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과 ‘모두를 위한 도시’가 필요해

<주거의 재구성>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가

임경지 | 기사입력 2020/10/30 [16:12]

‘자기만의 방’과 ‘모두를 위한 도시’가 필요해

<주거의 재구성>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가

임경지 | 입력 : 2020/10/30 [16:12]

*편집자 주: 다양한 시각으로 ‘주거’의 문제를 조명하는 <주거의 재구성>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아름다웠던 내 금붕어의 집, 어항을 깨고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려동물은 금붕어다. 시작은 영화 <쉬리>(강제규 감독, 1999)였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밀레미엄에 앞서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를 마주했다. 전국적인 금 모으기와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 운동으로 정신적인 사기를 높였다 해도, 경제 성장에 활력을 불어 넣을만한 새로운 아이템은 없었다. 그러던 중 분단을 소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가 개봉했고, 국내에서는 헐리우드 대표 블록버스터 <타이타닉>을 뛰어넘을 만큼 큰 흥행을 거두었다.

 

영화 <쉬리>에는 관상용 민물고기인 ‘키싱구라미’가 등장한다. 사랑하지만 분단으로 인해 서로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 두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이 야속하다는 듯이 입을 맞추고 있는 키싱구라미 역시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수족관들은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63빌딩 수족관에서는 평창강에 서식하는 쉬리를 3개월마다 일이백 마리씩 공급받아 계속 전시할 정도였다.

 

11살의 나 역시 이 열기에 휩쓸려 부모님을 이끌고 수족관에 갔다. 두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어항을 사서 두 마리를 키우다가 점점 더 넓은 집으로 옮겨줬다. 집이 넓어지니 채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어항이라면 빠지면 안 될 물레방아, 인공 수초, 조개껍질을 갖췄다. 모래와 자갈도 깔아 튼튼하게 기초 공사도 마쳤다. 애지중지하던 황금돼지 저금통을 깨 가며 금붕어 두 마리의 집을 꾸몄다. 내 방보다 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더 공들여 관리했다.

 

어항이 아름다워질수록, 금붕어 두 마리만 살기엔 적적해 보였다. 남은 돈을 긁어모아 수족관으로 달려갔다. 우선 한 마리를 더 입양했다. 그래도 여전히 집이 너무 컸다. 사장님의 추천을 받아 무려 열 마리를 더 데려왔다. 입양해 온 아이들이 새로운 집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포장해 온 상태 그대로 물 위에 띄워놨다. 한 시간 정도 후에 풀어줄 참이었다. 아침부터 흥분한 채로 어항을 닦고 금붕어를 집까지 데리고 오느라 온 기운을 다 빼서인지 낮잠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 잤을까.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어항으로 달려갔는데 금붕어 열 마리 중 절반 이상이 배가 뒤집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물의 파동에만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엄청난 충격과 자책으로 다시는 금붕어를 키우지 않았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수족관 사장님께 가져다드렸다. 내가 낮잠을 자지 않고 한 시간 딱 맞춰서 새로운 친구들을 어항에 잘 풀어주었다면, 금붕어들은 아름다운 집에서 유려하게 헤엄치며 잘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과 서러움이 물밑 듯이 밀려왔던 탓이고, 죽음을 목격한 이후 다시는 그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안심’ 주택과 서비스에 대한 의문

 

이따금 ‘여성안심’을 내세우는 각종 정책을 볼 때마다 나의 아름다웠던 처음이자 마지막 반려동물의 집인 어항이 생각난다. 내가 허락한 한정된 공간인 어항에서의 유려한 헤엄과 안락한 생활이 금붕어에게 정말로 좋은 삶이었겠느냐는 생각과 함께.

 

▲ 여성 안심 귀가 서비스 웹 홍보물. (출처: 정부 정책정보지 위클리공감 2015-07-25) https://koreablog.korea.kr/698

 

현재 중앙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다양한 여성 안심 정책을 펴고 있다. 다양한 수단과 종류가 있는데,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귀갓길에 발생하는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서비스다. 안전 취약지역을 경찰이 집중적으로 순찰하거나, 여성이 신청할 경우 노란 조끼를 입은 스카우트(대부분 중년 여성)가 지하철역 또는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집 앞까지 동행한다.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기법을 적용해 거리환경을 개선하는 사업도 여기에 해당한다. 여성 안심귀가스카우트, 여성 안심 귀가 서비스 등의 이름으로 안전한 귀가 지원을 목표로 한다.

