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전범기업 연속폭파사건…여성 서사로 조명하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폭파음의 잔향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

심아정 | 기사입력 2020/08/17 [19:29]

일제 전범기업 연속폭파사건…여성 서사로 조명하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폭파음의 잔향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

심아정 | 입력 : 2020/08/17 [19:29]

*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8월 20일 전국에서 개봉하게 되었다. 필자는 2019년~2020년에 걸쳐 감독과 함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공동체 상영과 토론회를 기획하고 그 여정을 기록해 왔고, 지금도 기록 중에 있다.

 

▲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김미례, 2019) 포스터

 

일용직 노동자들이 전해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이야기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일본 최대의 인력시장, 오사카의 가마가사키에서 시작된다. 김미례 감독의 전작들, 특히 <노가다>와 <외박>을 본 관객이라면 ‘노동’ 문제를 다루는 연속성을 감지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김미례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노동하는 ‘인간’이다. <노가다>는 건설 일용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건설 현장을 따라다니며 촬영하기 시작했고, 자료 조사 과정에서 한국의 건설 산업이 갖는 다단계 구조가 일본 제국주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마가사키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대해 전해 듣는다.

 

노동의 문제는 그렇게 제국의 문제로 이어졌다. ‘전후’ 일본의 소시민적 삶의 안온한 자리는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 있는 다단계의 끝, 그 저변을 살아내는 자들의 노동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2006년, 일본 전역의 인력시장을 돌며 <노가다>(2005) 공동체 상영회를 하던 중, 감독은 어떤 노년 관객에게 “일본 노가다 운동의 전신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다. 그들의 영화를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겨울, 도쿄에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수십 년 간 지원해온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자신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기획을 접었다.

 

그 후, 두 편의 다큐멘터리 <외박>(2009)과 <산다>(2013)의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2014년, 한국 사회의 커다란 트라우마가 된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국가가 지닌 폭력성과 책임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국가라는 틀 안에 사는 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김미례 감독은 오랜 동료인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藤井たけし)의 제안과 협력으로, 결국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제작하게 되었다.

 

1974년 8월 30일, 도쿄 한복판에서 터진 시한폭탄

 

“그들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가? 모른다

그들의 폭력을 지지하는가? 모른다.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모른다.”

(김미례, 편집중에, 낡은 질문들 속에 갇혀서 괴롭던 순간에. 2017년 6월) 

 

▲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김미례, 2019) 스틸컷


1974년 8월 30일 정오. 도쿄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에 설치된 시한폭탄이 터져 8명이 죽고 376명이 다쳤다. 사건이 발생하고 3주가 지나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부대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4명의 늑대부대원들은 신대동아공영권을 책동하는 제국주의 침략기업과 식민자들을 향해 “해외활동을 정지하고 ‘발전도상국’에 있는 모든 자산을 지금-당장 포기하라”고 경고했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 자신이 일본인들을 향해 식민지 책임을 이토록 강렬하게 촉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체포되기 보름 전까지도,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해 전후에도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경제적으로 침략해 온 전범기업들에 대한 폭파를 이어갔다.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라는 일본 ‘안’의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과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고, ‘전후’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경제적 신식민지와 베트남전쟁 특수(特需)를 비판했던 그들은 1975년 5월 19일, 일제히 체포되었다.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연속폭파사건 타임라인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연속폭파사건 타임라인을 보면 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 세 부대가 모두 관여한 작전이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기소다니(木曽谷)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인과 조선인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하고, 1975년 당시에도 말레이시아에서 댐을 건설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던 하자마구미(間組)에 대한 공격이다. 과거 전범기업의 수탈이 현재진행형의 문제이며, 지금-당장 멈추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드러내는 작전이었다.

 

2014년 겨울, 다큐멘터리 출연진 섭외가 시작되었고, 2016년부터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사건 당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전히 복역 중인 이들이 있었고,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생각과 마음을 나누었던 대지의 엄니 부대 에키타 유키코는 2017년에 출소하여 섭외되었지만, 그녀의 출소 두 달 후 다이도지 마사시는 도쿄구치소에서 다발성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구성원(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 부대원)


밝혀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부대원은 총9명.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는 국제 지명수배 중이며, 마스나가 도시아키는 사형수로 지금도 수감되어 있다. 사이토 가즈는 체포되었을 당시 청산가리를 삼켜 사망했고, 구로카와 요시마사는 무기징역으로 복역 중이며, 우가진 히사이치는 1982년에 체포되어 18년을 구형받고 2003년에 출소한 후 지금까지 재판투쟁과 관련된 신문, <구원(救援)>을 펴내고 있다.

