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성교육, 성평등교육, 폭력예방교육… 큰 틀에서 좋게 보면, 사실 한국의 학교와 공공기관은 누구에게나 페미니즘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 환경이나 마찬가지이다. 교육명과 해당 법령은 다 다르지만 어릴 때부터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까지 수십 년간 매해 일정 시간 섹슈얼리티, 성평등, 젠더폭력에 대해 배우게 되어 있다. 그런데, 왜 현실은 사뭇 다르게 펼쳐지며 주변 사람들은 이 모양일까. 교육 현장에 가보면 답이 나온다. 나의 강의 활동 속의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이 세상에 의미 있는 목소리로 스며들기를 바란다.
메갈 말고 페미니스트?
2년 전 전국적으로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때 (젠더)교육 현장에서는 미투에 공감하기보다 백래시(backlash, 사회의 진보적인 변화에 따른 보수층의 반발)가 거세지는 분위기였다. 한 중학교 성폭력 예방교육 시간, 시작부터 끝까지 슬라이드 한 장 넘기기도 힘들 만큼 남학생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남자애 꼬셔서 성폭행한 여자교사도 있잖아요!” “여가부랑 메갈이 문제라고요!” “샘은 왜 여자 편만 들어요?” “남자도 성폭력 피해당하는데요? 소수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사방에서 공격받는 내가 너무 안 되어 보였는지, 아니면 수업 분위기가 너무 혼란해서 정리하려던 건지 반장인 남학생이 갑자기 의젓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달랬다.
“얘들아, 페미니즘과 메갈은 달라. 샘은 페미니즘 얘기하고 있잖아.”
순간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엉망이 된 수업은 끝내 제대로 복구되지 않았다. 끝나고 한숨을 쉬며 짐을 정리하는데 한 여학생이 조용히 다가와 작은 초콜렛 하나를 건넸다.
“선생님, 힘내세요.”
그 교실에 숨죽이고 있던 여학생들은 나와 남학생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백하자면 10대 남성만으로 구성된 그룹에 수업을 나갈 땐 평소보다 몇 배 긴장된다. 어떻게 하면 저항은 줄이면서 소통의 폭은 넓힐 수 있을까 끙끙 고민하며 수업을 준비한다. 수업을 무사히 마치기를 빌며, 이왕이면 아이들의 가슴에 물음표 하나 남기고 오면 더 좋겠다는 바람을 품는다. 페미니즘 그리고 성(젠더) 교육은 ‘성(性)’이 아니라 결국 자기 안에 새로운 질문을 찾는 과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떤 아이들은 화살표를 거꾸로 돌려 자꾸 나의 정체를 캐묻는다. “샘, 페미니스트예요?” 수업을 시작하며 성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하자 한 남학생이 도발적으로 질문했다. 수업을 듣던 다른 학생들이 “오오~” 하고 반응했다. “네. 그게 왜 궁금해요?” “그냥요.”
이대로 지나가면 뭔가 나만 추궁당한 느낌으로 남게 되므로 나는 굳이 페미니스트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고 모든 성은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 페미니스트이며, 성평등을 지향한다면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라고. 그럼 단골로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그럼 메갈은요?” “메갈이라는 말 들어봤어요?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남성혐오자요.”
이렇게 되면 그날 수업은 준비한 것과 전혀 상관없이 흘러갈 가능성이 많다.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한 연산을 거친다. 주어진 시간은 짧고, 이 시간 안에 학생들과 충분한 토론을 나눌 여건은 되지 않고, 자칫 잘못하면 함께 있는 여학생들은 더욱 위축된다.(‘메갈’로 찍히면 학교생활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런 논쟁에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편이다.)
그리고 경험상 ‘메갈’의 정확한 용어와 역사, 잘못된 쓰임에 대해 친절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줘도 대부분 제대로 듣지 않는다. 메갈을 욕으로 쓰는 이들에겐 팩트(fact)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을 바꾸거나 교정할 의지가 거의 없다. 감정을 앞세우는 이와 논리로 싸워서 이기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같이 감정에 호소해야 하나? 누구의, 어떤 감정?
우리는 대화할 수 있을까?
“혐오가 뭘까요?”
결국 나는 두루뭉술한 방식으로 큰 개념에서부터 접근하는 것을 선택했다. 혐오, 편견, 차별, 권력이라는 블록을 하나씩 집어와 차근차근 연결하고 거기에 젠더로 마지막 퍼즐을 맞춘다. 이미 수업 시간은 많이 지나버렸고,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그럼 한남은요?”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질문이 나올 때면 지금 내가 수업을 잘하고 있는 거 맞나 하는 회의가 든다.