 

둘째, 주택 방범 기능을 강화하는 지원 사업이다. 현관문 보조키, 방범창, 문열림 센서, 창문 잠금장치, 휴대용 비상벨 설치를 지원한다. 주택 내의 사설 경비회사와 연계해 CCTV를 설치하거나 긴급 호출 벨을 통해 경찰 또는 경비회사가 출동하는 서비스를 도입하는 곳도 있다. 무인택배함과 같이 주택 내에서 범죄가 발생할 수 있는 대면 접촉의 기회를 절대적으로 감소시키는 사업도 포함된다.

 

셋째, 여성안심주택의 보급이다. 여성들만 거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으로 앞서 언급한 첫째, 둘째 사례 시설이 접목되어 있다. 일정 소득과 자산을 기준으로 선발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정책의 필요성을 인지하면서도, 그 한계와 문제점도 명확하게 보인다. 여성 안심 귀가 지원 사업은 경찰에 의한 순찰이든, 신청에 의한 시민과의 동행이든 ‘여성의 몸은 도시에서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호를 여성에게는 물론 전 사회에 지속해서 발신한다. 여성이 안전하게 귀가하기 위해서는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 성차별적 시선을 바로잡는 것이 먼저이고, 사회가 이런 성차별적 시선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여성 폭력을 정확하게 처벌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여성 안심 귀가 지원 사업은 문제 해결의 주체를 다시 여성과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인 중년 여성에게 전가하고 있다. 젊은 여성의 몸과 중년 여성의 몸을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가르고 위계를 형성한다. 만약 이것이 가부장적 시선의 위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가 집으로 돌아갈 때도 이들을 지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테니 스카우트의 스카우트, 스카우트의 스카우트의 스카우트가 필요하다.

 

인간이 자기 몸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기 몸을 향한 위험과 폭력에 노출된 사회에서 혼자 해결하고 혼자 맞서야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의 국가나 정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국가는 개인이 폭력 앞에 노출되지 않도록 지킬 의무와 책임이 있다. 따라서 여성 안심 귀가 지원 사업은 의식적으로 더 강력하게 도시계획과 치안의 영역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스토킹 범죄, 강간 미수 범죄를 ‘주거침입’이라는 한정된 틀 안에서 가볍게 다뤄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인들의 사적인 문제로 치부했고, 여성국민의 안전 앞에서 법과 제도는 공백 상태에 놓인 것과 마찬가지 역할을 해왔다.

 

주택의 방범 기능과 여성 호신 기능을 강화하는 각종 물품은 심리적인 안정에 이바지할 수는 있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성전용주택과 상관없이 모든 시민의 안전을 위해 설치해야 하는 요소들이다. 현관문 보조키, 방범창, 문열림 센서, 창문 잠금장치는 집을 지을 때 외부인의 침입을 대비해 사전에 설치 또는 갖춰야 하는 요소들이다. 이는 정부가 신청을 받아 지원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주택건축법에 따라시 정부의 관리·감독 아래에서 허가 또는 승인의 방식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일이다.

 

▲ 서울 천왕여성안심주택 개념도. (출처: 서울시 보도자료. 2014-10-31)

 

민법 제623조에 따르면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에게 인도하고 계약 존속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 사용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상태는 외부의 물리적인 위협으로부터 차단되는 것이다. 이는 원시시대 인류가 집을 만들어 온 역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장애인, 아동, 노인 등 누가 어떤 집에 살더라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비단 여성에게 경비 기능이 강화된 물품을 지원하는 것은 허울뿐인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료 지원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물론 누구라도 집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도록, 건축법과 주택법에 기준을 명시하고 이를 정부가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국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법과 정책으로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지, 여성들의 신청을 받아 각종 설비와 물품을 보급, 마치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은 아니다. 어떤 주택에 살든, 여성들이 안전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여성 공간이 주는 해방감과 가능성

 

나는 여성 공간이 주는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였고, 여성 공간에서 익힌 감각 덕분에 삶을 확장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지금의 여성안심주택이 여성들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줄까 질문하게 된다.

