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가는 열린 공동체

[페미니스트의 책장] 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설목 | 기사입력 2020/06/11 [19:48]

‘믿는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가는 열린 공동체

[페미니스트의 책장] 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설목 | 입력 : 2020/06/11 [19:48]

페미니스트에게 기독교는 불편한 존재다. “낙태죄 폐지”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유명 교회들, 퀴어퍼레이드의 앞을 가로막으며 “사랑”을 노래하는 세력, 교인들의 생애 전반에 대한 가부장제-이성애 중심적 개입. 그래서 페미니즘 행사에서 종교와 관련한 주제가 화두에 오르면 ‘탈기독교’ ‘탈교회’ 이야기를 으레 듣곤 했다.

 

페미니스트들이 꺼내놓은 다양한 담론과 경험담 안에서 교회는 언제나 걸림돌이자, 뛰어넘어야 할 크고 두꺼운 벽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는 신앙을 버렸다. 또 누군가는 의식적으로 잊어버리고 산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혼자만의 예배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누군가는 교회에 가는 것을 아예 포기하진 못했고 헌금을 적게 내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평등과 사랑을 말하는 일, 즉 ‘예수 정신’이 곧 페미니즘이라고 믿으면서도, 성경 속 여성혐오와 가부장적 기독교 문화 그리고 종교공동체의 벽에 부딪혀 많은 ‘믿는 페미니스트’들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 도망친 페미니스트들은 다시 평등을 말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방황하기도 하고,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자신만의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투쟁을 이어가면서, 신앙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은 평등과 사랑을 말하는 일을 성경을 통해 풀어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백소영 지음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젊은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을 위한 길라잡이) 뉴스앤조이, 2018

 

백소영이 쓴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젊은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을 위한 길라잡이, 뉴스앤조이, 2018)에 나오는 내용은 이런 노력의 산실이다. 성경과 기독교에 켜켜이 쌓인 여성혐오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털어 엎어버리고, 깨끗이 복원하고자 한 여러 여성주의 신도들의 이야기는 성경을 다시 읽고자 하는 페미니스트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아주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한 화자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는 청중이 되어, 나보다 앞서 고민한 이들의 고찰을 들여다본다.

 

메리 데일리부터 엘리자베스 피오렌자까지

 

제도로서의 종교를 넘어서고자 한 메리 데일리(Mary Daly, 미국의 신학자. 1973년에 급진적 페미니즘 철학의 고전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를 썼다)의 탈성경/탈기독교 페미니즘은 하나님 신성을 남성중심적 유산이 아닌 여성들의 언어에서 재발견한다. 존재를 발견하고, 여성적 신성으로 드러내는 작은 동사들의 과정을 통해 큰 동사인 신성, 하나님에게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남성문화는 배격한다. 데일리는 가부장적 기독교를 넘어선 여성들만의 시간/공간에서 새로운 공동체 신앙고백을 제안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여신’으로, 남성 이미지로 상징화되고 예배된 명칭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성의 테두리를 확장한다.

 

다시 보기를 주장하는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 유니온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미국의 성서신학자로 여성신학과 문학비평을 결합하여 구약을 다시 읽는 독특한 ‘수사비평’으로 유명하다)은 ‘여성신학적으로 성경을 재조명’한다.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여성의 것이 아니었던 성경을 여성의 시각으로 읽어 여성의 것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창세기의 ‘도움’과 아담의 존재, 뱀이 여성에게 말한 이유 등을 재해석하며,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재해석할 수 없는 성경의 본문을 성경 저자들의 수사학적 의도에 집중해 풀어낸다.

 

▲ 여성신학자 필리스 트리블, 다이안 립셋이 편집한 책 『Faith and Feminism: Ecumenical Essays』 표지 이미지 중에서, 2014

 

‘재해석 이상의 해석학’을 주장하는 엘리자베스 피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루마니아 출신으로 하버드 신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3년에 출간한 『그녀를 기억하며: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여성신학적 재건』을 통해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재건하고자 했다)는 성경을 ‘신화적 원형’이 아닌 ‘역사적 모형’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문화권 속 의미를 고려해 현재에 적용 가능한지를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읽어내 그 의미를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의미를 당대의 노예제도 하에서 인격적 관계성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며, 하나님만을 아버지라 칭하고 다른 ‘아버지’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들에게 부여된 가부장적 권력과 존경을 거부해 평등한 자녀인 인간들로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 탈식민의 시각으로 성경의 억압적 본문과 해방적 본문에 드러난 주변부의 존재들이 겪는 경험을 읽어낼 수도 있고, 살리고/지키며/보호하는 본문을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해방적’ 읽기의 방법론은 문자적 성경을 넘어선 살아있는 성경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다시 읽어낸 성경(聖經)은 새롭게 다가온다. 혐오 이외의 의미를 찾을 수 없던 ‘경줄’을 집어내 가부장제-남성중심적 ‘위줄’을 들어내고, 행간의 의미를 채워 넣는 과정은 페미니즘이 가질 수 있는 해방적 상상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러 사회문화적 맥락과 구조상의 억압 속에서, 정상성의 규범 아래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의 이야기를 찾아 서발턴(하위 주체)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간다.

