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교 밖’에서 소수의 청소년과 성교육을 했다. 학교처럼 의무적으로 듣는 게 아니라 본인이 신청해서 참여한 거라, 나는 이들이 학교의 성교육과 다른 무엇을 기대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성교육 신청 동기를 물었는데, 입을 모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고 싶어서” 신청했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성교육’이 뭘까? 나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하는 강사인가? 성에 관한 교육 활동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나도 성인이 되기 전에 ‘제대로 된 성교육’은커녕 성교육 자체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아, 성교육 비슷한 걸 받아보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어떤 면에서 아동학대와 가스라이팅(gaslighting, 타인을 교묘한 방식으로 통제하여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판단력을 잃게 만들며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에 가까운, 참 무시무시한 수업들이었다.
남학생들의 성희롱, 해결책은 ‘안전벨트’?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2차성징이 시작되면서 가슴이 나오고 초경을 시작하는 친구들이 점점 많아졌다. 누군가 브래지어를 하고 학교에 오면 여자아이들도 속옷 끈이 드러나는 그 아이의 등짝을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사실은 나 생리해’하고 단짝에게 몰래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사이 남자아이들은 우리의 신체적 현상을 신나는 놀잇감으로 삼았다. 복도에서 몰래 다가와 브래지어 끈을 튕겨 친구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엄마 생리대를 가져와 거기에 빨간 칠을 하고 여자아이들에게 던지며 더럽다고 조롱했다.
나는 브래지어나 생리대를 하고 학교에 가는 게 매일 공포스러웠다. 누군가 내 몸을 만지거나 놀릴까 봐 두려워 교실에서 내내 얼어붙어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화내거나 울어도 남자아이들의 ‘장난’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를 지켜보던 담임선생님은 어느날 결심한 듯 여자아이들만 교실에 남기고 남자아이들에게 축구공을 하나 던져주며 운동장으로 내보냈다.
선생님이 그 시간을 ‘성교육’이라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동안 남자아이들에게 당한 일들을 하나하나 말하며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가만히 듣던 선생님은 우리에게, “안전벨트를 꼭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남자아이들은 저 나이 때 짐승과 같아서 너희보다 미개하다, 걔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너희가 평소 안전벨트(브래지어)를 꼭 해라.”
이번에는 우리가 선생님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땐 뭔가 수긍이 가고 납득이 되었던 것 같다. 어렸지만 ‘내가 (남자아이들을) 이해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안전벨트’라는 말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담임선생님은 우리 속옷의 명칭도 차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나 보다. 그래도 왜 하필 운전할 때 생사를 가르는 도구인 안전벨트에 비유했을까. 내 가슴이 그렇게 위험천만한 것인가. 브래지어가 나의 목숨을 지키는 능력을 갖고 있나.
축구를 다 하고 돌아온 남자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에게 “왜 여자애들만 남았냐”,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냐”고 캐물었다. 우리는 약속한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이 ‘짐승’처럼 날뛸수록 여자아이들의 비밀과 은어는 늘어갔다. 우리는 안전벨트 속에 꼭꼭 숨어 있었다.
공포스러운 순결교육과 불순한 순결캔디
아마 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교육’이라 부른 처음이자 마지막 수업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학급마다 과학실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과학실에 갈 때마다 차가운 공기와 알코올 냄새가 어우러져 기분도 절로 서늘해졌는데, 그날따라 까만 암막커튼을 모두 닫아 공포영화 보기에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선생님들이 비디오를 틀어주었다. 알고 보니 ‘낙태’에 관한 영상이었다. 영상이 끝나고 수업에서 뭐라고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영상 내용에 다같이 충격받았고 ‘낙태는 끔찍한 일’, ‘살인’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그것이 조작된 영상임은 십수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수업을 마칠 때쯤 선생님이 박하사탕을 가져와 순결의식을 치르겠다고 했다. 이건 ‘순결캔디’라 오늘 먹으면 결혼할 때까지 성관계를 하지 않기로 맹세해야 한단다. 친구들 몇 명이 앞으로 나가 신성한 것을 떠받들듯 두 손으로 사탕을 받았다. 나는 사탕 받기를 거절했다.
“저는 결혼 전에 성관계를 할 것 같아요. 순결 지키기 싫어요.”