 

몸이 기억하는 내 최초의 여성 공간은 대학 시절 여학생 휴게실(이하 여휴)이다. 남녀공학 대학에서 겪은 성차별 속에서 여휴는 숨 쉴 수 있는 작은 방과도 같았다. 실제로도 정말 작은 공간이었는데 여휴에서 늘어지게 침 흘리며 잠도 자보고, 총여학생회 언니들이 붙여놓은 소식지와 비치해 둔 잡지들을 읽으며 자유를 만끽했고, 가라앉아있던 내 몸을 점차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여성 공간이 준 자율과 충전의 힘으로 나는 단과대 건물 앞 벤치에서, 학생회관 앞 계단으로, 그리고 학교 밖 광장으로 점점 더 공간을 누비는 존재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 공간에서 나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여휴나 여성안심주택 같은 여성 공간은 이미 역사적으로 오래된 원형이 존재한다. 1960년대 영국에서는 가정폭력을 겪는 여성들의 임시 거처인 ‘쉼터’를 마련했고, 이곳은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안전을 보장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영국의 일부 지방정부에서 시행된, 특정 시간대에 여성에게만 개방된 수영장, 도서관은 여성이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문화, 여가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여성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의 역할을 여성 공간이 해왔다는 것을 말하며, 공적 영역과 공적 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이루고 가부장적인 규범과 제도에 맞서는 실천을 이어갔음을 의미한다.

 

이런 여성 공간의 확보는 모든 층위에서 여성들의 대표성을 증가시키는 노력으로 이어져서, 일부 성인지적 도시 정책과 도시 계획을 만들어내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여성 스스로 권한을 획득하며 자신감과 자격, 역량을 회복하고 갖추는 경험과 기회의 토대로 여성 공간이 존재한다.

 

밤길 되찾기, 슬럿위크, 거울 행진…언제 어디서든 안전할 권리

 

현대의 여성들은 여성 공간을 더 확장시키는 움직임을 벌여왔다. 공간을 한정하지 않고, 집 밖으로 향했다.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로 처음 시작된 ‘달빛시위’는 여성들이 밤길을 되찾는 시위였고 3년간 계속되었으며, 1999년부터 부산 지역 반성폭력 단체에서도 진행됐다. 그리고 2004년 유영철 연쇄살인사건과 여성에게 범죄 책임을 전가하는 언론 보도 등을 계기로, “달빛 아래 여성들, 밤길을 되찾다”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걸고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시 이어졌다.

 

▲ 2004년 8월 13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달빛시위 모습. 참가자들은 성폭력, 여성살인 범죄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지 말라고 외치며 빼앗긴 밤길을 되찾겠다고 외쳤다.  ©일다

 

공포와 통제에 저항하며 밤길에 나서서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한 여성들의 걸음은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잡년행진(#Slutwalk, 캐나다에서 경찰이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Slut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발언한 것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집회로, 한국에서는 2011년 고려대 의대생 집단 성추행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의 밤길 행진이 계속됐다. 잡년행진은 여성들 스스로 자신을 ‘잡년’으로 지칭하며 ‘야한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이는 여성에게 끊임없이 ‘여성다움’을 강요하고 여성의 몸을 규율하는 사회적인 관습과 제도를 우습게 만드는 행위였다.

 

무엇보다 이러한 여성들의 행진은 사회적인 실천이다. 첫째, 밤이라는 특정한 시간대에, 거리와 광장이라는 공공 공간의 규범을 탈피하는 전복과 교란의 행위로 공사 이분법을 흐트러뜨리고 둘째, 여성에게 발생하는 폭력과 폭력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피해자다움’에 맞서 싸우며 셋째, 여성이 더 많은 거리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도시권 운동으로 나아간다.

 

2016년 5월 26일 밤 8시 30분에는 강남역 일대에서 ‘거울 행진’이 일어났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피해자를 애도하고 여성폭력에 분노하는 자리였다. 여성들은 “당신도 여성혐오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라는 피켓을 들고 나섰다. 포스트잇으로 가득 채운 강남역 10번 출구와 온, 오프라인 할 것 없이 이어지는 추모행렬 속에서 여성들은 함께 불안과 분노를 나눴다. 공포가 우리를 압도하지 않기를, 폭력에 소리 없이 희생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강력한 대처를 요구했다.

