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재난 속 일본의 ‘조선인, 중국인 차별’ 심각하다살아야 하는 자, 죽어도 되는 자 나누는 인종차별코로나 사태로 다양한 문제가 표출되고 있다. ‘차별’도 그중 하나다.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하여 일본 사회에서 발생한 차별과 혐오 문제에 대해, 반(反)-레이시즘(인종주의) 정보센터(ARIC) 대표 양영성(梁英聖) 씨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자이니치코리안(재일조선인) 3세인 양영성 씨는 히토츠바시대학 대학원생이며, 책 <일본형 혐오 발언(hate speech)이란 무엇인가>를 쓴 저자이다. [편집자 주]
‘우한 폐렴’ ‘중국인 사절’ 코로나 사태 빙자해 차별 선동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단체 ‘반레이시즘 정보센터’(ARIC, Anti Racism Information Center)는 지방의원과 선거 후보자를 포함한 정치인과 공인의 차별 발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기록된 것이 약 380건에 달하며, 그중 코로나19와 관련된 차별 발언이 70% 정도였습니다. 발언자의 대부분은 코로나 이전부터 차별 발언을 한 바 있지만, 코로나 사태를 빙자해 한층 더 심각한 차별 발언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를 굳이 ‘우한 폐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어떤 음식점이 ‘중국인 사절’이라는 종이를 써서 붙인 것을 장려한 정치인도 있었습니다.
아소 다로 부총리도 국회에서 ‘우한 폐렴’이라고 발언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병명을 지명이나 인종, 국적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음에도, 굳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술집에서 술 취한 사람이 하는 말과 부총리가 국회에서 하는 말은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도, 모리 마사코 법무장관도 “차별적 발언이니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부총리에 의해, 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인)과 연결지으며 인종/민족차별을 부추겨도 ‘괜찮다’는 정당성이 부여된 것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중국(인) 바이러스”라고 발언했죠. 당장 그 자리에서 “차별이 아닌가?”라는 문제 제기와 함께 해당 발언을 지적하는 질문이 나왔고, 사회적으로도 비판을 받았습니다.
마스크 배포 ‘조선학교 유치원’ 배제, 무엇을 뜻하나
일본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차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사이타마시의 마스크 배포와 관련된 차별입니다. 3월, 사이타마시는 유치원 등에 마스크를 배포하면서 조선학교의 유치원을 배제했습니다. 심지어 담당 직원은 조선학교 유치원에 마스크를 배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팔거나) 부적절하게 이용할 경우, 지도할 수 없다”는 취지의 차별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조선인 아이들을 배제한 것에 대한 비판이 일자 결국 마스크를 배포하기로 했지만, ‘차별’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이타마시는, 배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인이나 극우의 차별 선동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가장 나쁜 일은 간사이 지역의 극우 활동가가 시에 면담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하기는커녕, 면담의 영상 공개까지 허가하며 극우의 선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마스크를 특정 아이들에게만 배포하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질병이 만연한 비상 상황에서 행정이 ‘재해 시에 누가 살아야 하고 누가 죽어도 되는지’ 선 긋기를 했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레이시즘(인종주의)은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야 할 사람과 죽어야 할 사람을 나누는 차별입니다. 코로나 위기에서 모두가 목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때 모두가 단결해서 질병과 싸워야 대처할 수 있는데, 사이타마시의 행동은 완전히 그 반대였던 것입니다. 행정이 솔선수범하여 차별을 하고, 차별에 의해 주류인 자신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한 것입니다. 사이타마시는 차별을 선동하고 시민사회에 차별을 증대시켰습니다. 일본에서 차별은 위로부터도 아래로부터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차별에 반대하는 힘’이 약한 사회
사이타마시가 한 일은 이중, 삼중의 문제이지만 그 이상으로 심각할지도 모르는 문제는, 코로나 위기 가운데 “생명을 선별하지 말라”거나 “차별에 반대하지 않으면 모두의 생명을 지킬 수 없다”고 강력하게 호소하는 행정가나 정치인이 일본에는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기 일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바른말을 해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가 있는 것은 “차별이니, 반드시 멈춰야 한다”고 저지하는 ‘반(反)차별’의 힘뿐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일본 사회는 이 힘이 약합니다.
일본에서의 ‘반차별’ 운동은 차별받는 피해자 곁에서 피해자를 임파워먼트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활동에는 장점이 있지만, 가해자의 차별을 저지하지 않는다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차별할 자유는 없다’는 원칙 하에 가해 행위를 저지하지 않고서, 피해자의 곁에 있기만 하면 차별을 억제하는 힘이 되지는 못합니다.
서구권에서 반차별 운동은 ‘피해자 임파워먼트’와 ‘가해자의 행위 저지’를 사회정의의 두 바퀴로 삼고 있습니다. 일본형 반차별 개념도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정치인과 언론에 의한 혐오 발언이 일상다반사로 빈발하는 일본에서, 차별하는 가해자의 입과 손을 봉하는 반차별을 정의로 확립하고 확산시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차별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이유는 ‘방관자’ 때문이다
일본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가족 관계, 경쟁과 시장원리로 돌아가는 기업 관계, 이 둘 이외에 ‘사회적 연대’(상부상조 같은) 원리가 시민사회 안에 자리 잡지 못했고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기묘할 정도로 관대합니다.
국가에도, 시장에도 맞설 수 있는 반(反)차별과 반(反)인권침해의 사회적 연대 원리, 정의와 공통 언어 같은 것이 일본 사회에는 축적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회를 다시 바라볼 기회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별은 사회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용납하지 않는다’는 반차별의 원리를 사회에 깊숙이 새기고 사회적 연대를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업, 학교, 단체 등 작은 사회에서 차별금지 규칙을 만들어 차별을 억제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제삼자 개입’입니다. 차별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방관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관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더 심해지고, 피해자는 목소리를 높이기가 어렵습니다. 차별을 보면 즉시 멈추게 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밖에 해결책이 없습니다. 직접 멈추게 하기가 무섭다면 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SNS 등에 공유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적어도 차별을 없었던 일로 하지 않는 것, 이 축적으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수밖에 길이 없습니다.
<일다>와 기사 제휴하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보도 기사입니다. 구리하라 준코 기자가 정리한 글을 고주영 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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