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여성’의 38선 월경과 피난 이야기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북에서 남으로, 난민이 된 여성들

김아람 | 기사입력 2019/11/23 [09:07]

한국전쟁 전후 ‘여성’의 38선 월경과 피난 이야기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북에서 남으로, 난민이 된 여성들

김아람 | 입력 : 2019/11/23 [09:07]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군사주의와 여성의 지위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편집자 주

 

한국전쟁 전후 ‘난민’이 된 여성들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상실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경험과 그 의미에 대해 짚어보려 한다. 특히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주하며 ‘난민’이 되었던 여성이 월남 또는 피난하게 된 배경, 이후의 정착과정을 들여다보려 한다. 여성의 이주는 남북한의 체제 대립과 군사 작전을 일차적인 배경으로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가족 관념과 문화, 젠더 차이라는 계기가 함께 있었다.

 

▲ 피난민의 남하     ©국가기록원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전라남도 장흥과 제주도로 피난한 여성들에게 주목할 것이다. 장흥은 1960년대 전반까지 전국 최대 규모로 북에서 온 피난민을 대상으로 한 ‘난민정착사업’이 있었던 지역이어서 황해도 출신의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제주도는 난민이 가장 장거리로 이주한 곳으로, 제주4.3사건 후 마을 재건과 전쟁 후 복구가 동시에 필요한 곳이었다.

 

이제부터 고향이 다른 네 명의 여성(가명)이 겪은 월경과 피난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고향을 잃을 뿐 아니라 친정과도 이별하게 된 여성들

 

북한에서 남한으로의 이주는 해방 후~한국전쟁 이전의 ‘월남’과 전쟁 시기의 ‘피난’으로 구분한다. 전쟁으로 인해 남한에 오게 된 사람들은 스스로 ‘월남’했다고 말하지 않고 ‘피난’했다고 한다. 월남은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면, 피난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남이든 피난이든 넓은 의미에서는 강제이주라고 볼 수 있으나 둘은 구분이 필요하다. 전쟁 이전 시기 ‘여성의 월남’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의지가 중요했다.

 

강수자 씨는 먼저 월남한 남편을 찾기 위해서 혼자 아기를 데리고 내려왔다. 그는 남편을 찾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그 의지를 갖게 된 데에는 남편이 없이 친정에 자주 오가면서 비난을 받았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친정에 가면 자-꾸, 친정 큰아버지하구, 할머니하구 데려다 문초하는 바람에. 우리 집에는 시집살이 못 하구 쫓겨난 사람도 없구, 친정살이를 못해서 쫓겨 온 사람도 없구 헌디, 어떻게 너는 시집가자마자 첫 애기 낳구 친정에만 나드느냐가, 동리사람도 수군도 대구, 동리에 나가면 챙피스럽다고.”(강수자/1927년생)

 

전쟁 시기 북한 지역에서의 피난은 미군의 작전으로 지역이 소개(疏開, 제한된 지역에 집중되어있는 부대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받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주민들이나 시설들을 분산시키거나 분리함)되어 강제된 것이었다. 이때 여성들은 남성을 포함한 가족과 집단적인 이주를 했다. 황해도 옹진에서 피난한 이신옥 씨는 가족들과 서해안의 섬들을 거쳐서 전남 목포로 오게 되었다.

 

“저- 백령도 섬에서, 백령도 섬에서 기린도라는 섬에로 나왔어. 배타고. 배로 나와가꼬 목포 항구에 떨어졌어. 가족들 다 나왔지. 엄마 아부지. 다 나오셨지. 내가 열일곱 살이니까.”(이신옥/1934년생)

 