 

2017년 2월 1일 트위터에서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라는 태그운동이 일어났다. 여성들은 자신의 주거공간에서 겪는 공포의 실제 경험을 드러냈고, 많은 여성들이 같은 패턴과 유형의 사건과 범죄를 겪고 있음을 공유했다. 동시에 여성들이 겪는 공포와 불안 아래는 이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 가부장적인 시선과 문화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확인하고 고발하는 목소리였다. 가장 자유로우리라 생각했던 나만의 공간에서조차 남성의 구두를 놓거나, 남성 이름으로 택배를 받는 등의 방법을 쓰고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이는 곧 공간 자체가 젠더화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성들을 위한, 또는 여성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 정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젠더화된 공간이 깨지는 걸 경험하고, 내가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낀 순간이 있다. 2014년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다. 이름처럼 행진을 하고 싶지만, 행진이 꽉 막혔던 2014년의 신촌의 대치 상황을 김현철은 이렇게 기록한다. “퀴어를 공적 논의에서 배제하고 퀴어의 존재를 예외적으로 묵인함으로써 퀴어가 영역화된 공간에만 존재한, 공적인 장소에만 존재하는 역설을 낳았다.”(책 『공공공간을 위하여』 중. 서울대학교 SSK동아시아도시연구단 기획, 동녘, 2017)

 

▲ 2014년 서울퀴어문화축제 신촌 퍼레이드 행렬.  ©서울퀴어문화축제 SQCF https://sqcf.org/photo

 

‘차 없는 거리’를 4시간 가까이 점유하고 신촌 거리를 끝내 행진하고 돌아오는 내내 참가자들 사이에 각종 패러디와 유희가 발생한 것을 두고, 김현철은 ‘공간의 퀴어링’이라고 칭했다. 공간의 퀴어링으로 성별의 식별이 무의미해져 가고, 그로 인해 설명과 증명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또 다르게 모두가 안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우리를 더 안전하게 하는 것은 여성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보호하는 방식의 정책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퀴어링하는 방향의 정책이 아닐까.

 

도시가 안전해야 주거도 안전하다

 

그런데, 지금의 여성안심주택은 CCTV, 무인택배함, 경비 시스템 등 보호와 통제의 기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의 차단이라는 특정 요구를 충족시킬 뿐이다. 여성들을 험난한 도시 생활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강화할 뿐이며, 가부장적이고 온정주의적인 남성중심적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봉책이다.

 

여성안심주택의 발전적 목표는 지금과 똑같은 형태로 더 많은 CCTV, 더 자주 돌아다니는 순찰차, 더 커진 무인택배함이 아니라, 여성이 더 많은 곳에, 더 다양한 곳에, 언제 어디로 갈 수 있는 주거 정책과 도시정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탈학교, 탈가정 청소년이 걱정 없이 자립할 수 있는 주택, 노인에게 낙상 위험이 없는 주택, 장애인이 의료 지원을 요청했을 때 즉각 실행할 수 있는 주택, 그리고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분리되어 섬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존재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지점이다.

 

▲ 우리에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고, 그 방을 나섰을 때에도 안전한 마을이 필요하다. (일러스트: studio 장춘)

 

집이란 복잡하다. 무엇보다 부동산은 움직일 수가 없고 집값은 보통 비싼 게 아니라 무겁고 무섭게 다가온다. 또한, 가사노동과 가정폭력 등 여성을 억압하는 핵심적인 곳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는 곳이자 나를 온전히 소속시켜주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서워만 할 수도, 어려워만 할 수도 없다. 여성들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며 도시를 뒤흔들어왔던 것처럼, 노동과 주거의 분리를 해체하고 가족을 다시 고민하는 유토피아적 실험을 통해 우리는 더 많은 집과 더 넓은 도시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근래 들어 토해낸 우리의 요구들이 구체적인 대안이 되는 사회적인 실천에 주목할 때다. 이러한 점에서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facebook.com/gddhouse), 도서 <셋이서 집짓고 삽니다만>(우엉, 부추, 돌김 지음), ‘위스테이 별내 사회적협동조합’(westaynamb.net)은 아슬아슬하게 제도의 경계 위에서 제도를 교란하면서도 확장해 더 많은 사람이 시민권을 보장받는 활동을 하고 있다. 시대적, 장소적, 계급적 맥락에서 다양하게 가족과 주거의 의미를 출현시키는 이들의 삶을 응원하고 기대한다.

