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아니오’로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중학교 성교육 시간, 학생들에게 성(性)에 대해 궁금한 것을 쪽지에 써서 자유롭게 물어보라고 했다. 쪽지를 하나씩 펴자 공통적으로 많이 나오는 질문이 있었다.
‘성관계는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나는 학생들에게 되물었다. “성관계는 좋은 걸까요?”
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킥킥거리기도 하고 웅성거리기도 했던 학생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좋고 나쁜 것을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질문의 순서를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성관계는 좋은 것일까’가 아니라 ‘좋은 성관계란 무엇일까’로요.”
살짝 긴장되어 있던 학생들의 얼굴이 “아하!”로 바뀌었다.
“성관계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어요.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마음이 달라질 수 있고요. 지금은 좋을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싫어질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죠. 모든 성관계를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어요.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상대에 대해서도 그러한가 살펴보는 거예요.”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이제 막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아쉬운 45분의 성교육 시간. 어쩌면 이 학생들과 평생 단 한 번 만나는 기회에 솔직하고 용감한 질문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은 나의 답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앞으로 ‘좋은 성관계’를 어떻게 정의하게 될까? 그것을 알아갈 충분한 과정과 기회를 만날 수 있을까?
한편 교육활동가로서의 나에게도 숙제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왜 성을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보게 되었을까?’
‘아름다운 성(性)‘에 갇힌 (여자)아이들
다른 중학교에서 성교육을 하다가 인상적인 일이 있었다. 그 학교는 학급별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모든 학급의 여학생 그룹에서 ‘성’하면 연상되는 단어로 ‘아름다움’이라 쓴 것이다. 그런데 이유를 묻자 명쾌한 답이 나오진 않았다.
“성이 왜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생명을 잉태할 수 있어서….” “아, 그럼 임신을 이야기한 거네요. 그럼 임신은 왜 아름다울까요?” “…모르겠어요.” “모두 같은 답을 써서 신기해요. 다들 성이 아름답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게 됐어요?” “성교육 시간에 배웠어요!”
알고 보니 학교의 성교육 담당교사가 수업 시간에 “성은 아름답다”고 강조한 것 같았다. 머리와 마음이 동시에 복잡해졌다.
같은 수업을 받은 남학생들은 아무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연상하지 않았다. ‘성은 아름답다’는 메시지가 왜 유독 여학생들에게만 주입되고 강하게 자리 잡았을까? 남학생과 여학생 각각에게 그 메시지는 성에 대한 어떤 가치관과 태도를 갖게 할 것인가? ‘성=임신=아름다움’으로 연결되는 도식이 품은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아동․청소년을 위한, 그들에게 필요한 성교육의 철학이자 방향일까?
사실 이것은 한 학교나 한 교사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부에서 만든 성교육 표준안의 체계와 교수․학습 지도법을 소개한 자료에도 ‘아름다운 성’이라는 교육목표는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2017년 교육부 주최 <학교 성교육 표준안 운용의 실제 직무연수> 자료집 참조) 누구에게, 어떻게, 왜 아름다운가. 성인들에게도 성이 진정 아름다운가?
성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아름답다’에 포함된 내용, ‘아름다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방향이 무엇이냐가 문제이다.
‘네 몸은 소중해’라는 말이 억압이 될 때
많은 성교육 수업에서 몸과 성을 형용사로 추상화하며 ‘보호하라’는 방식으로 선전한다. 소중하다, 귀하다, 아름답다, 아껴라, 지켜라…. 아이들은 언어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아름다움’이라는 수사는 결국 성을 ‘순결’과 연결시키고, 임신 목적 외의 성관계를 더럽고 문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성적 주체로서의 권리를 체화하기 전에 “내 몸은 소중하다”는 구호를 강조하면, 결국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몸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지금껏 ‘아름답다’고 주장한 성이, 사실은 ‘더럽다’는 의미로 작용해 아이들로 하여금 금기와 혐오 바깥에서 ‘성’을 자유롭게 느끼고 상상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아름다움과 더러움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금기와 혐오를 내포하는 성교육은 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모순적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온갖 미디어에서는 아동과 청소년을 노골적인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면서, 정작 현실에서 당사자를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주저앉힘으로써 이들의 성을 통제하고, 아동과 청소년 스스로가 성적 권리에 대해 사유하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질문할 기회를 주는 대신 정답이 ‘있다’고 가르치며 ‘아름다움’ 바깥에 놓인 성적 실천과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전략이 여아와 여성 청소년에게 훨씬 강력한 억압으로 발휘된다는 것이다. 남아의 자위, 남성 청소년의 성적 호기심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당연하게 여기지만 여아의 자위나 여성 청소년의 성적 욕망은 ‘문란하고 헤픈’ 이상행동으로 여기며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소중한 몸, 아름다운 성’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결국 성교육은 그 사회에서 성을 누가 전유하는지와 뗄 수 없다. 한국사회의 성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비(非)성인과 여성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는가? 성교육이 아동․청소년의 인권과 성평등 담론을 적극 도입하고 소화하지 못한다면, 결국 ‘n번방’ 사건처럼 성교육 실패의 참혹한 결과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백 개의 성, 무지갯빛 성을 상상하고 지지하기
얼마 전 성인 대상으로 젠더교육을 하던 중, 한 참가자가 성관계 경험이 있는 청소년들의 성생활을 가리켜 '음지의 성(性)'이라 비유한 적이 있다. 청소년의 성적 욕구를 ‘일탈’로 규정하고 성적 행동과 실천을 하는 청소년을 비난하며 낙인찍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들이 자신의 성을 더욱 혐오하게 숨게 만든다. 사회가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음지’로 밀어 넣는 것이다. 도대체 음지와 양지는 누가 가르는가. 성인은 ‘양지’에서 성을 즐기고 있어서 대한민국에 이렇게 성범죄자와 성구매자가 넘치는 것인가.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개의 성이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존재’는 부정할 수 없으며 바로 곁에 숨 쉬고 있다. 성이 가진 다양성과 성에 대해 서로 다르게 감각하는 경험 세계, 그리고 그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장을 더 많이 접할수록 나는 한 인간으로서 보다 안전하고, 자유롭고, 성장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경험을 어릴 때부터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솔직하고 개방적인 성적 대화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었더라면, 나의 성이 아름답지 않아도 긍정할 수 있었더라면, 나 외에도 아흔아홉 개의 성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배웠더라면- 삶은 무지갯빛처럼 충만하고 있는 그대로 충분했을 것이다. 당신은 다음 세대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들의 무지갯빛 삶을 지지할 준비가 되었는가?
*참고: 글의 맥락에 따라 아이, 아동, 청소년, 비성인 등의 용어를 택해 사용했습니다.
[글쓴이: 달리. 페미니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늘 배우는 사람이었지 가르치는 사람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사는 지방/소도시/농촌 지역의 여성청소년들과 만나면서 청소년 젠더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주제로 전국적인 강의 활동을 하는 중이다. 1년에 1시간짜리 강의로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인생에 1분이라도 성차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 건 중요하다는 순진한 마음으로, 100명 중 1명이라도 눈 마주치며 들으면 대성공이라는 낮은 기대감으로 오늘도 수업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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