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져 마땅한 세상을 다시 쓰는 법

[페미니스트의 책장] N. 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

설목 | 기사입력 2020/07/16 [11:42]

부서져 마땅한 세상을 다시 쓰는 법

[페미니스트의 책장] N. 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

설목 | 입력 : 2020/07/16 [11:42]

‘이 점을 명심하라. 한 이야기의 끝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모든 일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사람은 죽는다. 옛 질서는 무너진다.

 새 사회가 탄생한다. “세상이 끝났다”라는 말은 대개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행성은 변함없이 존재하기에.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완전히.’

 

여기 ‘네’가 있다. 너는 한 세상의 종말을 마주한다. ‘고요’라는 이름을 가진, 소란스럽고 흔들림이 끊이지 않는 대륙을 본다. 이 종말의 시작에 있는 어느 죽음을 본다. 사실 어느 죽음은 하나가 아니다.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이 세상이고, 곧 너 개인이다. 읽는 ‘나’는 ‘너’로 불리며, 속절없이 세상에 빨려든다.

 

▲ N. 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The Fifth Season, 박슬라 옮김, 황금가지, 2019) 

 

너의 세상은 이미 몇 번이고 끝장났다

 

이야기는 에쑨의 개인적 종말에서부터 시작된다. 너는 에쑨이다. 에쑨은 조산력(열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 기타 지진 활동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에너지를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오로진’이라는 인종으로, 그 능력을 숨기며 ‘향’(comm)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중년의 여성이다.

 

제국의 관리를 받으며 통제되는 오로진만이 합법적으로 조산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당대, 오로진은 ‘로가’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혐오의 대상이다. 이들은 특수 교육기관이 아닌 향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너는 너 자신과 네가 물려준 자식의 조산력을 숨기고, 조심하며, 향의 일원으로 그저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너의 남편이 너의 자식을 때려죽이기 전까지.

 

다음 너는 다마야가 된다. 작은 향, 그다지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가족에게 조산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들켜버린 오로진. 어린 다마야, 너는 돌아보지 않는 가족과 향민들을 떠나 제국의 오로진 특수 교육기관 펄크럼으로 향하게 된다. ‘오로진을 관리하는 수호자’라고 자신을 지칭하며 너를 인도하러 온 이는 너에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겠느냐 질문하며 네 손가락을 부러뜨린다.

 

그는 너에게서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네 온몸의 뼈를 낱낱이 부러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너는 그 순간 깨닫는다. 그가 필요로 하는 순간,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폭력을 행할 것이다. 너의 행동과 말에 상관없이 너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시에나이트가 된다. 펄크럼 교육기관의 우수한 인재이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펄크럼 오로진인 시에나이트, 너는 제국 오로진을 의미하는 검은 제복을 입고 조산력 통제 능력을 증명하는 네 개의 반지를 언제나 손에 끼고 있다. 너는 조언자를 배정받는다. 뛰어난 조산력과 통제 능력을 지닌 조언자를 만나, 제국의 안녕과 대지의 안정을 위한 후대의 오로진을 출산해야 한다.

 

너는 펄크럼 오로진이 되며 향에서의 쓰임새신분을 잃었지만, 번식사(일곱 가지 기본 쓰임새신분 중 하나. 선택적 교배를 통해 우수한 혈통을 유지하고 자신이 소속된 향이나 민족을 발전 또는 개량하는 일을 한다)의 일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 너는 이름조차 모르는 너의 조언자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에쑨, 다마야, 시에나이트. 세 명의 너는 인종화의 경험을 겪는 여성의 삶을 살아간다. 하늘 위로 거대한 보석이 흐르고, 대지가 용솟음치며 사람들이 땅의 움직임 소리를 듣는 이 대륙에서, 너의 어떤 생각과 가치관 방향성, 타고난 이름은 의미를 잃는다. 너는 오로지 ‘오로진’, 즉 ‘로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대지가 울고 하늘이 잿빛으로 변해 폐색되어 해가 보이지 않는 다섯 번째 계절이 몇 년 몇 십 년을 반복해 찾아오는 이 세상에서, 그런 계절을 버텨내고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의 존재를 혐오하며 때려죽이는 이 세상에서, 하늘이 모래와 먼지로 뒤덮이거나 말거나 사실 너의 세상은 이미 몇 번이고 끝장이 났다. 