▲ 피난민 행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쟁 이전에 이미 월남을 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에서 다시 피난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여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원주지를 떠나야 했다. 전옥숙 씨는 월남해서 경기도 평촌에 살다가 1.4후퇴 때 다시 제주도로 피난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피난하게 된 이유는 남편이 미군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난하지 않았더라면 더 풍요롭게 살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1․4후퇴 때 우리 안 나왔으면 괜찮았지. 거기 있는 사람 다 부자 됐대. 우리 주인양반은 미군 부대 다니는데 미군들이 나가야 된다고 막 차타고 와가지고 태워가지고 그 고생을 하고. 고생한 생각은 말도 못 해.”(전옥숙/1928년생)

 

월남하거나 피난하는 여성은 북한 출신의 모든 난민이 경험한 ‘고향의 상실’을 겪었다. 기혼인 경우 원 가족(친정)과도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 여성의 결혼 자체가 곧 ‘시집간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친정과의 헤어짐을 뜻하지만, 북한에서 남한으로 간다는 것은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로 여겨졌다.

 

한번 월남을 시도했다가 다시 친정에 돌아갔던 전옥숙 씨는 어머니가 그동안 날마다 슬퍼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시동생이 자신을 데리고 가자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냥 도로 집에 들어가니까 우리 엄마가 막 그 매일매일 울고 난리를 피우시다가 가니까 좋아서. 그러더니 시동생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가니까 그땐 아무 말도 못 하고.”(전옥숙)

 

강수자 씨는 아기를 데리고 떠나는 딸에게 어머니가 포대기를 해 주었다. 인터뷰했을 때 그는 어머니와 헤어진 지 7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외동딸인 자신이 어머니를 떠났던 장면을 떠올리며 슬퍼하였다.

 

“우리 친정에. 가니까 우리 엄마가 솜 포대기, 포대기를 이렇게 그 해주더라구. 그거 싸 갖구 가라구. [내가] 외동, 외동딸이잖아요. 거기서 울고불고 허다 가서는 그냥 넘어 와매 이때까지 못 본 거예요.(울먹임)”(강수자)

 

북한에서 월남, 피난한 여성들의 이주 동기와 배경에는 가족관계가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남편을 따라서 이주하거나 가족과 함께 피난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들의 이주는 실향에만 그치지 않았다. 원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성들이 이주하는 과정에서도 남성들과는 다른 경험들이 존재했다.

 

▲ 1954년 한국의 피난민 현황.     ©KCAC(한국민간원조사령부)

 

겨울 얼음판 위 38선 월경과 피난의 험난한 여정

 

미군정(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간, 한반도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함)은 사회 각 분야의 정보원을 통해 난민과 사설 구호단체의 정보를 수집하고, 38선을 따라 수용소를 설치하여 월남하는 사람들을 관리하였다. 이들이 남하하는 동기, 북한에서의 행적, 생활 수준과 학력, 이념적 성향 등을 조사하면서 만주와 북한 지역의 실시간 정보를 수집하였다. 미군정이 월남민의 정보를 수집한 것은 남하하는 난민을 정보원이자 사상검열이 필요한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이연식, 「해방 직후 ‘우리 안의 난민·이주민 문제’에 관한 시론」, <역사문제연구> 35, 2016)

 

여성이 38선을 넘는 길도 순탄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떠났다고 하더라도 경제력이 없고 체력이 달리는 상태에서 우연한 도움들을 받았다. 이때 여성과 아이라는 점이 이념과 사상의 통제를 약화시켰고,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작용하고 있었다.

 

