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라 불린 여자들, ‘아버지의 질서’를 흔들다

[페미니스트의 책장] 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

은진(호네시) | 기사입력 2020/03/22 [18:12]

괴물이라 불린 여자들, ‘아버지의 질서’를 흔들다

[페미니스트의 책장] 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

은진(호네시) | 입력 : 2020/03/22 [18:12]

우리는 수많은 ‘괴물같은 여자’에 관해 알고 있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등장했던 수많은 방식의 ‘민폐녀’에서부터, 유명인을 모함해서 이득을 취했다고 여겨지는 꽃뱀들, 어떤 종류의 범죄자들, 총체적으로 ‘인간 이하’,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시민 이하’로 취급되는 여자들이다.

 

한 여자가 괴물이 될 때, 그가 ‘여자’라는 사실은 그 사건을 둘러싼 여러 정황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 이러한 질문은 ‘○○녀’라는 확고한 명명이 거의 일상어처럼 정착되어버린 현실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녀(女)’는 단지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 지칭어에 불과하다고, ‘남(男)’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호명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 질문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녀’라는 말은 분명히 전형적인 ‘여성성’의 개념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단어가 말하고자 하는 ‘여성성’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괴물이라 불렸던 여성들은 기존의 ‘여성’에 대한 통념을 이미 위반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괴물성을 구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진짜 여자가 아니었지만 동시에 여자의 본질이었다. 그렇다면 여성성은 구제되어야 하는 것일까, 혹은 퇴출되어야 하는 것일까. 최소한 둘 중 무엇으로 여겨지고 있던 걸까.

 

대답하기 어려운 이 곤란한 질문은 ‘여성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미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는 대신, 공중(公衆)의 협상과 기획과 타협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보여준다. 기묘하게도 여성성에 대한 논란은 그가 여자라고 정의된 그 순간, ‘녀’라는 분명한 지시어가 부여된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호주 맬버른대학교 영화학 교수 바바라 크리드의 1993년 저작 『여성괴물: 영화, 페미니즘, 정신분석학』(The Monstrous-Feminine: Film, Feminism, Psychoanalysis)은 공포영화를 여성주의적 정신분석학의 틀로 조명하여 가부장제 문화를 분석한다.


어떤 위반과 어떤 억압의 사이, 그 논란과 혼란의 중심에서 ‘여성성’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진다. 바바라 크리드(Barbara Creed)의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손희정 역, 여이연)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공포영화라는 영역에 내재한 여성성의 문제를 논의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책이다.

 

여성이 괴물이 될 때, 거기에는 ‘여성성’을 둘러싼 어떤 의도와 기획이 담겼을 뿐만 아니라, 조정하고 길들여야만 하는 공포와 매혹도 함께 존재한다. 여성-괴물이라는 결합된 두 단어 사이에는 아주 깊고도 역동적인 가부장제 사회의 무의식이 가로놓여있다. 크리드는 바로 그 얇은 틈 속 어둠에 시선을 두고, 그 안에서 ‘여성성’의 복잡한 일면들을 건져 올린다.

 

악령 들린 괴물, 기괴한 자궁, 뱀파이어, 마녀, 이빨 달린 질, 그리고 거세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성괴물들은 스크린에 등장해 왔다. 그 이미지들을 되돌아보며 크리드는 ‘여성은 이미 거세당한 존재이기 때문에 두렵다’는 프로이트의 오래된 선언을 향해 되묻는다. 여성은 ‘거세-당했기’ 때문에 두려운가? 아니면 ‘거세-하기’ 때문에 두려운가?

 

크리드의 논거 속에 등장하는 ‘거세하는 여성’ 가설은 크게 두 가지 모습이다. 하나는 ‘태초의 어머니’이고, 하나는 ‘이빨 달린 질’(바기나 덴타타, Vagina Dentata)이다. 태초의 어머니는 우리를 자궁 안으로 끌어들이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사고와 존재를 막고, 완전한 자아 절멸의 상태로 이끈다. 이빨 달린 질은 좀 더 직접적으로, 합일의 순간에 남성성의 상징인 ‘남근’을 말 그대로 씹어 삼킨다.

 

▲ 자신의 질에 이빨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티스>(Teeth, 밋첼 릭텐스타인 감독)는 거세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바기나 덴타타’(거세하는 질)에 대한 오래된 신화를 재창조한다. 2007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작.


크리드가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해가면서 낱낱이 다시 읽어보는 프로이트의 유명한 ‘꼬마 한스’ 사례는 그 상상을 좀 더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프로이트의 이론 안에서 주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이 소년은, 프로이트의 설명 속에서는 어머니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버지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한없이 좌절되어 온 어린 오이디푸스였다.

 

그러나 크리드의 재독해 속에서, 사실 소년이 정말 두려워했던 존재는 그의 어머니인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그를 처벌하고, 거세하고, 수태시키는 존재이며 다리 사이에 탈부착 가능하고, 크고, 이빨이 달린 남근을 지닌 존재이다.

 

소년과 어머니 사이의 복잡한 역학관계는 ‘아버지를 향한 공포’를 그저 프로이트의 기대와 예언에 불과한 것쯤으로 격하시킨다. 소년의 공포와 매혹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남성’과 ‘남성의 결여’로 이루어진 강력한 성별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성별을 그런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기 위한 아주 치열하고 반복적인 노력들과, 그 노력들 바깥에 존재하는 성별에 관한 역동적인 무의식이다.

 

마치 꼬마 한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부장제가 생각하는 여성이 ‘접었다 폈다’할 수 있고 ‘이빨’이 있고 다른 누군가의 남근을 ‘씹어 삼킬 수 있는’ 성기를 속옷 속에 숨기고 있는 존재라면, 그래서 가부장제가 그 속옷 아래의 미지를 영영 두려워해야 한다면, 우리가 자명한 질서이자 제도라고 생각해왔던 것은 실은 아주 위태로운 것일 수 있다.

 

▲ 1970년대 대표적인 공포영화 <캐리>(Carrie,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1976)는 사춘기 여성의 월경과 섹슈얼리티를 둘러싸고 가부장제 질서가 보이는 통제와 두려움, 처벌 등이 키워드이다. 2013년에 킴벌리 피어스 감독이 리메이크작(오른쪽)을 만들기도 했다.


공포영화에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자명해 보이는 질서가 이토록 위태롭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공포영화가 우리를 끌어당기고 매혹하는 지점도 바로 우리 개개인의 힘으로는 절대 뒤집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의 강고한 질서가, 실은 그렇게 위태로운 것에 불과하다는 진실이다. 여성-괴물들은 그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서, 숨겨진 불안과 공포를 온몸으로 체현하며 ‘아버지의 질서’를 심문한다.

 

그래서 나를 거세시키고 나의 자아를 절멸시키는 그 ‘여성’들은 두렵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분명한 페미니즘 명제가 가장 어렵고 복잡한 진실이 되어가는 최근의 현실에서, 크리드의 문제의식은 단지 공포영화 속 고질적인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성성의 형성’을 겨냥한 그의 논의는 ‘여성은 대체 무엇이냐’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여기로, 새로운 방식으로 끌어당긴다.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회원들의 글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은진(호네시)님은 “글 쓰는 대학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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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코 2020/03/23 [22:50] 수정 | 삭제
  • 여성괴물에 대한 해석이 마음에 드네요 예전에 국내서적으로 나왔던 페미니즘 영화 여성인가 하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주로 해외 논의들을 다뤘지만 그 내용보다 훨씬 공감이 갑니다. 페미니즘 영화이론도 재밌게 읽었어요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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