 

이들을 비롯해 현실에서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기만의 방’과 ‘모두를 위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벨 훅스의 30년 전 글이 떠오른다. 그는 가난과 억압에서 벗어나 멀리 떠나는 것이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때로 가정이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극도의 소외와 소원함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집은 더이상 단순히 하나의 장소가 아니다. 집은 수많은 곳에 있다. 가정은 다양하고도 계속 변화하는 시각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촉진시키는 장소이자 우리가 현실을 보는 새로운 방식, 즉 차이의 개척지를 발견하는 장소다.”(벨 훅스 「집: 저항의 장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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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0/11/08 [10:22] 수정 | 삭제
  • 댓글보다 빵터지네. 남녀가 다른 종족이라고 구분하면서 남녀 구분하지 말라고 하는 저 모순이 한남 종특임. ㅋㅋ 뭘 어쩌긴 어째. 성폭력 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어.
  • 어쩌라고 2020/11/07 [16:02] 수정 | 삭제
  •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그냥 남성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되는건가? 시대가 바뀌고 있는데. 받아들일 자세는 안되어있고. 실제 피해보지도 않은 일부를 일반적 일로 모두가 그런냥 기정사실화 시키고... 과거의 가부장적 시대의 과오를 지금도 그때마냥 지속되고있는것 처럼 기사화시키는게.. 본인들의 현실은 생각치 아니하고 그저 너때문이야. 라 외치면.. 뭐.. 이리해줘도 이렇고 저리해줘도 저런데.. 도대체 뭐머.. 어쩌란말인가? 진짜 그냥 한남이라 일컫는 이세상 남자인간들은 다 사라지는게 답인가? 결국 본인들을 위해 만든 CCTV도 감시의 역할이라 말하면.. 이세사의 모든 만물이 양면성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어떤방법으로든 본인 위주로만 바라보니. 과연 무엇이 마음에 들까..
    도대체 어찌해주랴.. 그냥 대놓고 남자는 이세상에서 사라져라!! 라고 솔직히 외쳐보라. 남과 여가 태생부터 다른존재거늘. 다른점을 이해하진 못하고 무조건적인 짐승취급한다면 그 짐승마저 잃어버리고 혼자만 남을테니. 제발 서로 다름부터 인정하고 이해하려 해보길 바란다. 다만 도대체 어쩌란말인가를 계속해서 되묻고시프다!!
    무엇보다!!! 일부 범죄의 사실로 일반화를 시키는 오류는 이제제발 그만좀 했으면 한다.
    세상은 짐승과 버러지만도 못한 자기 거시기하나 관리못하는 좀비놈은 그 놈이 좀비지 대부분의 남자는 이성을 갖고 잘못된것이 무엇인지 구분가능한 일반 사람종족이다.
    어떤분야건 범죄의 사실을 일반화하는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본인스스로 그 누구보다 이미 알고있을터..
    누가봐도 다른종족인 남과여를 지금 굳이 구분하여 과정의 공정이 아닌 결과의 평등을 외치는 이들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 동감 2020/11/01 [16:23] 수정 | 삭제
  • 얼마전에도 인근 오피스텔에서 성범죄가 일어나서 너무 무서웠습니다. 여성안심 주택들이 몇 곳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비롯해 대다수가 다른 곳에 사는데... 누구를 안심시키는 건지 모르겠네요. 안전하다고 믿을만한 관계망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람아 2020/11/01 [13:34] 수정 | 삭제
  • 실상 여성 대상 주거 정책들 중 상당수는 여성뿐만 아니라 소수자나 취약계층 포함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정책인 경우가 대다수이지 않을까 싶어요. 유니버설 디자인이 노인을 위한 디자인이라기보다 누구든 편리해지는 디자인인 것처럼요. 좀더 많은 정책이 예산 효율성을 핑계로 혹은 대상 선심성이 아닌 구분짓지 않는 사회를 지향했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그러려면 행정부나 입법부의 부서 및 위원회 칸막이부터 제거되어야 하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