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바네사: “직접 만든 플랫폼이기 때문에 내 고유한 톤을 자유롭게 낼 수 있다는 점이 즐거워요. 어떠한 규칙도 없고요. 주류 언론사에서 일할 때는 특정 사안에 대한 톤이 제한적이죠. 가령 인종차별 이슈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슬프거나 격분한 톤으로 글을 써야 합니다. 그 외에는 허용이 안 되죠. 반면 <라이스 앤 샤인>에서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사려 깊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종차별에 대한 내 태도가 그래요. 때로는 너무 말도 안되게 우스꽝스러워서 차별을 겪고도 웃어버릴 때도 있죠. 공동진행자인 민 투 트란과 나는 둘 다 기자니까 다루고 싶은 이슈가 있으면 기사를 써서 내보낼 수 있지만, 팟캐스트를 계속하는 건 ‘표현에 자유’가 더 보장되기 때문이에요.
애초에 <라이스 앤 샤인> 기획이나 거기서 다루는 소재들이 백인 동료들과 일할 때는 떠오르질 않아요. 우리 둘이 함께하는 게 일종의 ‘안전한 공간’(safe space)인 셈이죠. 9명의 백인 동료들 사이에서 회의를 하고 있으면 베트남 관련 주제가 나와도 내 머릿속에 지배적인 생각은 ‘설명을 잘 해서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거든요. 팟캐스트에서는 그런 설명에 대한 조급함, 강박관념이 전혀 없어요. 서로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이 비슷하니까 ‘그럼 이 얘기를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이지?’하는 고민을 할 수 있게 되죠. 그리고 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주제도 떠올라요. 베트남계 독일인, 베트남 디아스포라(이주민)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과 작업할 때와는 전혀 다른 깊이와 시너지가 나옵니다.”
하리타: “청취자들에게서 받는 피드백은 어떤가요? 온라인 미디어 상(Grimme Online Award)에서 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런 업계의 인정보다는 베트남계 독일인들의 좀 더 사적인 피드백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바네사: “이메일이나 인스타그램 디엠(DM)으로 다양한 독자 피드백을 받고 있습니다. 12살 아이가 자신의 롤모델이 되어 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우리는 자랄 때 그런 롤모델이 없어서 외롭기만 했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덜 외롭게 한다는 것이요. 나이든 청취자 분들이 자기들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사람이 이제야 나타났다고 할 때도 감격스러워요. 이민 1세대 어머니들이나 은퇴한 노인들이 자식 뻘이고 2세대인 우리에게 ‘당시엔 엄격한 부모 노릇 하느라 이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덕분에 이제라도 돌아본다. 당시 내가 잘못한 것 같지만 그때는 최선이었다’는 말씀도 하시죠.
또 하나 주요한 피드백은 우리 팟캐스트가 청취자들 개인사로 이어진다는 것이에요. 끝없이 길고 긴 메일을 받아서 읽어보면 굉장히 개인적인 사연들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그런 얘기를 처음으로 털어놓는지도 몰라요. 형제자매, 부모, 부부 간에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서 묻어둔 전쟁 경험이나 이민사를 같이 나누게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잃어버렸던 언어를 되찾아준 거예요.”
바네사: “맞아요. 그래서 우리는 팟캐스트 녹음 시 최대한 독일어로 얘기하려고 합니다. 정치적인 개념이나 문화적 용어들의 경우에 사실 영어를 쓰는 게 편한데 말이죠. 그런 논의가 훨씬 활발한 미국의 담론이나, 동남아시아 이주민 커뮤니티를 많이 참조하기 때문이에요. 교육수준이 높고 해외경험이 있는 우리 둘은 영어를 유창하게 쓰지만, 사실 대다수 독일인들은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 못하죠. 엘리트주의를 경계하고, 더 넓은 독자층을 염두에 두면서 영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있습니다.”
하리타: “독일어뿐 아니라 영어, 불어, 베트남어에 유창한 것으로 알아요. 그런데 나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각각의 언어와 맺는 관계가 좀 다르지 않나요? 심지어 무슨 언어로 말하느냐에 따라 사고방식이나 성향이 달라지더라고요.”