 

가장 낮은 곳의 이야기는 가장 면밀하고 정확하게 구조의 약점을 고발한다. 다양한 갈래의 페미니즘 운동과 담론에서 많은 대안이 제시된 근간에는 언제나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에 대한 의지’가 존재했듯, 여성혐오로 읽혀온 성경 역시 주변부로 밀려난 낮은 곳의 목소리를 통해 평등을 향하는 해방적 기치를 세우는 신앙의 근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문자 속에서 영성을 다시 살려내, 현재로 감각하게 하는 실천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들의 신앙이란, 그 어떤 문자적 교리보다 개혁적인 실천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페미니스트이기에 교회의 중심에서 멀어진, 그렇기에 오히려 더 교회의 폐단에 대해 잘 말할 수 있는 주변부가 된 모든 이들의 실천에 한 움큼의 마음과 기도를 보내고자 한다. 교회 밖으로 도망친, 교회 안에서 싸우는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자유롭게 말하고 투쟁하는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본래의 교회 공동체, 가부장적-이성애중심적-남성중심적인 공동체가 아닌, 새로운 공동체에서 종교가 지녀온 공동체적 가치를 다시금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주변도 중심도 없이 평등한 관계를 고민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예수 정신에 가까울 것이라 믿으며. 실제로 그런 실천들을 이어가는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가, 기록들이 이어지고 있으니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또 믿어본다.

 

나는 작년, 슬슬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던 즈음에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였다. ‘페미니즘 토론회를 여는 교회가 있어’, 지인의 말 한마디에 홀린 듯 무려 한 시간 반(편도)의 시간을 들여 도착한 그곳에서 생각지 못한 환대를 경험했고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나이와 성별의 위계에서 벗어나 친구가 될 수 있는 열린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들과 아주 운 좋게 만나 매달 페미니즘 토론을 이어오고 있다. 그곳에서 나와 다른 입장, 다른 경험을 듣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들을 접한다.

 

▲ 필자가 다니는 어느 작은 교회의 페미니즘 토론 모임 ‘백합과 장미’에서 영화 토론을 진행 중인 모습.  ©설목


물론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페미니즘적 방향성과 관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이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의견이 오간다.(많이 싸운다.) 그러나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는 토양과, 어떤 의견이라도 귀를 기울이는 친구들의 존재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위안이 된다. 이런 위안을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가 아닌 어떤 곳이라도 좋으니.

 

‘믿는 페미니스트’들은 분쟁하며 변화를 만든다

 

20대 여성 청년, 후기-근대의 주체적 개인이자 신자유주의자로 살아오던 내가 페미니즘과 기독교를 만나 공동체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리라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접하며 그동안의 차별적 바탕 위에 세워진 구조와 지식, 담론 들을 다른 시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고,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 위계 없는 평등함과 나눔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나를 위해 따로 음식을 준비해주는 친구, 형편이 어려울 때 언제든지 자고 가라며 열어둔 문. 교회에서 경험한 환대는 한편으로 페미니스트 공동체에서의 환대와 안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같은 ‘페미니스트’이기에 믿을 수 있다는 안전의 감각이 완전하지 않음을 느꼈을 때, 나는 환대와 연결, 느슨한 연대의 가치를 교회 공동체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믿는 페미니스트’인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바라는 ‘열린 공동체’의 모습은 기독교 신자로서 바라는 ‘열린 공동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열고닫음이 어떤 방식으로 성립되고, 그게 어떻게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고, 그 간극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규명하는 작업 또한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열린 공동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여러 속성과 위치, 입장과 관점을 떠나 한 명의 온전한 개인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개인에게 환대의 감각을 안겨준다. 그런 환대가 가능한 공동체를 ‘열린 공동체’라고 부르고 만들어 가고 싶다. 주변부에서 시작해, 중심을 없애는 실천은 분명히 해방적인 실천일 것이다.

 

(눅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주변부부터 시작하는 모든 행동은 언제나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싸움이고, 투쟁이었다. 억압의 피해는 투쟁을 통해서만 증명되어왔다. 온전한 환대가 우리 공동체에서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쟁이 필요할 것이다. 늘 그래왔듯 지리멸렬하고, 느리고, 답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분쟁이 무언가를 바꾸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중심부만의 화평이 아닌 판 전체를 흔드는 분쟁을 바란다. 이러한 실천이 페미니즘적인 실천이자 곧 예수 정신의 실천이라 믿으면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면서도 잘 싸워낸 사람들이 바꿔낸 것들을 기억하면서.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의 마지막 장, ‘열린 과제, 21세기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에서 저자는 청중을 ‘살리는’ 페미니즘에 초청한다. 어떤 방식의 살림이 가능한지에 대한 답변은 각자가 다 다를 것이다. 필요한/지향하는 패러다임 또한 다를 것이다. 나는 이 초청장을 고이 접어 가방에 넣고 어떤 방식의 살림이 가능한지 고민해볼 작정이다. ‘열린 공동체’가 각기 다른 이유로 중심부에서 밀려난 주변부의 존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중심은 어떻게 흔들 수 있을지, 살림이란 무엇인지, 이런 공동체를 페미니스트이자 기독교 신자로서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

 

고민은 물론, 혼자서 하고 있진 않을 예정이다. 친구들과 싸우고, 또 많은 것들과 싸우면서 대답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설목 님은 유니브페미 활동가이자 “분쟁하러 온 ‘믿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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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미 2020/06/12 [17:16] 수정 | 삭제
  • 교회 안에 무슨 평등이 있어?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죠. 평등은 만들어가는 거라는 걸 알게되기 전까지는요. 가난한 자와 여자와 병든 자를 차별하지 않았던 예수 정신을 생각한다면 평등한 영적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신도로서 당연한 일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필자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분쟁하는 일이고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요. 모든 믿는페미들을 응원합니다!
  • drummer 2020/06/11 [22:34] 수정 | 삭제
  • 메리 데일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를 읽고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던 때가 벌써 오래 전의 일이구나... 반가운 책이 나왔네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여성신학 연구도, 크리스천 여성들도, 평등 공동체를 고민하는 교회들도 전보다 많이 생겨났겠구나 생각하니 힘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