 

1960년대 전공투 운동과 엘리트 권위를 버린 사람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이른바 전공투(全共闘) 세대다. 1960년대 후반, 일본 대학가는 대학생 수의 급증으로 대규모 강의가 늘고, 해마다 인상되는 등록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편의시설 등으로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당시 일본 최대 규모의 대학이었던 일본대에서 1968년 5월,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전공투’에 대한 이미지는 헬멧과 쇠파이프, 나부끼는 깃발과 불타는 건물 등으로 전형화되어 있다. 그러나 천 명이 넘는 학생이 학교 건물을 점거하고 숙식을 함께 하며, 대학이나 제도권 교육에서는 배울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자주적 커리큘럼에 따라 스스로 구체적인 대안적 앎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적어도 전공투 초기에 바리케이트 안에서 열린 토론과 회의 과정은 대표를 두지 않고 자기 의지로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장(場)이 되었다. 방침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고, 기나긴 회의와 토론을 거쳐 서로를 설득하며 결정했다. 학생들은 학교 측에 ‘대중적 단체교섭’을 요구했는데, 학생 대표 몇몇이 학교 당국과 교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교섭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사된 대중적 단체교섭에 무려 4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12시간동안 교섭을 진행하였고, 이사진 총사퇴, 회계 공개, 집회자유의 보장 등을 약속 받았지만, 국가권력의 개입에 의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결국 흐지부지되고 만다.

 

동경대의 경우, 발단이 된 것은 의과대학의 인턴들이 겪는 위계 구조와 노동 수탈의 일상화였다. 7월에는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였고, 그 속에서 동경대 전공투가 결성되었다. 그들 또한 지도부 없는 운동을 지향했다. 엘리트로서의 ‘자기부정’이 운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자신들도 편입되어 있는 사회적 권력 관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전공투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투쟁의 실패 이후, 그들이 어떤 운동으로 나아갔는가’라는 물음이다. 대학으로 돌아가 엘리트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법과 시민사회라는 안전한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학 밖에서 인력시장운동, 환경운동, 나리타공항건설 반대운동, 우먼리브 운동 등 각자의 현장을 만들어 나름의 방식으로 싸움을 이어갔다. 바리케이트는 해체되었지만, 전공투를 계기로 그 전까지는 권위에 눌려서 나오지 못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오게 되었다.

 

▲ 수십 년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지원 운동’을 해 온 다이도지 지하루.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김미례, 2019) 중


다이도지 지하루, 우먼리브 운동과 지원 운동의 접점

 

1970년에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인 우먼리브(women’s liberation movement)는 전공투를 계승한 여러 운동 중 하나다. ‘리브’는 리버레이션의 앞글자다. 전공투의 바리케이트 ‘안’에서도 존재했던 여성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 성적 대상화에 대해 여성들 스스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등장한 운동이다. 바리케이트 안에서조차 밥하고 설거지 하는 것은 대체로 여성들이었고, 경찰들과 싸울 때도 그녀들은 뒤로 물러서 있어야 했다.

 

우먼리브는 함께 싸우고 있으면서도 함께 싸울 수 없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여성운동인 동시에, 전공투 운동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새로운 감각들 덕분에 생겨난 운동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우먼리브 운동을 했던 여성해방학생전선은 다음과 같이 ‘우리가 바로 전공투의 계승자’라는 입장을 취했다.

 

“전공투 운동은 파장을 일으켰지만 문제 제기로 끝났다. 전공투 운동은 과거의 이른바 거시정치로부터 일상을 문제 삼을 수 있는 미시적이고 새로운 정치로 이행하는 운동이며, 우먼리브는 그 새로운 정치를 계승하는 것으로 존재한다.”(소식지『리브합숙뉴스』제1호, 1971년)

 

그렇다면 우먼리브 운동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지원 운동과 어떤 접점이 있을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부대원들이 일제히 검거된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간 지속된 지원 운동은 당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은 이들이 전개해 왔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일용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무직, 공무원, 아티스트, 라면가게 주인, 스트리퍼 등이 지원 운동에 뛰어들었다. 지식인들 중심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몸을 움직여 스스로 사상을 구축하고 전선을 이어가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전위당과 대표자 대신 각자의 소박한 현장과 나름의 언어가 있었다.

