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92) 할머니가 정의기억연대(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하 정의연)를 비판하며 더이상 수요집회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특히 정의연의 기금 운용에 문제를 제기하여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번 문제 제기는 피해당사자가 30여 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함께해 온 단체를 비판한 것이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에 정의연은 할머니에게 송금한 ‘영수증’을 제시했고, 윤미향 전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2015년 한일합의에 관해 “할머니의 기억이 달라져 있음을 알았다”(5월 8일)라는 글을 올렸다. 또 일각에서는 윤미향 전 대표가 국회의원이 된 것과 관련하여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1400여 회를 훌쩍 넘긴 일본대사관 앞 정기 수요시위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이는 정의연 활동가들과 시민의 참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내용에 대응하며 나온 이야기들은 생각해볼 지점이 많다. 돌이켜 보면 ‘영수증’과 ‘기억 왜곡’, 그리고 ‘배후설’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이나 보수우익이 피해자를 공격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폄훼하던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간 피해당사자의 증언이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할머니의 ‘기억’에 의문을 제기하는 윤 전 대표의 대응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논리에 걸려들기 쉽다. 아니나 다를까, 평화의 소녀상과 소녀상을 아끼는 시민들의 행위를 조롱한 바 있는 윤서인은 “왜곡”이라는 제목의 4컷만화를 게재하며 이를 비꼬았다. ([윤서인의 미펜툰]왜곡, 미디어펜 5월 9일자) 웹툰은 윤미향 전 대표가 피해생존자에게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들과 동일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정의연의 위기에 달라붙는 맹렬하고도 저급한 정치적 프레임을 걷어내고,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지향했던 가치를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증언’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비추어 앞으로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과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증언은 당사자에게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증언에 대해서는 유독 ‘왜곡’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현실정치와의 관계나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작동하고 있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증언을 ‘변치 않는 하나의 진리’라고 여기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1991년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정부에 대항하여 ‘살아있는 증거’로 나타났다. 위안소에 관한 학술적 연구가 미미했던 운동 초기, 피해생존자의 증언은 그 자체로 강력한 증거였다. 또,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법적 투쟁을 함께 전개했기 때문에 증언은 법정 진술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기도 했다.
증언을 ‘증거’로 인식하는 경향은 운동 초기 증언집에서도 드러난다. 1993년 정대협이 펴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한울)의 해설에서 정진성은 “군위안부 문제의 주안점을 우선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하고 우선적인 과제는 피해자들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기획 의도에 따라 수록된 증언들은 징모 과정, 위안소 시스템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재구성되었다. 대개 “나는 ~했다”라는 형식의 문어체로 통일되어 있고, 연대기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증언집 1권에 수록되어 있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예로 들어 보면, ‘길림에서 태어나→기생집 수양딸로 보내져→일본군에 빼앗긴 처녀→지긋지긋한 위안부 생활→은전장수와의 탈출→반겨주는 이 없는 고국으로→박복한 팔자로 일관되는 평생’의 시간적 순서로 배열되어 있고, 다른 증언들도 유사한 구조를 따르고 있다. 물론 증언집이 증거나 사료로서만 기획되지는 않았으나, 당대 운동의 주된 방향과 인식을 공유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학계와 시민운동의 협력이 지속되면서 증언에 대한 시각도 진일보한다. 2000년 이후에 이르면, “인터뷰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 즉, “증언집은 조사자와 피해자의 상호 대화와 소통의 산물”(한국정신대문제대채협의회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4-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풀빛, 2001)임을 분명히 한다.
2000년 이후의 증언집에서 증언자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따옴표로 시작하는 증언자의 발화는 구어체 그대로 기록된다. 가족이 들을까 봐 걱정하고, 자식이 없어 외로워하는 일상적인 말에서 전쟁범죄의 피해가 위안소 생활 당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위안소 생활을 떠올리기 싫어한다거나, 말문이 막히는 순간, 그로 인한 갑작스런 침묵, 망설임 등의 비언어적 표현 또한 ‘침묵의 말하기’로 인식된다. 위안소에서 겪은 피해가 모두 언어로 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침묵 또한 증언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피해 경험은 증언자의 현재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증언자는 현재의 지평에서 과거와 만나면서 언어적·비언어적 표현을 통해서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증언집의 따옴표가 증언자의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편집팀은 증언자의 말을 그대로 싣는 이유를 “증언자가 자신의 말을 통해 스스로를 재현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따옴표 안의 증언자의 말은 스스로를 재현한 것이자, 동시에 편집자, 면접자의 선택을 거쳐 편집된 목소리인 것이다.