강수자 씨는 함흥-철원-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38선이 지나는 철원에서 겨울철 얼음판 위를 힘겹게 걸어왔다. 그는 홀로 아기를 데려와야 해서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모래를 흩뿌리며 얼어있던 개천을 지나왔다. 주목할 점은, 길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38선을 여러 차례 월경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는 전쟁 이전이었기 때문에 38선 월경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함흥으로 가는 기차를 타가지구서는 시누이 집에서 하룻밤 자고서는, 강원도 오는 열차를 타가지구서는 철원으로 해서. 철원에서 넘어갔다 넘어갔다 얼음판에 미끄러워가지구선, 저기 치마 앞에다 모래로 아이는 업고, 요만한 보따리는 이구, 보따리도 아이 있어서 무거워서 많이 못 가지잖아요. 한 벌씩, 겨울옷도 한 벌, 여름옷 한 벌, 가을 봄 입는 옷 한 벌 이렇게 싸서, 아이 옷 하구, 기저귀하구. 옛날에 기저귀 다 천으로 하지 않았어요. 그 기저귀하고 싸가지구서는 머리에다 이구, 얼음이 미끄러우니까 치마 앞에다가서는, 모래를 담아가지구 모래를 이렇게 흩꾸면서리 이렇게 넘어왔어요. 넘어왔다가서는 저리 이렇게 빠져야되는데 갔다가 이, 개[개천] 옆으로 길이 있더라구. 글로 가면 되는 줄 알고 글로 갔다 넘어갔다 넘어갔다 넘어갔다 넘어갔다” (강수자)

 

▲ 남하열차.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까지 피난민들로 가득찼다.     ©전사편찬위원회

 

그의 월경에서 또 다른 주목할 점은, 감시를 하고 있던 미군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렵게 월경을 해서 38선 이남으로 왔을 때, 모르는 남성 노인이 길을 알려주며 그에게 미군의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그 길을 따라 미군을 찾아갔더니 통역까지 나와서 도와주며 먹을거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당시 도움을 준 사람은 “미군은 소련놈을 닮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이 길로, 이 쪽으로 빠지지 말구 저쪽에도 가지 말구, 쭉- 곧장 이렇게 올라가라구 그러더라구. 올라가면 산이 이렇게 좀 높긴 해두, 쉬맨 쉬맨 올라가라구. 올라가믄, 그 38선 다- 올라가믄 거기 미군이 하나 막 쳐가지구 서 있다구 그러더라구. 총 매구 서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말라구. 이북에 소련놈 닮지 않다구 그러더라구요. 이남에 미군놈들은 신사적이라구 하매, 그렇게 얘길 하면서, 거기 이제 또 그 미국 사람이 모이라구 허먼 조선 사람이 나올거라믄 통역이 나온다구 그러더라구요. (…)

 

한국 사람이 나완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고 부르더라구요. 그래 부르니깐 오라고, 아주머니 괜찮으니까 이북에 소련놈 닮지 않으니깐 오라고, 오라고. 내가 있이니까 오라고. 나도 이북 사람이라고 하매 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갔어요. 가니까 빽-빽 하더니 미국 사람 딴 말 안하고, 애기부터영 뒤쳐 보더라구요. 애기 뒤쳐보다, 이걸 만져보고서리 “아이고, 아이고” 자꾸 그러더라구요. 그치륵하매 어딜 가더라구요. 가더니 건빵하고, 옛날에는 바둑껌(치클릿 껌. 바둑돌같이 생겼다고 해서 ‘바둑껌’이라고 함)이 있었어요. 그때는 커핀지 뭐인지 몰랐어. 하여튼 커피하구 그치르게네 갖다주더라구.“ (강수자)

 

강수자 씨의 경우, 특히 아기를 데리고 있었다는 점이 미군의 도움을 받는 데에 크게 작용했다. 또 미군 측에서는 소련군과 미군을 비교하며 월남하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은 월남민들을 일정하게 활용하기 위해 수용하였는데, 여성의 경우에는 소극적으로나마 체제의 차이를 인식시키며 월경을 돕기도 했다.

 

▲ 한국전쟁 중 피난민들 그리고 탱크.     ©구글(무료 이미지)

 

중혼하는 남성들

 

한편 강수자 씨는 먼저 월남한 남편을 찾으려고 월남하여 서울까지 도착했는데, 뜻밖의 일을 알게 된다. 남편이 다른 여성을 “얻어 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주위에 말하기를 북한에서 처가 돌아오면 헤어질 것이라고 했단다.