 

▲ 다이도지 지하루 씨가 발행하는 소식지 『기타코부시』


다이도지 지하루(大道寺ちはる)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미츠비시중공업 폭파사건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형이 확정되고 나면 사형수는 가족만 면회할 수 있고,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게 된다. 훗날 그녀는 다이도지 마사시의 법적 여동생이 되었고, 소식지 『기타코부시』(キタコブシ)를 발행하여 감옥 안의 마사시와 감옥 밖의 지지자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이 소식지가 마사시의 근황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 친구들에게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고 강조한다. 이는 남성 운동가를 ‘옥바라지’하는 여성 지원자라는 전형성에서 비껴난, 다른 층위의 지원 활동이다.

 

“친구 집에 놓인 『지원련뉴스』에서 우연히 다이도지 마사시의 옥중의 서간집이 출간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내가 극악무도할 것이라 생각한, 폭탄 사건을 일으켰던 사람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에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몇 번인가 편지를 주고받던 중, 면회를 가볼까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스물다섯이었고, 스물 셋 정도부터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여성들의 그룹에 관련되어 있었어요. (중략)

 

여성운동 안에서 전문가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고, 대등한 관계로 의견을 말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마사시군은 나보다 10살 연상인 남자이고 다양한 책을 많이 읽어서 여러 가지에 대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지만, 절대로 그를 절대로 우러러보지 않았어요. 우러러보는 관계는 본인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죠. 나는 여성운동 속에서 동지들에게 배웠던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는 감각으로 그를 대했어요.”(다이도지 지하루와의 인터뷰 녹취록 중에서, 2015년 11월 6일, 김미례 제공)

 

‘우러러보지않는 대등한 관계’는 지하루가 우먼리브 운동을 통해 확보한 감각이었다. 그녀는 다이도지 마사시의 사망 이후, 형이 확정되기 이전에 여러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 옥중서간집 『最終獄中通信』(2018)을 냈다. 마사시에게는 지하루 이외에도 미국에서 인디언해방운동을 하다가 300년의 금고형을 받고 일본에 온 아이언크라우드, 오키나와의 기요미 등 양자결연을 통해 가족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히라노 료코의 면회길, 생활과 사상을 잇는 무한왕복운동

 

출연진 중 한 사람인 히라노 료코(가명)는 지원 모임에서 단 한 번 만났을 뿐인 김미례 감독이 8년 만에 불쑥 나타나 만남을 청했을 때, 한 시간 만에 달려 나가 맞아주었다. 작년에 김미례 감독과 함께 도쿄에 가서 그녀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마스나가 씨 면회를 가기 위해 40년 넘게 자전거를 타고 같은 길을 오갔어요.”

 

료코가 수없이 지나다녔을 그 길 위에는 생활과 사상을 잇는 소박하고 진심 어린 무한왕복운동의 시간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면회를 오가는 왕복의 수만큼 달랐을 그녀의 마음의 풍경을 쉽게 상상할 수는 없지만, 책임이라는 건 연대를 통해서 비로소 생겨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김미례 감독과 하라노 료코 씨가 함께 찍은 사진(좌). 우측은 하라노 료코 씨가 수십 년간 출간해 온 소식지 『지원련 뉴스 』


료코는 수십 년간 출간해 온 소식지 『지원련 뉴스』(支援連ニュース)를 매개로  아직 수감 중인 이들의 소식과 감옥 밖 동료들의 활동을 전한다. 히라노 료코와 같은 ‘곁의 존재들’은 사건 ‘이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토대를 넓히고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주었다.

 

에키타 유키코, 유년기 기억 속의 조선인 이웃

 

에키타 유키코는 수감 중이던 1977년, 다카 일본항공기 납치 사건 당시 일본적군의 요청에 따라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팔레스타인으로 떠났고, 국제수배 중이던 1995년에 루마니아에서 체포되어 일본으로 넘겨져 20년형을 선고받고 2017년에 출소했다.