증언은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사이의 공동작업(collaboration)이며, 경청하는 연구자는 청자이자 동시에 화자의 입장에서 경계 넘나들기(cross-bordering)를 통해 경계의 주체성을 구성한다.(김성례, 「구술사와 여성주의 방법론」, <한국문화연구의 방법론 모색: 구술사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회 제6차 워크샵 자료집(미간행); 이선형,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방법론적 고찰」에서 재인용,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요컨대 증언은 증언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생산된다.
“사실, 녹취 풀기 작업은 단순히 면접자가 기억을 충실히 재생하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컨대 왜 그때 증인이 침묵했었을까에 대한 면접자의 ‘이해’가 요청되는 차원의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이미 증인과 면접자의 상호 주관성이 만들어지고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섬세하고도, 정치적으로 깨어 있는 구술의 문자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더 개척해야 할 기술적, 학문적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증인을 만난 우리도 점차 ‘증인’이 되어갔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이 증언집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4권, 2011.
증언의 배후? ‘배후’ 없는 증언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의도와는 다르게 ‘배후설’이나 ‘왜곡설’에 봉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증언이 ‘배후’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증언이 ‘공동작업’이라는 것은 증언과 관련된 모든 조건과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관계로부터 생산된다는 뜻이지, 증언자의 주체성을 삭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번에도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 제기가 있자 일각에선 ‘배후설’을 제기했는데, 이는 이용수 할머니를 낮잡아 보는 시각이다.
다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체(sub-ject)’라는 말 자체가 ‘아래에(sub-) 놓여져 있는(icere)’이라는 어원에서 비롯되었듯 모든 제반 상황과 관계없이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증언이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증언은 그것을 둘러싼 것들과 관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배후(背後)’라는 음흉한 단어를 재전유하여 증언자의 편에 세울 수는 없을까?
윤정옥 교수는 1988년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오키나와, 핫야이 등을 방문했고, 이 답사는 1990년 『한겨레』 신문에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1월 4일~24일)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어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공론화했다. 같은 해 11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결성하였고, 이듬해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언할 수 있었다.(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사에 관해서는 윤미향의 『25년간의 수요일』(사이행성, 2016) 및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 참조)
증언이 있기까지 당사자가 아니었던 이들, 청자를 자처했던 이들, 전쟁범죄에 반대했던 이들의 노력이 바로 김학순 할머니 증언의 ‘배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증언의 배후가 있느냐’라고 묻는 대신 ‘어떠한 배후가 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영상: https://bit.ly/2T2iDFY
증언을 증언하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권의 개정판 서문에서 양현아는 증언을 실증주의 자료로 위치 짓는 태도와 구별함과 동시에 모든 진실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상대주의적 진실관과도 거리를 두고자 했다고 밝힌다. “증언 연구가 찾고자 한 진실은 축적된 집합적 진실의 지평 속에 살아가는 사회인들과 교감하는 상호 주관적 진실”이며, “증언은 알려진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사실의 생산과 수용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진실을 찾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소위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는 지금 ‘집합적 진실’과 ‘상호 주관적 진실’에 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증언을 육성(肉聲)에 한정하는 방식으로는 진실성을 보증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연구자와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증언이 면담자와 피면담자 사이의 공동 작업이라는 시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막상 논란이 생길 때면 증언의 원본성을 강조하면서 진실성을 확보하는 대응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피해생존자에게 과도한 상징성을 부여함으로써 운동의 폭을 제한하기도 한다. 부지불식간에 ‘위안부’ 운동이 피해생존자의 문제로 한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위안부’ 운동이 고립될 수 있으며, 더불어 ‘증언자 이후’의 ‘위안부’ 운동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양현아의 지적처럼, 증언이 현재적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진실을 찾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진실은 과거의 경험을 다시 해석하고 새롭게 재현하면서 얻어질 수도 있고, 이미 기록된 증언에서 ‘들리지 않았던’ 이야기를 발견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생존자 할머니들의 증언에는 어린 나이에 애보개나 식모로 가족의 울타리 바깥으로 밀려났던 일이나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소개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증언은 우리 사회에 뒤늦게 ‘들리게’ 되면서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김학순 할머니가 등장하기 이전 ‘위안부’의 증언은 왜 ‘증언’이 아니라 ‘고백’으로 인식되고 소비되었는지 질문할 수도 있겠다. 이때, 성폭력 범죄를 외설적으로 소비하는 재현은 아직도 자행되고 있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질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연결되고, 역사에서 잊힌 ‘증언을 증언함’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지금 여기의 문제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증언을 증언한다는 것은 내가 어떠한 증언의 배후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고, 스스로 ‘증언자’가 되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문제로 가져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운동 초기 증언의 ‘배후’가 된다는 것이 증언의 자리를 마련하고 증언자의 목소리를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위안부’ 문제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시 성폭력 혹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착취 문제 속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일 테다.
