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역사에서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을 찾아서[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조선인 탄광노동과 ‘산업위안부’※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군사주의와 여성의 지위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편집자 주
보이지 않았던 사실 속 ‘보지 않으려 했던’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은 권력의 폭력성과 인식의 공백을 선명히 비춘다. 그러나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냈다고 끝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 속에는 ‘보려고 하지 않는 것’, 더 정확히는 ‘보지 않으려는 것’이 계속 ‘생겨난다’. 식민지기 탄광 강제동원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탄광 강제동원 속 여성은 보이지 않는 것 속에 계속 생기는 ‘보려고 하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하는’ 부분이었다.
※강제징용: 현재 강제연행, 강제동원, 강제징용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2018년 10월 30일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표기를 따라 ‘강제동원’이라고 쓰지만, 해방 직후 소설을 인용할 때에는 소설 속 표현을 따라 ‘강제징용’이라고 표기한다.
몇 년 전부터 일본 정부는 철강, 조선, 석탄 산업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시켰다. (민족문제연구소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유산과 강제노동』 2017년, 10쪽. 메이지기는 1912년까지임에도 1910년까지로 제한하여 지쿠호 탄광은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서 빠진다. 조선 강제병합이 1910년임을 고려하면 절묘한 타이밍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이 이뤄진 곳이 조선인이나 대만인들을 강제연행하고 강제노동을 시켰던 현장임을 지운다.
또한 ‘메이지 150주년’ 기념 이벤트와 새로운 ‘천황’ 즉위식을 통해, 식민주의와 전쟁에 대한 ‘천황’의 책임을 감추고, 식민주의와 전쟁과 무관한 ‘천황’을 만들려는 시도를 해 왔다.(일본사연구회, 역사과학협의회 「서문」, 『창조된 메이지, 창조될 메이지』, 이와나미쇼텐, 2018년, ⅶ쪽)
일본 정부가 메이지 150주년을 축하할 때 도쿄의 <아시아여성자료센터>는 2018년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탄광노동의 중심인 ‘후쿠오카 지쿠호 탄광을 젠더, 민족, 계급의 시점에서 배우는 스터디 투어’를 개최한다.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 및 정치이용에 맞서, ‘산업혁명 유산’이란 명명에서는 보이지 않는 탄광노동 속 여성과 피식민자와 하층민의 경험을 배우고 드러내기 위한 투어였다.
탄광노동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 ‘조선 여성’의 자리
첫째 날에는 이데가와 야스코(『불을 낳은 어머니들: 여자 광부들의 듣고쓰기』 이데가와 야스코, 이와나미쇼텐, 1984년)의 안내로 구라테쵸 역사민속박물관을 둘러보았다. 20년간 여성 탄광부 80명의 증언을 듣고 모아온 이데가와의 설명을 들으며 보는 탄광은, 탄광노동 속 보이지 않던 여성 노동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둘째 날에는 일본의 조선학교 박강수 선생님의 안내로, 지쿠호에 강제동원되어 노동을 했던 조선인들의 흔적을 좇았다. ‘조선인’에 초점을 맞추자, 산업혁명 유산이나 탄광의 낭만 따위는 자취를 감췄고, 압제 탄광이라고 불리던 영세하고 폭력적인 탄광, 어둠이 아가리를 벌린 듯한 수직 탄갱, 묘비조차 없는 무명의 무덤, 고향으로 가지 못한 유골과 만났다.
그러나 공백은 하나가 아니었다. 탄광노동 속 여성노동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일본 여성의 탄광노동을 상기시켰다. 강제동원된 조선인 남성을 따라 온 조선 여성들이 석탄 속 자갈을 골라내는 노동을 했던 것은 제대로 논의되기 어려웠다.
한편 조선인의 강제동원을 중심에 놓자 식민주의의 문제는 부각되었지만, 조선인 남성 주변에 있었던 조선인 여성과 아이들은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강제동원된 남성 조선인들 주변에 있던 그녀들은 남성들의 증언 속에서, 즉 그녀들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조선인 남성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단발적으로만 나타났다.
