍼센트는 너무 높다.
서울지방경찰청 통계를 살펴보면, 대중교통 내 혼잡도가 높을수록 성범죄(불법촬영과 추행 등)가 더 많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이 밝힌 2013~2017년 서울지하철 성범죄 발생 현황에 따르면 서울지하철 전체에서 발생한 성범죄가 76퍼센트가 증가한 반면, 9호선 성범죄 발생 건수는 거의 11배나 급증했다.
서울시 지하철 이용자는 하루 700만 명이 넘는다. 지하철 역시 전기, 가스, 수도처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제공해야 하는 공공재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 마땅한 서비스를 공공서비스(public service)라고 한다. 공공서비스에는 교육과 의료뿐 아니라 교통과 통신까지 포함된다.
공공서비스가 좋을수록, 사회가 덜 불평등하고 더 안전하다. 반대로 공공서비스가 후퇴할수록 반대 효과가 강화된다. 사회가 더 불평등해지고 더 위험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대중교통은 친환경적이다. 기차와 전차(트램)는 물론이고 지하철과 버스도 승용차에 비해 훨씬 더 친환경적이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나 인류의 멸종을 경고하는 미세먼지도 1인당 배출량이 승용차에 비해 훨씬 적다. 그러므로 더 값싸고 더 안전하고 더 쾌적한 대중교통이 제공될수록 기후변화를 늦추고 미세먼지를 줄일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대중교통 내 성범죄는 공공서비스의 편의와 안전의 문제다. “지옥철”은 성범죄뿐 아니라 다른 안전 문제에도 너무 취약하다.
“지옥철”은 냉난방 장치, 자동문, 제어장치 등의 작은 고장조차 심각한 재난 상황으로 만들 수 있다. 쉽게 끌 수 있는 불조차 끔찍한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 몸과 얼굴이 밀착돼 숨이 막힐 수준의 대중교통은 건강한 사람에게도 해로운 환경이다. 그렇다면 아동, 노인, 임신부, 장애인은 어떨까. 아예 타지도 못할 것이다.
‘대중교통의 육성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에 잘 나와 있듯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모든 국민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할 책임이 있다.
대중교통 성추행에 대처하기
그렇다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대중교통 성추행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나는 먼저 질문자에게 그때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물어본다. 대체로 신고하지 못하고 피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피했다, 내가 오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있었다 등의 대답을 듣게 된다. 때로는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하철을 탔는데 모르는 사람이 고의적으로 신체를 접촉하는 성추행이 벌어졌습니다. A라는 사람은 ‘왜 내 몸을 만져요? 성추행하지 마요!’라고 말하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B라는 사람은 소리를 치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게 싫어서 성추행하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더는 따라붙지 않았습니다. C라는 사람은 성추행하는 사람을 쳐다보기도 두렵고 괜히 오해한 걸까 걱정도 돼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 목적지는 아니지만 한 정거장 먼저 내렸습니다. A, B, C 이 세 사람 중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셀프 디펜스에 성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내 질문이 끝나면 잠시 조용해진다. “A만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참가자들의 목소리가 하나둘 들리기 시작한다. “아뇨. 모두 성공했어요!”
우리는 각자 성격과 성향이 다르다. 한 개인에게 벌어진 문제라도 상황에 따라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부당한 침해에 맞서 소리 지르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상황도 있고 조용히 피하는 사람도 있고 상황도 있다. 그러나 위험을 피하고 안전하게 자신을 지켰다면 셀프 디펜스에 성공한 것이다.
내가 어떤 대처를 했든 혹은 하지 못했든, 문제의 책임은 명백하게 타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한 사람에게 있다. 나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것은 단지 몸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상황과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힘은 내 마음과 정신을 안정되게 하고 회복력을 높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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