 

강수자 씨는 동향 출신 사람의 도움을 받은 끝에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가 왔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곧이듣지 않았고, 직접 만나도 반가워하기보다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혼자서 못살겠다구 아마, 하나 얻어 살 생각 헌다고 하매, 이북에서 각시 오면 헤어질 거를 하구서는 그렇게 하구 살지 뭐, 그 소리 하더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아줌마가 그 소리꺼지 하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하믄 안된다고 하매 막 욕했대. 여자들은 몇 십년두 사는데, 그까짓 것 1년도 아니고 뭐 몇 달 못 사는가 하매 욕했대. 얻지 말라고 하매 욕했대. 아 그런 소릴 거기서 하더라구요. 그래서 나 왔다 해도 그 나무 뒤에 서니깐 못 봤지. 못 보니까 곧이 안 듣더라구. 왔다구 해도. [아주머니가] 하두 나오라 그래서 나가 나가니까 그때 놀래더라구. 진짜로 놀래. 진짜로 놀래더라구요. (웃음)” (강수자)

 

월남하거나 피난한 남성은 중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신으로도 이주가 가능했고, 젊은 나이에 남한에 정착하게 된 경우에 대체로 다시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휴전 후에는 분단이 고착되며 가족과 재회할 수 없게 되자 그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강수자 씨의 사례로 보면 남편은 심지어 아내와 재회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강수자 씨는 이에 대해 화가 났다거나 남편을 원망했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재회한 남편은 같이 살고 있던 여성과 바로 헤어진 후 강수자 씨와 평생을 살았다.

 

▲ 피난민 텐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남성 부재와 여성의 피난생활, 지역의 배타성을 겪다

 

6.25 전쟁이 발발한 뒤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기 피난해야만 하는 상황은 남녀 누구에게나 극단적인 공포와 불안의 시간이었다. 먼저 남성은 군대 징집의 우려가 상존하였고, 여성은 남성 부재에 대비해야 했다.

 

제주도에 피난하게 된 전옥숙 씨는 남편이 세 차례나 징집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에는 전쟁 기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세워졌고, 국민방위군이라고 불린 제2국민병과 현역병이 들어왔다.(한국전쟁 시기에 제주도는 피난지와 훈련 장소, 개발 지역으로 활용되었다.) 군 상부에서 국민방위군의 식량을 횡령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전옥숙 씨의 남편은 훈련소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서 “해골”처럼 보였고, 자신이 먹을 것을 해서 가져다주기도 했다.

 

피난 상황에서 남성 가부장이 안정적인 상황인 경우에는 여성의 생활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신옥 씨는 부친이 난민 대표를 맡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목포에 왔을 때도 부친은 수용소에서 책임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고, 당시 경험에서 특별한 어려움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전시 상황에 난민의 어려움은 주거 문제에서 일차적으로 나타났다. 법적으로는 건물이나 가옥 주인은 난민에게 임대료를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다.(「피난민 수용에 관한 임시조치법」 시행 1950.9.25, 법률 제146호, 일부개정) 그러나 실제로 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서는 거부감도 적지 않았다.

 

제주 성산항으로 들어왔던 전옥숙 씨는 현지인이 “피난민이 들어와서 우리도 못 살겠네, 못 살겠네”하며 집도 잘 안 내주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고친 집마저 빼앗겼다고 하였다. 그는 “[제주] 사람들이 미개인이라 깨질 못 했더라”고 하며 입도 당시 제주도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것을 드러냈다.

