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 ‘농인’ ‘여성’ 세계를 넓히다<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혜미: 농인 활동가 및 웹디자이너, 베를린※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편집자 주
혜미 이주 이력서
이주 3년 차. 2005년~2017년 한국에서 웹디자이너로 근무 2017년 9월 덴마크 ‘세계 농청년 리더십 양성기관’에서 9개월 연수 2018년 1월 영국 런던 ‘청각장애인 정신건강 서비스 기관’ 인턴 2018년 2월 벨기에 헨트 ‘비주얼박스’ 촬영·편집 인턴 2018년 6월~현재 독일 시민단체 ‘투게더함흥’ 및 ‘코리아협의회’ 활동가
혜미는 내게 우리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아닌 ‘농인’과 ‘청인’으로 구별됨을 가르쳐준 친구다. 혜미의 언어는 손의 움직임과 얼굴 표정, 몸짓 모두를 포함한 ‘수어’다. 혜미는 청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수어라는 언어를 통해 농문화를 만들어가는 ‘농인’이고, 나는 그와 다르게 음성 언어를 구사하는 ‘청인’이다. 우리 사이에 장애가 있고 없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짝이는 박수소리> 상영회 현장은 각자 다른 언어를 지닌 농인과 청인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될 때, 한국 농인인 혜미와 라트비아 농인인 다나가 사회를 봤다. 한국 코다인 이길보라 감독과 독일 코다인 비비안이 패널로 참여했다. 혜미와 다나는 독일 수어로 말했고, 독일 구어 통역사는 이들의 수어를 독일어로 통역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영어로 말했고, 이를 영-독 통역사가 독어로 통역하면 독어 수어 통역사가 다시 독일 수어로 통역했다.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이 복잡한 통역 과정이 포함된 행사를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획부터 섭외, 진행과 통역 방법, 홍보 등 모든 과정이 어려웠지만 혜미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베를린에 도착한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영화가 상영될 때는 독일어, 영어, 한국어 자막이 있어서 참석한 모든 농인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 역시 농인이 중심이었다.
“행사장에서는 농인과 청인 간 구분이 없었어요. 그저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줬죠. 제가 언어 문법이 약하고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인데 너무 많은 분의 도움으로 이번 상영회를 마칠 수 있었어요. 행사 끝나고 저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도와준 분들에 대한 고마운 감정이 몰려와 같이 행사를 기획했던 다혜라는 친구와 펑펑 울었답니다.”
한국에서 농학교만 다니고 농사회에서만 살았던 혜미가 처음 덴마크로 떠나 독일에 정착하기까지, 그에게는 그만의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 찬 이야기가 있다.
처음 만난 새로운 세계, 덴마크로 떠나다
“어렸을 때부터 농학교를 다녔고, 농사회 안에서만 우울 안 개구리처럼 살아서 농인이 한국에만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2009년에 한국 농인이 만든 <데프인디아>(박재현 연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되었어요. 한국 농인 3명이 직접 인도에 가서 인도 농인을 만나는 내용인데, 그날 제 세계가 부서지는 기분이었죠. 아니, 나 같은 농인이 다른 나라에도 있다니! 무엇보다 영화 상영회에서 인도를 다녀온 농인 중 한 명이 여성이었는데 그가 덴마크에서 ‘프론트러너즈’( Frontrunners)란 프로그램으로 유학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어요.”
혜미는 심장이 뛰었다. 다른 나라에 농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날부터 유학 프로그램에 대해 샅샅이 살폈다. 전 세계 농청년들이 모여 국제수어(영어 수어)로 수어의 역사, 농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에 대해 교류하고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혜미는 직장생활 10년 차를 넘기면서 웹디자이너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언젠가 결혼하기 위해 모아둔 적금도 있었다.
하지만 농사회를 벗어나 큰 도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고민 끝에 혜미는 적금을 깨고 덴마크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농사회, 한국이라는 경계를 넘어 진짜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이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떠나는 혜미의 첫 여행이 시작됐다.
덴마크 바일레란 곳에서 혜미는 전 세계에서 온 농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과 서로 다른 문화, 수어, 가치관 등에 대해 국제수어로 대화할 수 있었고 혜미는 이 교류 과정 내내 행복했다. 덴마크에서 지내는 동안 유럽 지역 및 스칸디나비아 농문화제에도 참여하고, 영국과 벨기에에서 한 달씩 인턴 생활을 하면서 혜미는 자신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혜미는 덴마크에서 보낸 시간을 두고 “끊임없는 한국식 경쟁 사회에 벗어나 대화를 통해 서로를 포용하고 이해하는 문화를 접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라고 밝혔다. “여러 친구를 통해 미국 수어, 프랑스 수어, 덴마크 수어를 접하면서 수어마다 담겨있는 그 나라의 문화, 역사를 볼 수 있는 점이 특히 행복했다”고 말했다.
