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상품화의 고리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가 던지는 질문

도라 | 기사입력 2020/09/15 [10:14]

동물을 ‘상품화의 고리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가 던지는 질문

도라 | 입력 : 2020/09/15 [10:14]

“가장 교묘하게 해를 끼치는 억압은 우리의 기본 일상과 마음 깊은 곳에 은밀하게 침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마이클 파렌티(Michael Parenti)

 

페미니스트 동물연구가가 쓴 ‘어느 암소의 서사’

 

황윤 감독의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2015)에서 아기 사람과 아기 돼지가 병치되던 도발적인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케스린 길레스피가 쓴 책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는 아기 돼지만 암송아지로 대치했을 뿐, 그때 기억을 그대로 소환해주었다. 1389번 암소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책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에 삽입된 이미지 1.1 Sadie, Animal Place (Grass Valley, CA)

 

케스린 길레스피(Kathryn Gillespie)는 젠더(gender)와 생물학적 성, 식품과 농업,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지리학자이자 비판적 동물연구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의 낙농업계에서 자행되고 용인되는 폭력과 이를 재생산하는 사회 규범 및 체계, 그리고 상품화가 소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외면하는 형태에 저항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외면하는 형태가 암소뿐 아니라 사육되는 모든 동물, 업계 노동자와 인간,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고찰한다.

 

-컬 경매에서 본 소들은 모두 도축장으로 끌려가 죽기 직전이었는데 왜 유독 1389번 소만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소의 고통이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던 나에게 너무 생생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또 어쩌면 낙농 생산 과정에서 너무 지치고 소진되어 도살되기 직전 마지막 경유지인 경매장을 자기 발로 걸어 나갈 수조차 없을 정도의 몸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1389번 소는 계속 나를 괴롭힌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눈만 감으면 그 소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1389번 소(그리고 그와 같은 처지의 동물 모두)가 바로 이 책의 제목이고,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개와 소를 차별하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생명을 서열화하게 된 걸까? 저자는 인간과 특정 동물의 단절을 인간에 의한 종(種)의 “계층화”와 “범주화”에서 찾는다. 반려동물, 유해동물, 식용동물, 실험동물 등과 같이 동물을 범주화하고 인간은 그 최상층에 위치시키거나 예외로 두기 때문에, 지정된 범주에 따라 인간이 동물을 취급해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일찍이 소나 돼지, 닭 등을 식용동물의 범주에 넣었으며, 재고의 여지없이 일반적인 개념으로 고착되었다.

 

동물이라는 범주 자체는 인간을 제외한 종(種)을 인간의 하위에 있는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게 하며, 그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한다. 동물의 정체성은 인간에 의해 개념화되고 이미지화된 대로 규정되어 소비되거나 향유될 뿐, 그들의 서사는 강제적으로 침묵당했다.

 

-어떻게 특정한 생명과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이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로 자리 잡고, 그 결과 폭력이 전혀 폭력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은 인간 이외의 종에 대한 폭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폭력이 (법과 자본주의 같은) 제도적 장치, (역사, 문화적 관습, 지배적 담론 등의) 사회적 규범,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는 인간 예외주의 등의) 불평등한 사고의 틀에 의해 지속, 재생산, 소거되는 과정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영양과 식품군에 관한 지식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관련 업계의 정치성이 작용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 “낙농업계의 성공적인 로비 활동으로 현재의 식생활 가이드라인에서 중요한 위치를 계속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케스린 길레스피(Kathryn Gillespie) 저서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 고기도 가죽도 아닌, 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윤승희 역, 생각의길, 2019)


과학의 탈을 쓴 정치는 그 진위를 따질 새 없이 소비자들에게 끊임없이 주입된다. 이는 정책의 결정이 소수의 엘리트나 전문가들에게 집중되는 기술관료제(Technocracy)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자 병폐이기도 하다. 이것이 비정상화의 정상화를 낳는다. 문제를 감지하고 이 상황을 전복하려는 소수는 대체로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행동과 실제 자신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동물에 대해 쉽게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축산품이 상품화되는 첫 출발점부터 동물의 존재는 간단하게 잊거나 부정해버릴 수 있다. 애초에 식품을 섭취할 때면 동물은 보이지도 생각나지도 않는다.