바네사: “정말 그래요. 감정을 표현할 때는 사실 영어가 가장 편하죠. 베트남어로는 거의 불가능해요. 가족들과 속내를 드러내는 대화를 안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랄 때 집밖에서 항상 독일어를 썼지만 마음을 표현할 사람은 없었어요. 책은 많이 읽었지만 친구는 별로 없었죠. 독일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건 어디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독일어는 주로 타인을 이해하고, 묘사하고, 설명하는데 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 영어 콘텐츠, 책이나 소셜미디어, 영화를 보면서 충족했죠. 특히 사춘기 때 섹슈얼리티를 알아가고 누군가와 썸을 타는 것도 영어로 표현했어요. 독일어에는 그런 언어 자체가 많지 않고, 독일인들은 아직도 그런데 서툴죠.”
하리타: “독일 청년들이 영미권 문화 콘텐츠를 많이 소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감정적 사회화에 그렇게까지 큰 역할을 하는지는 몰랐네요.”
바네사: “독일에는 원래 ‘데이트’란 개념도 별로 없어요. 젊은 사람들이 헐리웃 영화 같은 데서 보고 비슷하게 흉내를 낸다면 모를까. 틴더(Tinder) 같은 데이팅 앱도 외국인들이 많이 쓰니까, 결국 거기서도 영어를 쓰게 되죠.”
프랑스 식민정부에서 관료로 일했던 아버지는 공산당 집권 후 극단적인 궁핍으로 내몰린다. 하루살이 고된 노동만 끝없이 펼쳐진 미래를 바꾸고자, 난민이 되어 아내와 함께 독일로 들어간다. 망명 인정을 받기까지 아버지가 관료와 변호사들에게 거듭한 호소가 에세이 곳곳에 깨진 유리조각처럼 박혀있다. 간헐적인 추방 명령과 법원 출석 사이에서 어머니는 식당 웨이트리스로 나가고 아버지는 도축장에서 일했다.
이민법이 개정되자 아버지의 낡은 베트남 여권에 처음으로 체류증 스티커가 붙는다. 부모님은 아시안 식당(Asian Imbiss)을 열고, 바네사는 학교에서 ‘칭챙총’이나 ‘정글로 돌아가’라는 놀림을 견디며 시간이 흐른다. 백인 어른들은 모국을 자랑스러워하라고 하지만 바네사에게 베트남은 부모님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서운 곳일 뿐. 바네사는 다른 애들처럼 되지 못할 바에 아예 안 보이는 존재가 되고 싶어 숨을 죽였다. ‘반’이라는 베트남 이름 대신 ‘바네사’라 스스로를 소개하고 입을 다물었다.
독일어 공부에 집착한 끝에 문법교실에서 파란 눈 독일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었다. 17살에 시민권을 신청하면서 공식적으로 ‘바네사’가 되었다. 누구도 발음을 되묻지 않는 ‘제대로 된 이름’.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도 일하고 아이들을 빈틈없이 씻기고, 도서관에선 글자가 빽빽한 책들만 빌려왔다. 외국인은 게으르다, 멍청하다, 더럽다는 말을 들을까 봐. 바네사는 ‘야망이나 성실함, 인내는 성공을 위한 목표가 아니었다’고 썼다. 그건 ‘여권에 체류허가 스티커를 받기 위해 필요한 생존, 실존의 자세’였다.