독일 농인과 함께 남북한 손말·수어 프로젝트 시작
덴마크 학생비자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혜미는 유럽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한 선생님이 독일에 북한 농인을 돕는 단체가 있다고 알려주었고, 긴 시간 검색 끝에 ‘투게더 함흥’(TOGETHER Hamhung e.V.)이란 곳을 찾았다. 혜미는 바로 이메일을 보냈고, 단체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게 된다.
“한국에 가기 전에 여기에 한 번 와서 함께 일을 해보는 건 어때요?”
혜미의 마음에는 처음 덴마크 유학 정보를 접했을 때만큼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다. 한국 농인이 북한 농인을 돕는 단체에서 일해볼 수 있다니, 그것도 독일에서! 무엇보다 ‘투게더 함흥’에는 로버트라는 독일 농인이 일하고 있어서 혜미는 더욱 망설임 없이 독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만남으로 혜미는 독일 언론에 나갈 만큼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바로 남북한 수어의 다른 점에 대해 알리는 ‘손말·수어’ 프로젝트다. 남한에서는 ‘수어’가 북한에서는 ‘손말’이라 불린다.
“로버트가 한국 농인인 제게 직접 북한 농인을 만나 서로의 언어를 배우면서 도움을 주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제가 전문적으로 수어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처음엔 걱정도 됐지만 공부하다 보니 한국어와 북한말이 다르듯이 남북한 수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대화를 하면서 오해가 생기기도 했는데, 이런 다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수어에 대해 다루는 일이 중요하겠구나 깨닫게 됐죠.”
손말·수어 영상은 유튜브 채널 “Sonmal Sueo 손말수어”(https://bit.ly/38VRnhh)에 업데이트되고 있다. 채널에서는 남북한 수어의 차이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영상은 혜미와 한국 농인인 리후, 독일 농인인 로버트가 함께 제작한다. 영상에서는 국제수어를 사용하며, 영어와 한국어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 혜미는 기획과 촬영, 영상편집 등 모든 과정에서 일하고 있다.
독일에서 농인으로서 겪는 어려움, 그러나 “계속 부딪혀갈 것”
많은 이주민이 그러하듯이 혜미 역시 독일에서 농인/이주민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크다. 한 예로 혜미는 지난해 2월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비자를 받고, 은행 계좌를 만들기 위해 독일 농인 친구와 함께 은행에 갔다. 독일 농인 친구가 필담(문자 언어를 통한 대화)을 통해 은행 직원에게 계좌 신청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러나 은행 측은 혜미가 받은 프리랜서 비자가 계좌를 만들기 부적합하다고 답했다.
혜미와 친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른 은행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접했고, 신청서를 작성했다. 문제는 은행 관계자와 신청자가 화상 대화를 해야 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했다. 화상 대화가 시작됐지만 혜미는 독일어로 말하는 직원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채팅으로 대화할 수 있는 창도 없었다. 혜미는 수화통역사를 부르거나 필담으로 대화를 하자고 부탁했지만,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랑이 끝에 상담원은 화상대화를 꺼버렸다. 화가 난 혜미와 옆에서 지켜보던 독일 농인 친구는 은행 웹사이트에 항의메일을 넣었지만, 이런 답변이 왔다.
“화상 대화는 무조건 1:1로 해야 합니다. 만약 수화통역사를 데리고 오게 되면, 그 통역사는 제3자가 되기 때문에 개인정보보호법상 어긋납니다. 이런 이유로 당신의 계좌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혜미는 은행 메일을 받고 생각했다. ‘농인이라서 안 돼’ ‘프리랜서 비자라서 안 돼’ ‘메모로는 대화할 수 없어.’ 이건 너무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처사라고. 다행히 ‘투게더 함흥’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가 잘 아는 은행이 있다고 소개해줬다. 베를린에서 2시간 가까이 떨어져 있는 다른 도시에 가서야 혜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를 가질 수 있었다. 독일은 청인 역시 계좌를 여는 게 한국만큼 간편하지 않고 긴 시간이 걸리는 나라지만, 혜미는 농인이란 이유로 곱절의 고생을 더 겪어야 했다.