 

1949년에 발표된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는 ‘빅 브라더’(소설에서 정보를 왜곡하여 민중을 호도하고, 텔레스크린으로 이들을 통제하는 독점적인 권력을 칭함)의 눈이 시민을 감시하는 암울한 미래를 묘사한다. 사회의 구성원들, 심지어 가족들마저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지만, 결코 ‘빅 브라더’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오웰은 그의 소설 속 세상에서 이중사고(doublethink)라는 개념을 작동시켰다. “알면서도 모르는 것, 진실을 완전히 꿰고 있으면서 공들여 지어낸 거짓말을 하는 것,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을 견지하면서, 그들이 서로 모순인 것을 알면서도 둘을 똑같이 옳다고 믿는 것. 의식적으로 무의식 상태가 되고, 그 다음에는 다시 방금 시행한 최면 행위마저 의식하지 않는 것”은 이중사고가 강요되고 개성 있는 사고력이 거세된 암울한 사회의 특징이다.

 

케스린 길레스피는 미국 낙농업계에 오웰식 이중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동물을 사육하는 데에 고통스러운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면서도, 이러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머리에서 지워버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고통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부정한다. 철판에 삼겹살을 굽다가 도살당한 돼지를 애도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우리가 눈감은 진실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동물의 범주화와 인간 예외주의, 낙농업에서의 “인공수정, 정액 채취, 꼬리 자르기, 거세, 뿔 자르기, 강제 출산, 착유, 이송, 판매, 도축과 렌더링” 과정에서 자행되는 폭력에 눈을 감고 이를 단지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알지 못한 진실은 무엇일까.

 

착취당하는 ‘암컷’의 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결탁한 축산업은 여타 산업과 마찬가지로 집약적인 대량생산 체계를 요구한다. 책에서 인용한 미국 농무부 기록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06년까지 500마리 이상의 소를 보유한 대규모 농장은 20% 증가했는데, 그중 2천 마리 이상 규모의 농장은 128% 늘었다. 케스린 길레스피는 이러한 변화가 인간과 인간 외 종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특히 동물의 생체 주기 교란을 통해 적은 수의 암소가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하게 되는 문제를 지적한다. 1930년 미국에서 암소 한 마리가 하루에 생산하는 우유는 5.4kg이었던데 반해, 2016년에는 30kg까지 증가했다. 암컷인 몸은 우유 생산을 위해 생식 체계를 더욱 폭력적으로 착취당한다. 암소뿐 아니라 미국 내 암탉의 95%가 “날개조차 펼 수 없는 밀집형 닭장에서 지내며,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서로 무참하게 공격하지 않도록 부리를 잘린다.” 암탉과 암소는 고통스럽게 ‘소모된’ 후, 바로 도축된다.

 

▲ 유엔식량농업기구 『가축을 통한 기후변화 대응』 보고서(2013)에 삽입된 이미지. 보고서는 낙농/축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잔혹행위 방지와 동물복지를 위한 법규들이 운용되는 실태를 보면, 인간이 다른 종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다루는 방식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는 데 과연 법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법학자 마니샤 데커는 인간중심주의가 법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고, 법체계가 종 계층주의와 인간우월주의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점을 우려했다.

 

저자는 착취가 용인되는 원인이 법망의 부재에도 있다고 본다. 미국 내 사육 동물을 보호하는 유일한 법인 인도적 도축법(Human Methods of Slaughter Act)은 이름 그대로 도축 과정에만 관여할 뿐, 사육 방식은 다루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상위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연방법이 부재하고, 설령 있다 해도 법 집행기구가 없으며, 실제 범죄 사실을 입증할 수가 없어 기소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데다가, 기소된다 해도 벌금이 적어서 실제적인 체계 개선은 요원하다는 것. 그녀는 실제 동물복지를 규정한 법들은 동물 보호보다 동물을 통해 이익을 얻는 집단들을 보호하는 합법적인 장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더욱 잦아지는 감염병의 확산