*영문 번역 기사 <망명 이야기: 강제 송환의 그늘에서 자란다는 것> 링크: https://www.zeit.de/zeit-magazin/leben/2017-12/asylum-stories-germany-deportation-freedom-vietnam-english
하리타: “<망명신청자: 나의 쓰레기 컨테이너 어린 시절> 에세이로 기자로서 평생 한번 받을까 말까 한 테오로드 볼프상을 커리어를 막 시작한 20대 중반에 받았죠. 이례적인 일인데, 험난했던 어린 시절 체험, ‘개인적 서사’가 사회적으로 중대한 ‘난민 서사’와 맞물리는 지점을 진솔하고 용기 있게 풀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이 기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뒷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바네사: “사실 처음 기획은 주제만 같고 전혀 다른 내용이었어요. 당시 TV에서 몽골에서 온 여자아이가 강제 송환된다는 뉴스를 보고 직접 만나서 취재하려고 했죠. 부모님이 식당에서 일하고 아이는 학교에 다닌다는 얘기가 어릴 적 내 모습과 너무 닮아 보였습니다. 나도 그 애와 흡사한 처지였지만 여러 우연이 겹쳐서 여기 남았죠. 학교에 계속 다니고 태어난 나라에서 계속 살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아이와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편집부 회의에서 ‘이런 기사를 쓰고 싶은데 취재원 접촉에 어려움이 있다’며 개인적인 동기를 밝혔더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러면 내 얘기를 써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망설여졌습니다. 내 얘기를 하고 싶어서 기자가 된 게 아니었고, 가족을 비롯해서 너무 사적인 부분을 공개하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리고 나는 결정적으로 송환을 당하지 않았으니 기사 거리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료들은 그러면 어떻게 해서 송환이 ‘안’ 됐는지에 대해 써보라고 격려해줬습니다.
기억에 의존해 초고를 쓰는 것은 한나절 만에 했지만, 그 다음에 틈틈이 취재와 조사를 통해 글을 다듬어나갔죠. 어린 시절의 불완전한 기억이나 당시 몰랐던 정황을 보완하려고 부모님과 어린 시절 친구들, 난민 숙소에 같이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던 것 맞아?’ ‘너도 이거 기억해?’라고 묻는 식이었죠. 결국 반년이 걸리는 길고 감정적인 여정이 됐어요. 쓰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정말로 이 글을 쓰고 싶어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내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는 것. 이런 생각의 씨앗이 내 안에 심겼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경험도 충분히 숙성되면 멋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하리타: “그 글에 사람들이 매료된 건, 글쓴이가 그런 위기를 통과해 이 사회에 살아남았고, 지금은 주류 언론의 기자가 되어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추방당한 몽골 아이의 이야기도 물론 중요하지만요. 그 아이는 안타깝게도 이 사회에서 사라졌죠.”
바네사: “누군가 그와 비슷한 얘길 했어요. 독일에 수많은 난민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 중 자이트 독자(중산층 이상, 고학력자)가 이해할만한 언어로 직접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나는 계층 사다리를 올랐어요. 어쩌면 이렇게, 사람들이 봤지만 사실은 제대로 보지 못한 난민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랫동안 ‘그들의 세계'에 살면서 나의 세계가 어떤지 말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다시 모인 아이들이 여름 휴가를 다녀온 얘기를 나눌 때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죠. 우리 집은 가난하고, 식당을 하는 부모님은 늘 바빠서 휴가를 가본 적 없다는 것을 말하긴 너무 창피했어요. 그리고 그런 어린 시절을 나조차도 묻어버리고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습니다.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다양한 공부를 하고 사회문제들을 이해한 뒤에야 나의 경험을 되돌아 볼 수 있었으니, 비로소 때가 무르익었던 것이죠.”
바네사: “그랬어요. 그리고 지금의 내가 그 때 이야기를 쓴다면 다른 글이 나올 겁니다. 3년 전에 나는 학교를 갓 졸업했고, 팟캐스트 <라이스 앤 샤인>을 하기 전이었죠. 베트남계 독일 커뮤니티도 잘 몰랐고요. 요즘은 베트남어 수업을 일주일에 4번 듣고 있습니다. 당시 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한창 많고, 내적 혼란이 커서 명확한 언어를 찾고자 헤매다가 그 글을 쓰게 된 것이었죠. 지금이라면 더 깊이 들어가서 내 이야기에 더 많은 모순이나 혼란, 복잡함을 허용할 것 같아요. 더 많은 것을 열어놓고, 흩어놓고, 설명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죠. 이제 와서 보니 그 글이 지나치게 깔끔해 보이네요.”
하리타: “그러면 계속해서 써보기로 하죠! 이야기가 우리들 안에서 변신을 거듭하고 더 많은 깊이와 다양성, 모호함을 담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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