 

출소하던 해, 『마코의 보물』(マコの宝物)이라는 동화책을 출간하여 작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2015년 8월 2일, 이직 수감 중이었던 그녀가 김미례 감독에게 보낸 서신에 유년기 조선인 이웃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부분이 있다.

 

“아이였을 때, 내가 살던 곳에는 전쟁 중에 조선에서 온 몇 가족들이 할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바로 제 주변에 조선인 아이가 있었고 온돌이 있는 집이 있어서 항상 함께 놀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960년 전후에 그 사람들 대부분이 ‘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조선’은 그저 몇 명의 소꿉친구가 있는, 언젠가 가보고 싶은 친구의 나라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왜 일본에 있나, 조선반도에는 왜 두 개의 나라가 있을까, 북으로 돌아갔다는 사람들과는 어째서 편지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어버렸나.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2019년 9월 28일, 도시샤대학에서 열린 공동체 상영회 후 토론회에서 에키타 유키코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1972년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당시 인천에서 우연히 만난 아저씨들이 전후 세대인 자기에게 식민지 책임을 물었는데, ‘보통의’ 여대생이라는 자신의 안온한 자리가 일본군 ‘위안부’의 위태로운 자리를 만들어낸다는 관계를 알아차리게 되었다고. 유키코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그 자리에 모인 일본과 한국의 청중 모두에게 가해자성의 자각을 촉구했다. 유키코의 발언을 통해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선구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라이 마리코, 핵발전소 반대운동과 ‘새로운 가족’

 

아라이 마리코는 동아시아반일전선의 정식 부대원은 아니었지만 ‘늑대 부대’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8년형을 선고 받고 12년간 투옥되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오랜 기간 수탈당해 온 도호쿠(東北) 지역 미야기(宮城)현 출신이며, 지금도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이 탄광에서 했던 강제노동의 문제는 ‘전후’ 일본에서 가마가사키 같은 인력시장의 문제로, 2020년의 현재적 관점에서는 도호쿠 지방에 몰려 있는 핵발전소에 투입되는 노동자의 문제와 그곳 주민들의 삶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제기하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착취당하는 사람들과 ‘나’는 같이 살고 있는데, 그런 착취를 전제로 해야만 살 수 있는 ‘나’란 도대체 누구인가?”(가게모토 쓰요시, 수유너머104 공동체상영회에서)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대리노동’을 가능케 하는 차별구조는 2020년에도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50년 전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지금-여기의 우리가 받아 안을 과제이기도 하다.

 

▲ 늑대 부대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12년간 투옥되었던 아라이 마리코 씨(좌)와 그녀가 출간하는 소식지 『프티노오도리』(우)


마리코가 수감되었을 때, 공안의 미행과 감시에 시달리던 그녀의 언니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 영화 속에는 아라이 마리코의 어머니가 딸을 잃은 커다란 상실감 속에서도, 자신을 찾아와 응원해주는 지원자들이 딸이 되어주고 손자가 되어주었으니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됐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지원 운동은 국가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제도라 할 수 있는 가족제도조차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성을 제안하고 있다. 실제로 다큐 상영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사려 깊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사가족과 같은 유대감이 생겨났다.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은 주로 남성 엘리트들에 의해서, 대학을 통해 아카데미즘으로 국내에 수입되어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저변을 살아내는 사람들, 그리고 사건 이후 수십 년 간 지원 활동을 해 온 여성들의 현장과 사상이 담겨있다.

 

아라이 마리코는 감옥에 있던 에키타 유키코의 글을 『프티노오도리』(プチの大通り)라는 소식지에 연재하며 출간을 이어왔고, 지역 공동체 안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소모임 등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끊임없이 전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다이도지 지하루, 히라노 료코, 아라이 마리코와 같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전선은 그들이 출간하는 소식지의 지면(紙面)이라는 현장에서 지금도 생성되고 있는 것 아닐까.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사건으로 딸이 12년간이나 투옥되고, 맏딸은 공권력의 감시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등 커다란 상처를 겪었음에도, 어머니 아라이 도모코 씨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갖게 되어 좋다’고 말한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김미례, 2019) 중


‘또 하나의 가해’에 대한 자성, “아무도 죽이지 않는 혁명”

 

훗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가해의 구조를 멈추기 위해 자신들이 행했던 ‘또 하나의 가해’, 즉 기업 식민주의에 의한 수탈을 멈추려고 던진 폭탄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해 오랜 시간을 들여 성찰적으로 비판했다. 결국 에키타 유키코는 ‘아무도 죽이지 않는 혁명’을 말하기에 이른다.