 

도축은 ‘식용동물’들의 몸이 인간을 위해 소진되는 마지막 관문이 아니다. 도축 뒤에는 렌더링(가축 사체를 분쇄한 뒤 멸균 처리하고 발효시키거나 물리·화학적으로 가공해 사료 및 공업원료 등으로 활용하는 작업)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으며, 동물이 사육되고 도축되는 과정에서의 착취는 렌더링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는 소위 광우병이라고 하는 소해면상뇌증(BSE)이 소의 부산물을 동물 사료로 재처리하면서 문제시되었다고 밝힌다. 감염된 소가 렌더링되어 사료화되고 이 사료를 다른 소가 섭취하면서 확산된 것인데, 이는 경제적 효율과 원가 절감을 위해 일반화된 관행이라고 한다.

 

경제적 효율을 추구하는 집약적인 공장식 축산 시설에는 늘 구제역이나 조류독감(AI) 등 전염병의 ‘집약적’ 확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동물뿐 아니라 인간의 신체·정신에도 유해하다. 일례로 우리나라에서 2000년부터 거의 전국 단위로 발생하고 있는 구제역과 AI 당시 살처분 작업을 했던 공무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사망, 과로로 인한 뇌출혈과 전신마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이제 모두의 관심이 필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저자는 가축·야생동물의 감염병과 인수공통전염병(zoonosis)을 예로 들며 생명 존중과 윤리의 문제를 보건 문제와 결코 따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기후 변화의 ‘주범’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공장식 축산업이 온실가스 배출, 즉 기후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실제 지구상 78억에 달하는 세계 인구를 먹이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약 700억 마리의 가축들이 쉴 새 없이 대량 도축되고 상품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끌어 쓰는 자원(토지, 수자원 및 에너지)은 삼림 파괴를 수반하며,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바, 이는 자연이 버틸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서고 있다.

 

▲ 유엔식량농업기구는 보고서 『가축을 통한 기후변화 대응』(2013)에서 공장식 축산업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고 밝혔다. http://fao.org/3/a-i3437e.pdf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발간한 보고서 『가축을 통한 기후변화 대응』(Tackling Climate Change Through Livestock, 2013)은 가축이 방출하는 메탄가스가 지구 온난화의 주요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저자가 책에서 두 차례 인용한 다큐멘터리 <카우스피러시>(Cowspiracy, 2014)』도 기후 변화의 주범은 기존 환경단체들의 주장과 다르게 축산업이라며 환경 문제에 관한 상식에 반기를 든다.

 

동물권에 대한 페미니즘적 사유

 

-비건주의는 사실 한 개인이 다른 생명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정치적 표현이 될 수 있다. 또한 동물과 이제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른 종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급진적인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동물피난처들처럼, 비건주의는 동물, 식품, 환경, 건강에 관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윤리적 대안과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하나의 방식이다.

 

저자는 “사고방식의 균열”을 요구한다. 필자 개인의 경험에 비추자면, 이 내부적 균열의 경험은 행동의 변화를 일으킨다. 작년 11월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육식주의자’로 규정했던 사람인만큼 나의 식습관은 강력한 내부적 동인(動因) 없이는 바꾸기가 수월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책은 단 한 번의 “균열”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균열된 사고방식을 내재화하고 변화된 행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각도로 검증된 지식의 지속적인 주입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는 내게 시의적절한 “균열”의 경험을 제공해주었다.

 

케스린 길레스피의 연구는 비건주의(Veganism)의 중요성으로 귀결되지만, 동물권 운동가들과 이론가들의 입을 빌어 채식주의나 비건주의만으로는 이 거대한 구조적 문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을 상품화의 고리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 인간이 다른 종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미국 곳곳의 동물피난처들은 “동물이 살기 적합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탈규범적 방법들을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이 피난처들에서 실제 방문객들이 동물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작하고, 소비 행태를 크게 변화시키는데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밝힌다.