 

“여기 온 사람은 집을 빌리고 하니까 초가집 다- 낡은 집에 사람 들어갈 수 없는 집에, 우리 주인 양반이, 다- 그냥 할망이 노망을 해가지고 막 집을 다 튿어놓은 거 그 집을 빌어 가지고 다- 수리했어. 한쪽엔 경찰이 살고 우리가 살고 그러는데 넘들이 그러더라고, 그거 고쳐도 소용없다 주인이 아주 악한 사람이라 뺏는다 그거야. 정말 깨끗이 해놓으니까 나가라잖아. 나가라니까 딴 집에 가도 우리 ○○(딸) 낳았는데 조금 걸어 다녀 통탕통탕해도 야단하지. 그렇게 심하더라고. 여기 사람들 좀 배타심 있어서 좀 끼리끼리, 말을 해도 소용은 없지만은 좀 거식하더라고. 자기네 고향 여기 사람들끼리만 살아서 타인은….” (전옥숙)

 

북에서 남으로 이주하게 된 여성들의 역사

 

지금까지 고향이 다른 네 명의 여성이 겪은 월경과 피난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전쟁 이전 38선 월경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여성에게는 생사가 좌우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동시에 경계를 서는 미군의 도움이 있기도 했다. 이는 일정하게 미군의 선전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다. 여성의 월남에서 남편과 가족은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남성은 중복하여 혼인하기도 했고 이에 대해서 여성은 남편을 다시 받아들였다.

 

전시에는 남성의 징집이 여러 차례 있으며 여성 또한 그 부재를 감당하고, 오히려 남성을 지원하고 있었다. 난민 가부장의 지위에 따라서 여성의 생활도 달라졌다. 난민에게는 피난지에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현지인과 갈등할 수밖에 없었고, 난민은 배타성을 경험하였다.

 

▲ UN의 피난민 원조 계획.     ©국가기록원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한반도 내에도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38선과 휴전선을 경계로 하여 북에서 남으로 이주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여성들의 이주에는 남편과 가족의 이주가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이미 월남을 한 상태에서 전쟁을 경험하면, 여성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주를 하게 되었다. 기혼인 여성의 월남과 피난은 원 가족과 영원히 이별할 것을 예상한 것이었다.

 

월남과 피난 경로는 여성에게도 위험하고 험한 길이었다. 여성과 아기가 38선을 월경하는 것은 특히 그러했다. 이 경계에서 미군은 이들을 받아들이며 소련군과는 다름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남편을 찾아 떠난 여성은 남편이 다른 여성과 살려고 했다는 점도 받아들이고 살아갔다.

 

전쟁 시기에는 남편이 징집되면 여성이 생활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국민방위군의 경우, 여성이 먹을 것을 지원하기도 했다. 난민의 피난 시기에는 현지인과 거주지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고, 때문에 피난민은 배타성을 보이는 현지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 네 명의 여성들은 끝내 농촌에서 정착하며 생활을 일궈 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 남편과 사별한 후의 어려움, 지속되는 빈곤 등 여러 난관을 마주하며 분투해 갔다.

 

[필자 소개: 김아람. 한국현대사 전공.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이화여대‧가톨릭대 강사, 역사문제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 인권위원. 한국전쟁 후 사회가 겪은 피해에 대해 연구함. 미군 남성과 한국 여성 사이의 ‘혼혈인’, 고아‧‘부랑아’, 빈민, 난민 등 그간 역사 연구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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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늘 2020/05/24 [10:31] 수정 | 삭제
  • 부인이랑 떨어졌을 땐 딴 여자 얻을거라고 떠들고, 부인이 나타나니까 동거하던 여자 내보내고... 이게 사람인가 싶네요! 또 혼자는 못살겠대... 와 진짜
  • 늘보 2019/11/25 [20:25] 수정 | 삭제
  • 연재 엄청 잘 보고 있어요. 나였다면 하고 생각해보니까 너무 무섭고 슬퍼서 읽기가 힘들었어요.
  • mitten 2019/11/24 [13:21] 수정 | 삭제
  • 저도 울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 한 자락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게 생각났어요. 할머니의 역사였을 텐데 내가 몰랐던 얘길 깜짝스럽게 들었지만, 그땐 모르고 지나쳤네요. 세상의 많은 할머니들이 책에는 적히지 않은 전쟁의 역사를 다 품고 계셨을 것을 생각하며 소중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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