탄광의 강제동원은 일본에서는 역사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비(非)가시화된 지점이다.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일본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한 강제동원하면 조선인 남성을 떠올려 버리는 한국의 논의 지형에서는 다시금 ‘조선 여성’의 자리는 보려고 하지 않는, 혹은 보지 않으려는 장소로서 남아 있다.
몇 년 전 나는 우연이지만 탄광에 있는 조선인 여성 중 한 명이었던 ‘옥순이’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옥순이를 통해서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것/보지 않으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계속해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옥순이를 둘러싼 소문을 좇아서
내가 옥순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한 조선인 소설가가 쓴 식민지기 강제동원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 속에서였다.(안회남, 「탄갱(炭坑)」, 『民声』 창간호. 1945년 12월~1947년 3월까지 1부 14회까지 연재된 뒤 중단되었다. 성균관대 박진영 선생님 소개로 근대서지학회 오영식 선생님께서 결호 부분의 소설을 제공해주셔서, 소설 전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옥순이는 남편을 따라 규슈 탄광에 온다. 남편인 김돌산은 강제동원되어 탄광노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관리 감독하는 반장이었는데 갱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탄광에 온 남성 조선인들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쓰고 버리는’ 노동력이었다. 탄갱에는 기본적인 안전장치도 없었고, 가스 누출 및 폭발, 갱내 붕괴 등의 사고로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돌산이 죽자 옥순이는 탄광노동을 하는 남성 조선인들의 밥과 빨래를 하는 “부엌데기”가 된다. 도망가다 붙잡히거나 매 맞아 몸져누운 노동자를 간호하는 것도 옥순의 일이었다. 그러나 옥순은 부엌데기인 동시에 성적 대상이기도 했다. 조선인 탄광징용자 최장근은 옥순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그녀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관리자 나까무라는 옥순이를 자신의 정부로 삼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 시집갈래?’라고 묻거나 ‘술장수’가 되겠냐고 물으며 옥순이를 천대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나까무라는 원래 조선인이지만, 조선인을 속여 탄광에 끌고 오는 역할을 한 탓에 보복이 두려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일본인 행세를 하는 조선인 관리자이다. 탄광에는 점차로 “나까무라가 옥순이한테 야심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배급물품을 나까무라가 옥순에게 준다는 말이 돈다. 최장근은 옥순이가 나까무라의 ‘정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순식간에 옥순이가 “더럽고 밉”다고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노무과장의 지시로 조선인 징용자들의 계약을 강제로 2년 연장한다는 방침이 발표된다. 그 발표 직후 옥순이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의 ‘갈보’가 된다. 노무과장은 조선인이 많이 도주하는 이유는 “고향에 남겨 두고 온, 그 안해가 그리운 까닭”이며 “계집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일 테니, 유곽을 하나 세우자”고 나까무라에게 지시한다. 그런데 “조선인 광부들은 일본인 여자한테는 놀러 안 가니까” 반드시 조선인 계집을 물색해서 유곽에 둬야 한다고 했다. 바로 그 계집이 옥순이가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 징용자들은 모여서 다음과 같이 수군거린다.
「김돌산이 안식구가 갈보가 된다며?」 「참 돌산이 팔잔 기구도 하다... 굴에서 죽어 일본눔 땅에서... 어머니 죽어... 제-기 기집은 갈보가 돼...」 -중략- 「나까무라가 때려죽일 눔여!」 「쉬...」 -중략- 「세상에두... 그눔은 때려죽일 눔도 아니여, 불에 태죽일 눔이지... 그래 인저 그걸... 돌산이 처를 우리보구, 우리 수백명이 같이 데리구 살라는 말인가?... 돼지만두 개새끼만두 못한 눔...」 「아이는 어떻게 하나? 설마 소문이지 정말일라구...」 (탄갱/1947.3)
옥순이는 안회남의 소설 「탄갱(炭坑)」에 나오는 여성이다. 안회남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사가현 이마리 오가와의 대일본광업 다치카와 탄광으로 강제동원 된다.(안회남, 「그 뒤 이야기」, 『생활문화』, 1946년 1월) 해방 후 안회남은 불과 1년 사이에 탄광징용의 경험과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중단편 12편을 발표한다. 이 중단편들은 자전적 경향이 강해 단지 ‘소설’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사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 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탄광에 강제동원되었던 안회남은 이런 ‘협력’ 논의나 죄책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따라서 안회남의 이 시기 소설들은 조선 민족 전체를 피해자 혹은 독립국가 건설의 주체로 단일화하여 형상화함으로써 배타적인 국가주의로 수렴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안회남의 소설 내용은 강제동원에 대한 수많은 역사기록 및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들의 증언과 매우 유사하다.