 

▲ 『다섯 번째 계절』(The Fifth Season, 박슬라 옮김, 황금가지, 2019) 작가 N. K. 제미신 소개

 

종말에 대한 역설

 

세상이 끝났다는 말은 대개 거짓말이지만, 어떤 세상은 정말로 끝난다. 아들을 잃기 전의 에쑨과 손가락이 부러지기 전의 다마야, 검은 제복을 입기 전의 시에나이트의 세상은 아들을 잃고 손가락이 부러지고 검은 제복을 입으며 끝장이 나고 또 새로 이어진다.

 

때때로 경험은 그 경험 이전의 세상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차별, 혐오, 폭력, 억압의 경험은 그 자체로 존엄한 개인을 구조의 일부로 물화(物化)시킨다. 그렇게 존재해서는 안 된다, 혹은 그렇게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회의 전언은 개인을 철저히 도구로 환원한다. 그렇게 부여받은 쓰임새신분 어디에도 존중은 없다.

 

나는 다시 네가 되어 생각한다. 이런 세상이라면 응당 부서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종말을 선고한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완전히.’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세상을 완전히 끝내버릴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차별과 혐오, 억압과 착취. 오로진을 향한 멸시의 시선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접해온 세상과 다르지 않다. 이야기의 끝이 종말일 수밖에 없는 세상이란 그런 세상이다. 착취로 유지되는, 끝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고요 대륙이 그렇듯, 지금 너와 나의 세상은 끝이 정해져 있는 세상이다.

 

세상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상이 내 안에서 몇 번이고 망해버렸듯, 너의 세상도 진즉에 몇 번이나 망해버렸겠지, 감히 추측해본다. 에쑨과 다마야, 시에나이트. 이들의 개인적 종말이 곧 세상의 종말이듯, 우리의 망해버린 세상도 곧 이 세상의 끝과 닿아있으리라. 그렇다면 무엇을 부숴야 정해진 결말을 피할 수 있을까.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지금, 부숴나가야만 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을 끝내는 방식의 고리를 끊고,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위한 노력들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나는 책의 두 번째 장에 쓰인 문구를 다시 본다. “다른 이들과 마땅히 동등한 존중을 받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에게 바친다.” N. K. 제미신, 흑인 여성 작가가 바라는 세상을 생각한다. #BlackLivesMatter(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를 생각하고, 차별금지법을 생각하고, 너를 생각한다. 이 싸움의 끝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과 닮아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다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써내려가 보기로 한다.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진 [페미니스트의 책장] 연재를 마칩니다. 이 기사의 필자 설목 님은 유니브페미 활동가이자 “분쟁하러 온 ‘믿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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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씨 2020/07/23 [15:49] 수정 | 삭제
  • 와! 너무 흥미진진하네요. 당장 이 책 구해서 읽어야겠어요!
  • 독자 2020/07/21 [17:59] 수정 | 삭제
  • 이 연재 즐겁게 읽었어요. 내 책장에 꽂힌 책들도 다시 보게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 룰루 2020/07/17 [15:58] 수정 | 삭제
  • 연재 즐겁게 잘 읽어왔는데 마친다니아쉽다요 여름휴가 독서목록을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 jungkw 2020/07/17 [13:10] 수정 | 삭제
  • 이거 3부작이잖아요. The Stone Sky가 나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성의 상상력이 만드는 SF물은 정말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에요.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대해 가감없이 드러내는 작가가 멋지고, 새 인류에 대한 작가의 시나리오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고, 너무 매력적인 소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