독일 수어를 배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언어에 비해 독일어가 어려운 만큼 독일 수어 역시 어려웠다. 또 언어가 다른 만큼 문화 차이도 컸다.
“저는 대화할 때 주로 서서 이야기하는 편인데요. 어느 날은 독일 친구와 독일 수어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저보고 자신은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왜 권위적으로 서서 이야기하느냐며 문제를 제기했어요. 전 그냥 서서 말하는 게 편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많이 놀랐죠. 독일 친구들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처음엔 적응이 안 됐어요. 한번은 다른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가 기분을 상했는지 갑자기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표현을 수어로 들은 건 처음이었어요.”
이와 함께 혜미는 유벨(jubel3 mit Gebärdensprache e.V)이라는 독일 농청년회 베를린 지부 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 웹디자이너로 10년 넘게 일했던 경력을 살려 주로 홍보물 제작과 디자인, 영상 제작과 편집 일을 맡고 있다.
혜미는 현재 독일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물론 독일 수어로 소통하다 보니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아 답답할 때도 많지만, 의사소통 과정에서 느끼는 갈증은 한국에서도 있었다. 처음 겪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혜미는 앞으로도 독일 수어를 계속 배우면서 이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한번은 독일 농인 친구에게 의사소통에 대한 답답함을 이야기했더니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어려움에 익숙해지지 말고, 계속 부딪혀보라고요. 그때 이후로 생각을 바꿨어요. 지금까지와 달리 앞으로는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고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아갈 생각이에요.”
이 말을 하면서 혜미는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의 소셜네트워크 계정에 올린 게시물을 보여줬다. 혜미는 요즘 독일 수어로 말하는 자신을 영상으로 찍어서 게시물에 올리고 있는데, 게시물마다 “혜미, 독일 수어 진짜 많이 늘었어!” “와, 너의 독일 수어 이제 최고다!” 칭찬 일색인 독일 농인 친구들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걸 보여주는 혜미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유럽에 도착한 지 3년. 그동안 혜미는 자신감 넘치는 유럽 농인 친구들에게 많은 걸 배웠다. 그들은 수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수어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다양한 미디어를 운영하고 있다. 혜미 역시 주로 하는 일이 미디어에 올리는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디자인하는 일이다 보니 이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더 쌓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대표적인 다문화 도시인 베를린의 다양한 농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계획이다. 혜미는 레즈비언, 게이, 비건(vegan), 예술, 이주민 등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농인들의 모습을 한국 농인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농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깨고 활발히 활동하는 전 세계 농인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한국 농인 친구들이 더 넓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말이다. 혜미는 “한국 농사회도 활발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유럽보다 콘텐츠 만드는 일이 아직 부족한 상태라, 어떻게 기회를 만들 수 있고 어떤 방법으로 만들면 좋을지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와 연계해 혜미는 얼마 전 자신이 직접 기획했던 영화 상영회처럼 머지않아 베를린에서 꼭 개최하고 싶은 행사가 있다. 한국과 독일 농인들이 교류할 수 있는 문화 행사다. 한국 농인들을 독일로 초대해 직접 이곳의 농인과 교류를 맺고 서로의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이 외에도 혜미는 2023년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19차 세계농아인연맹(WFD) 총회 참석을 벌써부터 준비 중이다. 4년마다 열리는 총회로 전 세계 농인들이 참석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한국 농인과 농사회에 대해 잘 알릴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특히 혜미는 한국 농인 여성과 함께 페미니즘 관련 논의를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농인 여성은 청인 사회뿐만 아니라 농사회 내에서도 농인 남성으로부터 억압을 많이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여러 페미니즘 이슈를 접하면서 그간 농인 여성으로 받는 억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지금도 공부 중이지만, 페미니즘을 통해 사고의 틀이 깨지고 그만큼 더 넓고 큰 세계를 접했어요.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한국 여성 농인들과 한국 농사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페미니즘 관련 논의를 시작할지 이미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페미니스트다. 나는 행복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일기장에 적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혜미를 만나고 오래전 일기장에 적었던 그 구절이 떠올랐다. 