안회남의 소설 속에는 사람들이 저항적 민족주의에 걸었던 절실함, 식민주의의 폭력이 다시 피식민자들 사이에 일으키는 분열,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상황적 감정적 진실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저항적 파토스와 해방에 대한 열망은 단순히 내셔널리즘이라는 비판으로 쉽게 재단될 수 없다. 이처럼 탄광에 강제동원당했던 피식민지인들의 증언, 경험, 소문이 기록된 텍스트 「탄갱」은 픽션인 동시에 논픽션이며, 문학인 동시에 르포르타주이다.
소문만 들었을 뿐 우리는 옥순이를 모른다
그러나 이 자전적 기록문학을 통하여 나는 정말 옥순이와 만난 것일까? 솔직히 말해, 나는 그저 한 남성 조선인 소설가가 쓴 자전적 기록문학 속 어둡고 작은 틈새에서 삐져나온 옥순이의 소문을 겨우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어두운 틈새에서 삐져나온 소리 소문이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강렬한 파열음을 동반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고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상태로, 그저 그 소리 소문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탄갱」의 주인공은 옥순이라기보다는 강제동원된 조선인 탄광징용자들이다. 더구나 옥순이에게 일어나는 신분상의 변화는 옥순이 말의 직접인용이나 직접묘사로 표현되는 경우는 적고, 주로 옥순이에 대한 조선인 탄광징용자들의 생각이나 옥순이에 대한 소문을 통해 표현된다. 옥순이는 ‘김돌산의 안사람’, ‘돌산의 안해’, ‘긴상’(성씨 ‘김’에 일본식 존칭 ‘상’을 붙인 것) 등으로 불린다. 때로 ‘옥순이’라고 불릴 때가 있는데 이 경우는 성적 대상으로 여겨져 남성 징용자들의 독백을 통해서 ‘불려질’ 때이다.
설사 옥순이의 말이 직접 인용되거나 감정이 묘사될 때조차도, 어떤 이물감이 느껴지곤 했다. 옥순이의 말이나 감정 속에는 작가인 안회남이나 조선인 남성 징용자들의 시선이 뒤섞여 있는 듯하다.
동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던 옥순이는 나까무라의 정부라는 소문이 돌자 갑자기 더럽고 미운 대상이 된다. 나까무라가 옥순이에게 ‘누구에게 시집갈래, 최장근에게 갈래’라고 희롱하자, 옥순이는 시집갈 상대가 나까무라가 아니어서 어쩐지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묘사된다. 옥순이가 조선인 징용자 상대의 ‘갈보’집 여자가 되자, 조선인 징용자들은 그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까무라의 잘못으로만 여긴다.
이런 장면과 표현을 대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옥순이가 정말 저렇게 말했을까, 옥순이가 정말 저렇게 느꼈을까, 되묻게 된다. 옥순이에 대한 소문은 끊임없이 나오는데 그 소문은 나를 옥순이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단언컨대, 그 속에 옥순이는 없다, 그 누구도 보려고 하지 않고 혹은 보지 않으려 하는 옥순이의 마음은, 그들 속에는 없다, 없음으로서 존재한다. 없는 셈 쳐지나 자신에 대한 소문에 강렬한 파열음을 내며 여기저기서 삐져나오는 그/녀들의 몸들. 이처럼 ‘옥순이’라는 존재는 어둠 속 어둠, 보이지 않는 것 속에 다시금 생기는 ‘보려고 하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장소’를 날카롭게 증언한다.
조선인 징용노동자를 상대하는 ‘산업위안부’의 존재
옥순이는 소설 속 인물이다. 동시에 옥순이는 현실의 인물과 겹쳐진다. 조선인 남성들이 강제동원되었던 탄광촌 부근에는 옥순이와 같은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다. 단편적으로만 나타나는 그녀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자.