 

친구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다이도지 마사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인민이라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존재를 인민 혹은 대중이라는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우리의 잘못은 미래의 동지, 친구, 분별력 있는 인민과 우리가 이어지는 회로를 갖지 못하고 그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지 못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닌 일본 인민에 대한 불신과 절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사고방식은 대중 운동의 경시 혹은 부정과 이어졌으며, 무장투쟁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우쭐대는 사고방식에 빠져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다이도지 마사시,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에 대한 자기비판」, 치카프 미에코 (チカプ美恵子)에게 보내는 서신, 1982년 12월 21일)

 

사건 당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었다”는 보도가 난무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자기 성찰과는 별도로, 그리고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는 별도로, 시민 앞에 붙은 ‘무고한’이라는 수식어에 대한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무고한’ 시민은 없다. 오히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언제든 소시민의 평온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 부당한 수탈을 강요당해온 누군가에게 나도 인질로 잡힐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상영과 토론의 장(場)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

 

상영과 토론의 과정을 기록하면서 유독 기억에 남는 장소와 사람들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침략당한 홋카이도(北海道)의 니부타니(二風谷)라는 작은 마을, 여성 샤먼 레라의 집 작고 아늑한 거실이다. 그곳에서 공동체상영을 했을 때 관객은 레라, 피가 섞이지 않은 그녀의 장성한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 도쿄에서 혹은 서울에서 온 이방인들,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20년 넘게 레라와 함께 살고 있는 중증정신장애인 여성, 문지방을 드나드는 여러 동물들이었다.

 

난로 위에 주전자를 얹고, 그들과 함께 다닥다닥 붙어 앉아 보았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각별했다. 천황제에 반대하는 시위행진이 나오는 장면에서 갑자기 한 꼬마가 “텐노헤이카반자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그 찰나의 그 웃음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늑대부대원 4명 중 3명이 홋카이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도지 마사시는 홋카이도 구시로(釧路)의 탄광에서 석탄을 실어 나르는 갱차가 커브를 돌며 지나갈 때 떨어진 석탄을 아이누 아이들이 주워 가는 것을 종종 보았는데, 그렇게 주워 간 석탄으로 그들이 혹한의 밤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고 했다. 사이토 가즈는 후지제철의 사택이 있는 홋카이도의 무로란에서 자랐는데, 친구들과 자주 놀러갔던 이탄키(イタンキ) 해변은 전쟁 중에 강제 연행된 중국인들의 뼈가 많이 발견된 곳이었다.

 

아이누와 조선인을 이웃으로 둔 다이도지 마사시와 다이도지 아야코, 사이토 가즈의 동아시아는 그날 밤 니부타니 레라의 집 작은 거실에 제도로서의 가족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로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자취와 기억을 공적 담론의 장으로 건져 올리는 여성사 쓰기,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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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페 2020/09/03 [19:21] 수정 | 삭제
  • 오!!!! 생각할 거리가 많네요. 정말 흥미로운 글. 영화도 꼭 보고싶어요.
  • 페르 2020/08/24 [09:32] 수정 | 삭제
  • 영화 어떻게 볼 수 있나요?
  • 2020/08/21 [20:57] 수정 | 삭제
  • 와 “.... 엄청 새로운 자극을 주는 글입니다.
  • 바바 2020/08/19 [16:03] 수정 | 삭제
  • 엄청 흥미진진
  • 독자 2020/08/18 [18:56] 수정 | 삭제
  • 잘 읽었습니다. 기사가 길어서 프린트해서 퇴근길에 읽어보았죠. ㅎㅎ 일본의 전공투 세대와 자기부정 운동이라... 관심이 가네요. 영화도 꼭 보고싶습니다.
  • lindo 2020/08/18 [12:09] 수정 | 삭제
  • 예고편만 봤는데도 너무 흥미롭네요. 왜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하나도 몰랐을까요. 김미례 감독님 리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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