혜미야말로 끝없이 경계와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페미니스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독일에 와서 새삼스레 매일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시달려야 했을 때, 나는 아시아인이고 한국인이며 여성이고 독일에 사는 이주여성이라는 답을 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정체성을 가지고 독일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모두 독일에서 내게 자매가 되어 준,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 덕분이다. 브라질에서, 엘살바도르에서, 터키에서, 이라크에서, 스페인에서, 케냐에서 이 외에도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여성들과 함께 일하고 지내며 나는 페미니즘 안에서 비로소 행복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늘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곳, 작은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곳, 자매애와 연대가 무엇인지 가르쳐준 곳, 함께 손잡고 앞으로 나아갈 나의 자매들이 있는 곳, 행복하게 숨 쉴 수 있는 곳, 끝없는 가시밭길이지만 결국엔 내가 있어야 할 곳. 그곳은 한국이든 독일이든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 앎에서 비롯된 내면의 힘을 독일에 와서 비로소 얻게 됐는데, 혜미를 보면서 그녀 역시 그 힘을 지닌 여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해외 이주를 꿈꾸는 농인 여성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사실 해외 이주라고 하면 두려움이 가장 먼저 앞서죠. 저도 그랬어요. 독일에 도착하기 전에는 수어도 다르고 정보도 없으니 고생만 할 것 같고, 한국에서 지내는 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컸어요. 맞아요. 많은 게 고되고 힘들죠. 하지만 후회를 하더라도 전 도전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도전하다 보면 자연스레 용기와 자신감이 생길 테니까요. 저는 오늘도 한국 농인 여성으로 독일에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두 팔을 들고 손을 반짝반짝 흔드는 것이, 수어로는 손뼉을 마주쳐 소리를 내는 박수를 뜻한다. 참 아름다운 몸짓이다. 해외 이주를 꿈꾸는 한국 농인 여성에게 전하는 혜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새로운 세계를 계속 일궈나갈 혜미를 뜨겁게 응원하고 싶다. 혜미에게 그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보낸다.
[장애 여성을 돕는 독일의 여러 단체와 프로젝트]
독일에서는 일반평등대우법(AGG·Das Allgemeine Gleichbehandlungsgesetz)에 따라 인종 또는 민족, 성별, 종교 또는 신념, 장애, 나이, 성적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장애인평등법(BGG), 사회법전(SGB IX), 유엔 장애인권리협약(UN-BRK) 등에서도 장애 여성을 위한 다양한 규정들이 마련되어 있다.
이와 함께 독일에는 장애 여성을 지원하는 여러 단체와 프로젝트가 있다. 여러 단체가 제공하는 자료를 보면, 장애를 가진 여성과 소녀는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필요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도움을 받는 ‘차별’을 겪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조치를 취하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이 독일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독일 연방 여성 상담센터 및 여성 응급핫라인 협회’는 <안전과 자기결정권: 장애 여성과 소녀 강화 프로젝트>를 통해 자기방어 기술 수업, 변호사 상담, 자조 단체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독일 여성의집 협회’는 폭력피해 여성과 그 자녀를 돕고 있다. 협회에서는 여성보호소 정보, 상담센터 이용방법, 알아두어야 하는 법률 정보 등을 쉬운 언어로 알려주고 있다.
장애 여성 및 소녀를 위한 전국 네트워크인 바이버네트워크(Weibernetz e.V.)는 1988년 장애나 만성질환이 있는 여성과 소녀의 생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설립됐다. 여러 콘퍼런스와 재교육 과정 운영을 통해 장애 여성이 필요한 정보를 얻고 네트워크를 맺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바이버네트워크는 장애 여성이 중요한 법률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 비슷한 기관으로는 베를린 시의회가 후원하는 ’장애여성 베를린 네트워크‘가 있으며 이곳에서는 건강, 일자리, 재활, 폭력피해 지원 등 다양한 주제로 장애 여성을 지원한다.
폭력피해에 관한 지원 기관도 따로 운영되고 있다. 빌레펠트 대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여성과 소녀는 더 많은 신체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지적 장애가 있는 여성과 기숙사 등 시설에서 거주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여성긴급전화(08000-11-60-16)가 24시간 운영되고 있으며, 농인을 위해 수화로 된 정보를 따로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일터 및 주거시설과 관련된 여성 담당관을 배치해 여러 교육과정을 열고 있다. 독일 중북부에 위치한 빌레펠트에서는 장애 여성과 소녀들이 ‘소녀의집’에서 다양한 훈련과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같은 주에 위치한 도르트문트에서는 여성상담센터에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돕고 있다.
※ 필자 소개: 채혜원. 독일 베를린 거주. 한국에서 여성매체 취재기자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 국제 이주·난민 페미니스트 그룹 <International Women Space> 멤버로 활동 중이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유럽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chaelee.p@gmail.com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관련기사목록
|
국경너머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