정의연이 베트남전쟁 피해자를 돕고, 김복동 할머니가 전 세계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재산을 남긴 것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구성원들이 또 다른 전쟁피해자나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의 ‘배후’가 된다는 뜻이고, 그들의 ‘증언을 증언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증언의 대상이 군사화된 일상과 젠더 폭력 전반으로 확장되고, 모두가 증언자가 될 수 있을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피해생존자와 정의연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
우리는 그동안 정의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정의연 활동가들과 할머니의 관계에 대해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나, 많은 사람들은 정의연이 할머니의 뜻을 ‘받들거나’ 혹은 ‘대변’하는 단체라 여기고, 그것이 ‘옳은’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인식의 이면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피해자 당사자만의 문제라는 생각이 묻어난다. 문제의 ‘당사자’가 피해생존자 할머니로 한정되기 때문에 할머니의 뜻이 곧 운동의 방향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엔 전형적으로 상상되는 ‘위안부 피해자 상’ 또한 작동하고 있다. 정의연이 할머니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여긴다는 것은 피해자의 뜻이 하나로 모아지고 대표될 수 있다는 전제가 선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전제는 운동의 활기를 빼앗아 갈 뿐 아니라, 피해생존자에게도 억압적으로 작용한다. ‘위안부’ 생존자는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욕망을 지닌 시민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 ‘위안부’ 생존자의 정체성은 사람들이 쉽게 상상하는 ‘전형적인 피해자상’과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우에 따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할 수도 있으며, 운동에 참가한다고 하더라도 활동가 단체와 뜻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정의연의 운용이 합법적이고 합리적이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시간을 갖고 검증하면 될 것이다. 시민단체의 건강함은 시민들의 관심에서 비롯될 수 있다. 현실정치와 연동되어 양산되는 흠집잡기 식의 문제 제기를 지양하고, 기금 사용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 생활 지원에 기금의 대부분이 쓰이지 않은 것에 화를 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전 세계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시 성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면, 할머니들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선에서 연대 사업에 기금을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활동가와 당사자, 그리고 시민사회에 충분히 공유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기금이 할머니의 생활 지원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데에 즉각적인 공분이 일어났다면, 그동안 기금 마련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채 정의연과 할머니를 동일시하며 모금이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기금이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지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착취 시스템을 끊어내는 것에 있다는 점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금에 참여하는 일이 피해생존자에 대한 지원일 뿐 아니라,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행위라는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번 위기의 본질은 문제 제기자가 피해당사자여서도 아니고, 문제 제기에 얽힌 정치역학이나 ‘배후’ 때문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피해당사자와 활동가의 의견은 충돌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시민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며 ‘모두의’ 운동으로 개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당사자’에게만 귀속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세계를 위한 것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줄 주체는 정의연만이 아니라 군사주의와 젠더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 모두이다.
※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 이지은 님은 일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 탈북 여성 등 국가 경계 여성 서사에 대해 연구하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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