 

-나는 이 책에서 식품 생산 과정에서 인간이 겪는 현실적인 투쟁과 고통의 무게를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인간 외 동물이 경험하는 식품 생산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더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케스린 길레스피는 비판적 동물연구가로서 이 책을 위해 2년간 워싱턴과 캘리포니아 낙농 현장과 동물피난처 등을 발로 뛰며, 내용 분석과 담론 분석이라는 연구 방법론을 사용하여 기록했다. 사실 이 책의 관전 포인트는 책이 전달하는 내용에만 있지 않다.

 

-나를 거절했던 농부들이 일상적으로 만나 자기들이 키운 동물을 파는 장소에 가기가 여전히 겁이 났다.

 

저자는 자신의 결정뿐 아니라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의 고민과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전문가로서 자신의 위계를 내세우지 않는 기술 방법을 택했다. 인터뷰를 할 때도 질문을 던지는 자와 질문을 받는 연구 대상이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답변하는 사람의 작은 몸짓과 몸짓의 변화를 묘사함으로써 읽는 이도 그 자리에 함께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데, 한 마디로 독자가 연구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참하고 있는 기분이다. 이는 다양한 종(種)과 젠더에 대한 탈규범적 사고를 경유한 저자 고유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 원서 『The Cow with Ear Tag #1389』 by Kathryn Gillespie 표지 이미지


-동물의 도축 현장을 직접 보는 데 따르는 어려움에 대해 고민할 무렵, 나는 이미 경매장에서 고통받는 동물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목격과 관음 사이, 윤리적으로 모호한 회색지대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한 사람의 정치적 혹은 윤리적 가치관이 어떻든 동물이 폭력을 당하는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의 공모가 발생한다.

 

“나의 목격은 1389번 소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와 같은 문장은, 저자가 연구를 위해 정보를 취득하는 과정과 정보를 독자들의 눈에 보여주는 방법을 결정하는데 치열한 윤리적 사유를 거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또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업체 사람들에게 당한 성희롱과 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묘사한다. 이 책이 젠더화된 가축(암소)의 착취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케스린 길레스피는 페미니스트 학자로서 기존의 연구 체계 안에서 한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을 해체하고, 페미니즘 인식론으로 관점 전환을 시도한다.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기술관료주의, 소비주의 등을 빙자해 쇼비니즘(Chauvinism)적으로 덮어지고 무시되어 온 존재들의 서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존재 간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동등하게 위치시키려는 인식론이다. 길레스피는 이러한 인식을 가축에게로 확장시켜 동물권에 대한 페미니즘적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코비드19와 재난의 시대,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고선(最高善)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와 자본의 세계화라는 비가역적 조류는 2020년 코비드19라는 미증유의 재난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았다.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인간의 ‘학습된’ 소비 욕구만 끝없이 채우면서 환경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논하는 것 역시 오웰식 이중사고에 다름아니다. 저자가 제안한 대로 지구와 생태계, 인간과 동물의 연결 고리 속에서 우리는 다른 종(種)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는 ‘뉴 노멀’ 시대, 우리와 다음 세대가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그렇게 크고 온순한 동물이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이 났다. 속눈썹 아래로 보이던 소의 눈과 소가 콧김을 내뿜으며 머리를 흔들 때 뺨에 닿던 뜨거운 숨결을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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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DA 2020/09/19 [20:16] 수정 | 삭제
  •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작아서 그런지(땅값은 비싸고) 외국과 같은 동물피난처는 못 본 것 같아요. 강형욱 씨가 그런 얘길 했죠. 동물 대하는 걸 보면 그 사회에서 약자를 대하는 것도 알 수 있다고. 한국도 생명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문화가 확산되었음 좋겠습니다.
  • s 2020/09/16 [23:37] 수정 | 삭제
  • 요즘 비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조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될 것 같다.
  • 비지 2020/09/15 [12:26] 수정 | 삭제
  • 상품화의 고리 밖으로 데리고 나온 동물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명이죠.. 아기때는 마냥 귀엽고 나름의 사회성도 갖추게 되구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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