히구치 유이치의 논문 「조선요리점 여성과 산업위안부」(『해협』 1992년 10월)을 보면,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 여성들은 옥순이처럼 남편을 따라온 경우도 있었고, 1910~1920년경 조선인 집단 거주지구에 형성된 조선요리집에 집안 빚에 팔려오거나 속아서 온 젊은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요리집은 식사대접 뿐 아니라 매매춘이 이뤄지는 곳이 많았고 ‘조선유곽’, ‘반도카페’, ‘조선빠’, ‘삐야’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조선요리점・산업 ‘위안부’와 조선의 여성들— 묻혀진 기억에 빛을~」, 고려박물관 2017년 기획전시 자료집, 2017년 8월 30일~12월 28일, 2쪽)
통계를 보면 1935년에 주로 오사카 등지에 집중되어 있던 요리집이나 접대부 수가 1942년이 되면 급격히 감소하고, 그 대신에 야마구치, 후쿠오카, 나가사키 등 탄광 부근의 접대부 수가 증가한다. 1939년 국가총동원법이 실시된 이후 1945년까지 약 70만 명에 걸친 조선인이 일본으로 강제연행 강제동원되는데, 이들의 저항이나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인 ‘산업위안부’를 탄광 등 기업 주변에 두었기 때문이다.
※‘산업위안부’라는 말은 히구치 유이치가 「조선요리점 여성과 산업위안부」에서 쓴 말로, 당대에 사용되던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정진성의 연구노트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사회와 역사』63, 한국사회사학회, 2003)에서 ‘기업위안부’라고 지칭된 적이 있다. ‘산업위안부’도 ‘기업위안부’도 징용된 조선인의 위안시설 설치 및 관리에 일본 기업과 정부가 함께 관여했다는 함의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왜곡된 표현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담아 ‘산업위안부’를 사용한다.
‘산업위안부’는 누가 설치하고 관리했을까? 탄광 주변 위안시설의 설치·관리에 일본 기업이 깊이 관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기업이 관여했던 기록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1943년 1~2월에 이뤄진 일본의 노동과학연구소 조사 『반도인 노무자의 작업능률에 관한 과학적 견해』가 명확하다. 기업은 위안 시설을 지정하고 건물을 대여하고 이용료를 결정했으며 음식값을 배급기구 속에 포함하는 등 위안 시설의 경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히구치 유이치, 26~27쪽)
특히 “석탄 생산효율이나 가동율을 저하시킬 수 있는 성병 대책에 대해서는 회사가 직접 관여하여 진료를 실시”했다. 1938년 4월 2일자 『후쿠오카일일신문』에는 ‘특수요리점’을 개설할 수 있는 지역을 지정해서 풍속 폐해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고, 지정된 지역은 각 경찰서장이 여성들의 고용계약 및 배당량을 명시하여 감시하도록 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삼등 요리점의 손님 유혹은 12시까지」/고려박물관 2017년기획전시자료집, 29쪽) 이러한 기사를 보면, 산업 위안시설의 관리·경영에는 기업뿐 아니라 지역관리 및 경찰이 함께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탄갱」의 무대가 된 후쿠오카 지역도 마찬가지다. 1992년, <지쿠호 탄광회>의 “한일합동 지쿠호 지역 강제연행 자료 조사단”은 징용자 60명을 인터뷰하고 조사한 결과 10개의 산업위안소가 있었고 가까이에 성병 전문병원의 흔적도 있음을 확인했다. 증언에 따르면, 기업이나 회사의 탄광노무 담당자는 우수한 생산량을 달성한 조선인을 이 위안소로 인솔해 왔다고 한다.(「탄광의 조선인 위안부, 교사들이 조사, ‘접객점’ 10개소 확인」, 『서일본신문』, 1992년 2월 21일, 석간 10면. 고려박물관 2017년 기획전시자료집, 27쪽)
산업위안소, 조선인 노동효율 높이려 日회사와 정부가 관리
소설 「탄갱」에는 ‘데이쟈꾸’[定着] 정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데이쟈꾸’란 ‘정착’이라는 한국어를 일본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명확한 일본 발음이라기보다는 조선인들에 의해 조금 변형된 발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탄광 주변에 ‘정착’시켜 도망과 저항을 방지하려는 정책이 추진된 적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 기업은 징용자들의 계약 기간을 강제로 2년 연장하는데, 이에 대한 불만과 도주를 막기 위한 대책이 다각적으로 모색된다.