하얀색 속옷, 하얀색 카라, 하얀색 양말, 하얀색 책상보, 하얀색 덧신만 허락되던 그로테스크한 여중과 여고에서 6년을 보낸 나는 순결의 상징이라는 하얀색 사탕을 보고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 순간 갑자기 6학년 때 들었던 말- ‘안전벨트’가 떠오른 건 우연이었을까? 알코올 냄새 때문인지 벨트 때문인지 갑자기 숨이 막혀와 과학실에서 얼른 나가버렸다.
성폭력, 임신 문제에 봉착한 십대여성들과 만나며
대학에서 페미니즘 동아리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나의 성 지식이나 성에 관한 의식 수준은 안전벨트와 순결캔디에서 멈췄을 가능성이 높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처음 ‘성적 주체로서의 나’를 인식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여성의 몸에 관한 정보와 지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남성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깨끗이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몸이 아닌, 권리를 가진 존재이자 존중받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나를 온전히 ‘지키’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났다. 이 열망은 나 홀로 공부하고 실천한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라, 내 주변부터 사회체제까지 긴밀하게 연결하고 영향을 주고받아야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성폭력의 상처, 임신에 대한 고민은 나의 과거를 그대로 찍어놓은 듯한 이야기들이었고 언제고 내 문제로 닥쳐올 일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여전히 끊어지지 않는, 모든 여성의 삶을 관통하며 뒤흔드는 일이었다. 상담자로서, 지역공동체의 동료 시민으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누구에게도 성에 관한 고민을 나눌 수 없는 십대를 똑같이 보낸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지금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들과 같은 십대여성이던 시절의 나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했을까. 지금의 이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게 뭘까. 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 결국, ‘제대로 된 성교육.’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고, 얼마 뒤 성폭력 예방교육 강사 양성과정에 등록했다.
‘제대로 된 성교육’이 가능한 사회입니까?
사실 뭐가 ‘제대로 된 성교육’이냐고 물으면, 한 마디로 딱 부러지게 답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제대로 (교육)하고 있는 거 맞나’ 의심할 때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성교육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에게 자주 묻는다. 뭘 배우고 싶냐고, 뭐가 궁금하거나 알고 싶냐고, 다른 교육에서 뭐가 부족했냐고, 이 공부가 왜 필요하냐고. 그들에게 들으면 나도 배운다. 아 요즘 그런 것에 관심이 있구나, 이런 건 지겹다고 느끼는구나, 이런 방식은 흥미를 느끼는구나, 저건 어려워하는구나, 앞으로 이렇게 하면 좋겠구나….
‘제대로’ 교육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려면 먼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묻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십대로 돌아가 성교육을 받는다면, 나는 성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갖춘 선생님을 만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부끄러운 이야기도 편견 없이 들어주고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선생님, 어설픈 질문을 해도 지혜롭게 답해줄 수 있는 선생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지해주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정보는 인터넷에도 널려 있다. 교육 현장이 필요한 이유는 정보검색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삶의 지식과 지혜를 나누고 만들며 함께 체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이다.
글의 서두에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고 싶어서” 수업에 참여한 청소년들은 그날 성교육을 마치고 소감을 묻자, 가장 좋았던 점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을 꼽았다. 타인의 경험, 입장, 생각, 감정을 들으며 나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저절로 배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앎은 성에 통달한 강사가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신뢰가 있는 집단에서의 역동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된 성교육’의 정의나 형태가 아니라, 조건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스럽다. 안전벨트와 순결캔디의 성교육은 정말 구시대로 물러났는가? 여성의 가슴과 임신중단을 죄악시하는 사회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은 가능할 것인가? 이에 맞서 싸우는 성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십대여성을 비롯한 모두가 ‘제대로 된 세상’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달리. 페미니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늘 배우는 사람이었지 가르치는 사람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사는 지방/소도시/농촌 지역의 여성청소년들과 만나면서 청소년 젠더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주제로 전국적인 강의 활동을 하는 중이다. 1년에 1시간짜리 강의로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인생에 1분이라도 성차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 건 중요하다는 순진한 마음으로, 100명 중 1명이라도 눈 마주치며 들으면 대성공이라는 낮은 기대감으로 오늘도 수업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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