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낙태죄’ 대체 입법 시한인 12월 31일을 고작 두 달 남긴 상황에서 ‘낙태죄’ 관련 입법개선절차 및 개정안 등을 담은 내용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개정안은 ‘각계의 내용을 수렴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끌어낸 여성계를 비롯하여, 전문가 그룹과 시민사회는 임신중단 비범죄화와 재생산권 보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했고 구체적인 의견을 개진했음에도 그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의 형법ㆍ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사실상 ‘낙태죄’를 존속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14주 이내 허용’ 등의 내용은 실제 여성들의 경험이 반영되지 않은 탁상공론이며 세계적인 흐름과도 동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사회적 보호와 의료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건강형평성연구센터장은 먼저, 정확한 임신 기간 판별이 가능하지도 않은데 ‘14주 이내에 임신중지 가능’이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지적했다.
또한 “인간 여성은 단성 생식으로 출산할 수 있는가? 임신을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여성에게만 죄를 묻는지, 그리고 처벌이 정말 임신중지를 예방할 수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희 센터장은 많은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서 “정말 필요한 건 처벌이 아니라, 왜 이런 상황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의학적 처방”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안전한 임신중지가 필수의료로, 이에 대한 지침이 있다. 코로나 시대로 접어든 이후에도 세계보건기구(WHO)에선 임신중지를 팬데믹 상황에서도 유지되어야 할 필수 서비스로 지정하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의사의 진료 거부권이 미칠 영향 우려돼
또한 개정안에서 포함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임신중지의 경우, 모자보건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상담 후 24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이른바 숙려기간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여성건강과 사회경제적 필요에 대한 상담과 지원은 필요하지만, 이것이 필수 전제조건이 되면 오히려 이용장벽이 된다”는 거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지침 또한 일단 여성이 임신중지를 결정하면 가급적 신속하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세계산부인과학회 등도 임신중지에 선행하는 강제 상담과 숙려기간은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사의 진료 거부권도 큰 문제다. “임신중지 서비스가 산부인과 의사에 의해 독점적으로 제공되는 상황”인데, 의사에게 진료 거부권을 주는 건 여성들의 의료 서비스 접근성에 상당한 제한과 압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임신중지와 재생산 권리는 ‘기본권’으로 보장해야
‘낙태죄’ 헌법소원 공동대리인단이었던 류민희 변호사는 “이 개정안을 지적하기 위해 시간을 쓰고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회적 비용을 낭비하는 일”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지난 10년간 국제사회는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며 류 변호사는 이번 개정안이 여전히 임신중지를 죄로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특수한 의료’로 보는 관점을 유지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각은 “임신중지에 대한 낙인을 강화”하며, 그런 낙인화는 결국 “여성의 건강권, 생명권 침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류민희 변호사는 또 일부 시민들이 우려하는 ‘무분별한 낙태’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국제보건기구나 산부인과학회에서 완전 비범죄화가 임신중지를 증가시키지 않고, 모성건강을 증진한다는 자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낙태죄’ 관련 법을 개정한 외국 사례를 살펴보면 “‘현대법’은 범죄화를 기본값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류 변호사는 “사실 법 개정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해외법에도 ‘낙태죄’와 관련된 부분들이 남아 있긴 하다. 그렇다고 그걸 참고한다는 건 잘못된 것이다. 가장 현대적인 법을 참고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 개정안이 어떤 입법례들을 참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측해 보건대 ‘현대법’이 아닌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제 임신중지 및 재생산권에 대한 권리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수준이 아니라, 여성 평등권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며 류민희 변호사는 “예전에는 임신중지가 여성 건강권, 의료 서비스의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었지만, 이젠 필수적인 기본권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즉, “필수적 의료에 대한 범죄화는 평등권 위반”이라는 분석이다.
해외입법례들, 임신중단에 대한 규제와 제한 없애는 중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임신한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해외의 다양한 입법례들도 있음에도, 정부의 현 개정안은 그런 사례 대신 ‘통제’의 입법례들을 여기저기에서 긁어 모은 결과, 임신중단권 보장보다 어떻게 임신중단을 막을 것인지에 고심하는 법안이 만들어졌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런 규제 법안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이 밝혀진 상황이다. “개정안 마련에서 온갖 규제의 모델이 된 외국 입법례들도,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뒤 거의 적용되지 않거나, 의료 현장에서 넓게 해석되는 관행이 정착되었거나, 임신중단권을 보장하라는 거센 저항에 부딪혀 개정을 준비하는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임신중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법안들을 더 잘 살펴 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캐나다의 경우 “1988년 대법원이 낙태죄가 여성의 생명, 자유, 안전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선언”한 이후 “임신중단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없는 상황”이다.
그 사회에서도 “판결 직후엔 임신중지를 처벌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을지, 임신중단이 ‘남용’되지 않을 지에 대한 불안이 존재”했다. 하지만 “인공임신중절 건수는 비슷하게 유지되다가 최근 더욱 감소하였고, 임신 20주 이후의 비율은 0.75%도 되지 않으며(2017년 기준), 당연하게도 후기의 임신중단은 ‘무책임한 연기’가 아니라 불가피한 사유에 의한 사례들이다. 주수 제한이 없어도 대부분의 인공임신중절은 임신 초기에 이루어진다”는 점이 데이터로 드러났다.
현재 캐나다에서 “임신중단은 온전히 의료적인 문제이며, 임신중단을 제한하는 절차는 없는 상황”이다.
또한 “상담은 어디까지나 임신한 사람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서비스”이며, “의사의 진료거부권은 법률이 아니라 의사단체에서 정한 원칙이고 다른 의사에게 ‘실질적인 연계’를 명확히 해야 하는 점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 한국 정부의 개정안과 확연히 다르다.
김 부연구위원은 “캐나다만이 이런 법안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며, 최근엔 “각국에서 낙태죄를 폐지하거나 임신중단이 허용되는 기간을 늘리거나, 상담의무, 강제대기, 의사의 설명 의무 등등의 절차적 요건을 삭제하는 개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프랑스의 경우, 상담의무와 의무적 대기 기간이 있었지만 실효성이 없고 임신중단에 어려움을 야기한다는 이유에서 순차적으로 폐지한 바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재생산건강보호법(Reproductive Health Protection Act)은 7월부터 시행 중인데, 구법의 24시간의 강제 대기 기간, 주 정부 기반의 상담의무, 여성의 서면동의 의무, 임신중단 클리닉 제한, 초음파 의무 등을 폐지한 것이다.”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또한 “국제인권기구가 임신중단을 이유로 한 ‘처벌’이 임신중단의 위험성을 높여 건강권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폐지돼야 한다고 명확히 요구한다”는 점도 참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개정안엔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가 없다!
정부 개정안에서 특히 문제인 건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가장 밀접한 이슈이자 여성이 가장 중요한 당사자”임에도 그들의 목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낙태죄 폐지’를 수없이 외쳤던 여성들의 목소리, 다양한 경험들이 무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개정안을 마주하게 되어 “모욕적”이라고 말한 류민희 변호사의 표현처럼 분노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국회와 정부는 여성의 임신중단과 재생산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법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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