그 대책은 “사전공작”과 “사후공작”으로 나뉘어졌다. 하야시 에이다이의 『강제연행·강제노동-지쿠호 조선인 탄광부의 기록』(현대사출판회, 1981년, 100쪽)에 따르면, 사전공작은 “가족을 불러오는 것, 배우자 알선, 연고자를 불러오는 것, 공출지 탄고사정 설명, 정착 지도, 작업 장소에 따른 재교육”이었다. 사후공작은 “재계약자에게 상여수당 지급, 재계약자에게 다소간 수당을 추가, 재도항자에게 절차를 간략화, 재계약은 2년 원칙으로 함, 협회와의 연락을 긴밀히 함, 완전한 회원장을 실시함”을 내용으로 했다.
소설 속 ‘데이쟈꾸’와 내용이 유사한 것은 “사전공작”인데, 조선인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탄광으로 배우자, 연고자를 불러오거나 일본 여성과 결혼을 장려하는 정책이었다. 이와 같은 가족연행 정책과 함께 실시된 것이 산업위안부 도입이었다. 산업위안소 관리가 노무과 소관 업무였다는 것, 산업 위안소의 궁극적 목적이 조선인 탄광부들의 도주방지 및 노동효율상승에 있었다는 점 등은, 산업위안부를 두는 정책 배후에 기업이나 회사의 개입뿐 아니라 정부 차원의 종합적 개입과 관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정진성, 210쪽)
「조선요리점 여성과 산업위안부」(히구치 유이치, 27쪽)에 기록된, 규슈 탄광에서 노무관리에 관여했던 사람의 증언은 위안시설에 기업이 관여했던 방식과 함께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의 위안소 이용실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도망 방지를 위해 회사가 “특별위안소, 알기 쉽게 말하자면 성해결소”를 탄광 부근에 특별음식점 형태로 두었으며, 여기에는 “반도 여자가 있으면 안성맞춤”이며 일반적으로 한 명이 백 명을 상대하도록 한다고 말한다. “국어(일본어를 의미)를 충분히 할 수 없는 자는 반도 여자가 아니면 기분이 나지 않아서, 어떤 탄광에서는 부근에 그 시설이 없어서 천리 길을 멀다 않고 가기 위해서 2~3일 일을 쉬고 오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위안소는 성병이 발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도주의 유혹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관리의 손길을 여기까지 뻗쳐야” 함을 설파한다. 특히 <이입노동자 훈련 및 취급 요강>(1942년)을 보면 “특별위안소는 경찰 당국과 연락하여 처리하라”라는 표제 하에 특별위안소를 각 지방의 실정에 맞춰 경찰 당국과 연락해서 관리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려박물관 2017년 기획전시자료집, 30쪽)
이처럼 옥순이가 유곽에 가게 되는 과정은 단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옥순이들이 강제동원된 남편을 좇아, 팔려서, 빚 때문에 일본에 온다. 그녀들의 이동 배경에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뒤섞여 있다. 그리고 1937년 이후 옥순이들은 ‘제국의 자본주의·가부장제’가 ‘피식민지의 자본주의·가부장제’를 첨예하게 작동시켜서 발생한 분열과, 그 분열을 통해 피식민지를 관리하는 시스템 속에서 ‘산업위안부’-어둠 속 어둠-가 되었다.