어떤 강사들은 학생들의 이런 반응에 휘둘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일일이 다 대꾸하지 말라고도 한다. 페미니스트 강사를 일부러 자극하거나 수업을 방해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만나자마자 페미니스트냐 메갈이냐 후려치는 의도는 뻔하다. 그럼에도 내가 이들의 질문을 가장한 공격에 일일이 재질문을 찾아 대응하는 이유는, 한편으로 이런 고민도 들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특히 10대 남성들이 이런 대화를 평소 누구와 하고 있거나 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으려면 소통할 기회를 더 가져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n번방’ 시대의 10대 남성들은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함께 미래로 갈 수 있을까? 요즘 청소년 젠더교육 현장에서의 가장 큰 질문 중 하나이다.
학교에 페미니즘을
“‘한남’이 무슨 뜻일까요?” “한국 남자요.” “한국 남자라는 게 왜 혐오용어죠?” “조롱하잖아요.” “그럼 ‘한국’이나 ‘남자’의 어떤 점을 조롱하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그냥 말투가 기분 나빠요.”
“네, 아마 그 자체가 목적일 거예요. 한남이라는 말은 ‘미러링’(거울처럼 상대방의 언행을 따라 하면서, 그걸 듣는 이의 입장에 서보도록 하는 것)으로 생겼다고 알고 있어요. ‘김치녀’, ‘된장녀’ 같은 여성혐오 용어가 오래전부터 무분별하게, 재미로 쓰였잖아요. 그렇다면 반대로 들어보면 기분이 어떨까? 하고 만들어낸 거죠. 그래서 미러링 용어는 유통기한이 있어요. 여성혐오적인 말들이 사라지면 역지사지를 위해 만든 남성혐오적인 말도 사라지겠죠.”
성심성의껏 대화를 이어간다고 남학생들의 의문과 저항이 모두 해소되는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교실에서 이렇게까지 대화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화할 조건 자체가 되지 않거나, 대화를 통해 교육을 풀어낸 경험이 없는 학교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교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 사이에서도 금기시되어 있다. 교사들조차도 반(反)페미니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고, 페미니즘 이슈를 꺼내면 성별 간 대립과 갈등이 생길 거라 미리 걱정한다. 마치 성교육 시간에 콘돔 사용법을 배우면 아이들이 바로 성관계를 해서 큰일이 날 거라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없게 하는 구조이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배우려 하지 않는 자세이다. 성(性)을 성역(聖域)으로 남긴 채 성에 대해 교육할 수 있나?
이 글 서두의 수업이 있고 얼마 후, 또다른 남자중학교에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러 갔다. ‘불편한 용기’ 집회(2018년 5월부터 ‘불법촬영’과 ‘편파수사’를 규탄하며 여성들이 혜화역과 광화문 등에서 벌인 대규모 릴레이 시위)가 한창이던 때였다. 그날 나의 요청으로 우리 마을 ‘남성 페미니즘 공부모임’ 멤버 세 분이 보조강사로 참여했다. 전반부에 내가 강의를 진행하고 후반부에는 이 세 분이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가 왜 페미니즘 공부를 하게 되었나면…”
어릴 때 아들이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특별대우 받는 게 불편했던 기억, 남학교의 폭력적인 문화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힘들었던 경험, 엄마와 누나가 희생하는 모습에서 성차별을 인식하게 된 것 등 진솔한 자기 이야기가 펼쳐졌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며 남성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전하며 남학생들에게 페미니즘 공부의 매력과 필요를 간증(!)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뻘인 동네 아저씨들 이야기가 남학생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자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0대 남성들에게 ‘다른’ 남성 롤모델을 제시하고, 남성성 안에서 자신이 느끼는 억압과 불편함을 꺼내도 공감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쌓아가고, 나아가 남성 페미니스트의 존재를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드는 일 말이다.
물론 이런 시도가 청소년 당사자의 가장 가까운 곳- 집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면 더욱 좋겠다. 외부 강사에게 주어진 성교육 시간은 1년에 45~50분, 많게는 수백 명을 대상으로 한번 강의를 하며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결국 우리 일상을 바꿔내지 않으면 10대 남성들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들의 주변인물들이 ‘같은’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지 나는 계속 의심스럽다.
날 서고 불편한 대화 속에서 첨예하게 드러나는 우리의 ‘차이’를 인정하고, 우리가 꿈꾸는 미래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페미니즘을 안은 대화의 교육은 지금 당장 절실하다.
[필자 소개: 달리. 페미니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늘 배우는 사람이었지 가르치는 사람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사는 지방/소도시/농촌 지역의 여성청소년들과 만나면서 청소년 젠더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주제로 전국적인 강의 활동을 하는 중이다. 1년에 1시간짜리 강의로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인생에 1분이라도 성차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 건 중요하다는 순진한 마음으로, 100명 중 1명이라도 눈 마주치며 들으면 대성공이라는 낮은 기대감으로 오늘도 수업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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