어둠 속 어둠, 피식민자이자 비(非)국민 옥순이들
또 한 명의 옥순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조선요리점 여성과 산업위안부」(28쪽)에 등장하는 심미자는 ‘일본의 사쿠라를 공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관에게 체포당해 고문을 받고 기절한 사이, 후쿠오카 위안소로 연행된다. 그녀는 27명 여성 중 7번이라고 불리며 하루에 30명 이상의 손님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1937년 2월 10일 『후쿠오카 일일신문』에는 조선인 작부 2명이 살해당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기사가 실린다. 처음에 범인은 일본인으로 알려졌지만, 나중에 조선인일 가능성이 이야기되고 있다. 즉 조선요리집이나 특별요리집의 산업위안부를 이용한 자들 중에는 일본인 노동자들도 있었던 것이다.(<조선인 작부 4명을 살상하고 도주>, 《福岡日日新聞》, 1937년 2월 10일)
이처럼, 옥순이들, 어둠 속 어둠이 드러나는 방식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분명 존재했다. 이 엄정한 ‘사실’은 보려고 하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세상에서, 어둠 속 어둠은 칠흑처럼 어둡고 동시에 너무나 거대하다.
사실 ‘산업위안부’라는 말은 낯설 뿐 아니라 충분한 비판과 논의를 거쳐야 하는 말이다. 빨래와 밥을 해주는 ‘부엌데기’, ‘위안부’, ‘근로정신대’, ‘요리집 여성’, ‘산업위안부’는 각각 다른 층위의 권력과 그에 따른 여성들의 위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순이들의 삶 전체를 통해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상태들은 명확하게 구별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녀들의 삶 전체로 연결되어 있다. 위안부는 군인들의 빨래나 밥짓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고 근로정신대로 갔다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성노예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정진성, 221쪽) 부엌데기 옥순이가 너무 손쉽게 성폭력이나 성노예화의 대상이 되듯이. 해방 이후의 삶이라고 해서 ‘몸’ 하나 가지고 살아가는 그녀들의 형편이 변화할 리 없다. 더구나 그녀들은 해방된 조국의 ‘부끄러움’으로 치부되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제2, 제3의 가해에 노출된다.
두려운 것은, 한 여성에게 가해진 이러한 중층적 억압을 제국주의적 페미니즘이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비가시화된 식민주의의 폭력이다. 그 주변에 있던 여성들은 비가시화된 강제동원 속 다시금 비가시화된 폭력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 중층적으로 비가시화된 두 부분을 대립적으로 위치시키고, 피식민지 남성의 가부장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피식민지 여성의 억압을 강조하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권력이 피식민지 남성의 가부장제를 활용하여 피식민지를 통치하고 분열시켜 왔다는 점은 보지 않고, 피식민지 남성의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저항적 민족주의 전체를 비판하는 알리바이를 만들기도 한다.
민족주의적 저항 속에 또아리 틀고 있던 성차별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은 지배-피지배 구조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국주의나 제국주의 페미니즘의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이 각각의 여성의 위치가 보여주는 식민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책임을 명확히 비판하면서도 여성들의 몸이 놓인 각각의 상태가 교차하고 겹쳐지는 지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강제동원된 조선인 탄광부들의 신분은 소설 속에서도, 증언에서도, 어디까지나 조선인 남성이다. 식민지기에도 해방 후에도 조선인 탄광부들이 민족 혹은 국가의 일원이라는 점에는 변함없다. 그러나 옥순이들은 조선인의 아내와 부엌데기까지는 ‘조선인’이라는 민족 안에 포함되지만, 일본에 협력한 앞잡이의 ‘정부’가 되거나 성노예인 ‘위안부’가 될 때, 민족과 국가 밖으로 내몰린 비(非)국민이자 비(非)여성이 된다. 가족, 민족, 국가의 ‘수치’로 위치 지어진 그녀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며, 결혼 대상으로 여겨지지 못하고 차별받았으며, 자신의 고통을 말하기까지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고 여전히 필요하다.
부엌데기와 잡부, 위안부, 근로정신대, 요리집 여성, 산업위안부 등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은 일본의 기업, 정부, 군대의 책임, 더 나아가 ‘천황제’와 식민주의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별이 다시금 순결 이데올로기와 민족·국민의 ‘자격’을 묻고 그녀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느끼도록 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깊이 물어야 하는 것은 부엌데기, 잡부, 위안부, 근로정신대, 요리집 여성, 산업위안부, 그리고 심지어 ‘아내’와 ‘딸’까지도 겹쳐져 있는 ‘여성이나 소수자’의 몸이 놓인 (성)폭력에 취약한 상태와 그 취약성 속 각 상태들의 연결과 유사성이다. 각각의 여성들이 겪은 고통의 무게를 재고 비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각각의 상황에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선을 세우면서 그/녀들 사이의 연결을 말하는 것은 가능할까?
강제동원 논의 속에 그녀들의 자리 마련하기
옥순이의 소문, 심미자의 증언, 살해당하고 중상을 입었으나 애도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작부 4명의 기사. 그녀들의 ‘몸들’은 권력의 폭력성과 인식의 공백을 날카롭게 비추는 ‘거대한 어둠’의 에너지다. 그것이 에너지일 수 있는 것은 옥순이, 심미자, 작부가 끊임없이 여러 상태들을 ‘이행’하면서 서로 겹쳐진 경험을 해 왔다는 점에 있다.
그녀들을 통해서 나는, 현재의 ‘옥순이들’에 대한 소문과 ‘심미자들’의 미투(#MeToo)와 살해당함으로써만 말할 수 있었던 애도되지 못한 여성들과 만난다. 그리고 그 옥순이들, 심미자들, 살해당한 그녀들이 기존과는 다른 소통방식을 장착한 비밀스럽고 내밀한 유튜버가 되는 날을 꿈꾼다. 그녀들의 목소리와 몸짓을 한국으로 ‘이주결혼’을 한 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성산업에 유입된 가난한 여성들이,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에게 속해서만 난민인정 심사를 받을 수 있는 여성난민들이 듣고,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트라우마를 만드는 것은 과거일까 미래일까. 산업위안부를, 위안부를, 작부들을, 부엌데기를, 아내를, 딸을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존재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트라우마를 심화시키는 것은 ‘과거’의 고통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녀들이 부끄럽지 않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몸짓을 할 공통장이 없을 때, 그녀들의 트라우마는 심화되고 다른 그녀들에게서 반복된다. 겨우 시작된 그녀들의 목소리가 혐오 발언으로 차단되어 버리는 것을 막을 방법이, 지금 현재 한국의 강제동원에 대한 논의 속에 과연 마련되고 있을까.
나는 옥순이를 매우 오래전부터 만나왔고, 지금도 만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만나게 될 것이 두렵고, 또한 기쁘다. 그/녀들의 트라우마는 그 어떤 트라우마보다 집단적 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내 속에도 있는 이 집단적 트라우마를 넘어서기 위해, ‘그/녀들’과의 대화가 절실했다. 그 대화의 힘으로 나는, ‘옥순이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옥순이인 채로’ 부끄럽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을 ‘오늘’을 꿈꾼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미래의 트라우마로 만드는 고리를 끊어내는, 어둠 속 어둠인 옥순이들과 함께.
※고려박물관 기획전시 「조선요리점・산업 ‘위안부’와 조선의 여성들— 묻혀진 기억에 빛을~」(2017년 8월 30일~12월 28일) 자료집과 히구치 유이치(樋口雄一)의 논문 「조선요리점 여성과 산업위안부」를 보내주신 도쿄 <고려박물관> 오바 사요코(大場小夜子)님께 감사드린다.
[필자 소개: 신지영. 한국근현대문학과 동아시아근현대문학·사상·역사 전공.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조교수. 「한국 근대의 연설·좌담회 연구」(2010)로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비교에 반하여: 1945년 전후의 조선·대만·일본의 접촉사상과 대화적 텍스트」(2018)로 히토쓰바시대학대학원에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성 중인 코뮌 활동에 참여하면서, 1945년 전후 한국과 동아시아의 마이너리티 코뮌의 형성·변화를 이동·접촉의 사건 및 동아시아 기록문학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난민*현장> 프로젝트 및 <수요평화모임>을 통해 만난 연구활동가들과 함께, 현재의 난민운동과 소수자 운동을 접점을 모색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금 역사 속 동아시아의 난민과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不부/在재의 시대』(2012), 『마이너리티 코뮌』(2016), 『동아시아 속 전후일본』(일본어, 공저, 2018) 등이 있다.]
이 기사 좋아요 4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