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글>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요청이 증대하고 있는 시대, 페미니즘 교육의 개념, 의제, 실천의 역사와 현재성을 탐색하고 발전적 방향을 모색한다. “이제는 페미니즘” 연재 필진은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들이다. 이제IGE는 페미니즘 교육에 관한 연구와 실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여성학 연구자 집단이다. “(성평등 교육은) 거의 안 배운 것 같아요.” -청소년 인터뷰 내용 중-
2018년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은 21만 명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동의에 기쁘고 놀라웠던 한편, ‘나도 지난 10년간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교육을 수행해 왔는데, 내가 하고 있던 교육은 페미니즘 교육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에 잠시 멈춰 서게 되었다.
성교육, 성평등 교육, 폭력예방 교육 등 이름은 제각기였지만 젠더에 관한 지식을 기반으로 성평등의 관점과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교육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성평등 교육은 크게 양성평등 교육, 성교육, 폭력예방 교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교육은 각기 다른 배경과 경로에 따라 도입되었고, 교육의 근거와 과정도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즉 성평등 교육이라는 포괄적 관점에서 체계적이고 일관된 내용을 구성할 수 있는 구조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문제가 되었던 2015년 <학교 성교육 표준안> 외에는 관련 교재나 지도안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다. 그러다보니 성평등 교육의 수행이 교사 개인의 관심이나 가치관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사들은 성평등 교육의 의지와 실천을 고무시킬 수 있는 체계적 지원과 관리 구조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 가운데 학교의 자율권과 교사 재량권에만 의존하다 보니, 성평등 교육이 자의적이거나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거다.
“지금 교과서의 방향이 세부적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큰 덩어리를 주고 선생님들한테 자율성을 주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여기(성평등 교육)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깊게 들어가고. 관심 없거나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빼버리기도 하고.” -교사 인터뷰 내용 중-
성교육은 보건 과목을 통해 수행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지만, 교과목 채택 여부는 학교 자율에 맡겨져 있고, 해당 교과를 선택한 학교는 많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관련 교과나 창의적 체험활동 등을 통해 의무 시수를 채워야 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실적 보고를 해야 하는 성교육과 폭력예방 교육의 경우에는 교육 수행 내용이 상대적으로 가시적이다. 하지만, 교과교육 안에 내용적으로 포섭되어 있는 양성평등 교육은 교사의 교육관과 신념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어 기본적인 실태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어라든가 통합교과 중에서 ‘여자도 축구를 할 수 있어요, 남자도 미용사를 해요’, 뭐 이런 정도를 언급하면, 이걸로 성평등 교육이나 성교육을 했다고 치는 거예요.” -교사 인터뷰 내용 중-
페미니즘이 반영되지 않은 성교육
성평등 교육은 사회, 도덕, 국어, 기술·가정, 보건, 체육 등의 교과목 관련 단원에서 성평등의 의미와 가치를 다루는 형태로 반영되어 있다. 교과별로 분산되어 있는 성평등 교육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파악해볼 때, 성평등 교육은 성에 관한 가치관과 성규범, 성행동에 대한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성적인 통제 능력을 길러 다양한 성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자기주장과 거절 방법, 성 문제로 인한 위기관리, 문제 상황에 대한 대처 등 개인의식의 변화와 노력을 강조하면서 문제 해결과 예방적 차원에 집중해 있다. 이는 2015년 교육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기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잘못된 성적 욕망의 추구와 행동은 도덕적 문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청소년기에는 성에 대해 올바른 인식과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중학교 사회, 지학사: 130)
학교 성평등 교육의 문제점은 보건 교과를 통한 성교육 내용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보건 교과서는 성적 차이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이해를 생물학적, 생리학적 성에 관한 설명에 주력하는 것으로 시작해, 생식기나 성적 욕구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폭력/성매매의 원인은 성적 차이 때문?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인식이 성차별과 성평등을 이해하는 데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학교 보건 교과서의 「성역할과 양성평등」 단원에서 성차별을 “성적 차이를 능력의 차이로 생각하고 ‘한쪽’에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성평등을 “때에 따라 두 가지 특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양성적 성역할”을 갖추려는 태도와 실천으로 정의하고 있다.(중학교 보건, 천재교과서: 76-78)
성차별을 단순히 양성 간의 이익 불균형으로 접근하거나, 성평등을 양성적 정체성 및 태도의 함양으로 제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취약한 논의이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성평등 인간상’이 교과서의 논리 구조 안에서도 이미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의 성의식이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적 본질로서 견고하게 구축된 것으로 전제하면서, 성적 특성의 이분법을 기반으로 강제되어 온 성역할 규범을 벗어나야 한다는 당위를 내세우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적 차이를 생식기의 차이나 성적 욕망의 본원적 불균형에 기초해 설명하면서 ‘양성성을 두루 갖춘 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제시할 경우, 오히려 남성과 여성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차이를 해석하지 못하고, 그 의미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실제로 성폭력과 성매매에 관한 내용에서 성적 욕망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사람은 남성으로, 고민하고 주저하는 사람은 여성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 중대한 차이의 원인과 의미에 대한 해석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공백과 남녀 간 성적 충동의 본질적 차이에 관한 설명이 어우러지면서 문제는 더욱 확장된다. 성폭력과 성매매의 발생이 여성과 남성의 다른 성적 특성 그 자체로부터 기인한다는 왜곡된 사회적 신념을 추인함으로써 성차별적 담론의 재생산에 공모하게 되는 것이다. 젠더 기반 폭력의 예방에서 피해자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교육 및 폭력예방 교육의 교육 관행이 양성평등 교육과 상호작용하여 되풀이되면서, 성적 차이는 물론 성평등의 의미를 왜곡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교사와 학생들은 양성평등 교육이 “구시대적”이며 “퇴보”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데다, 이마저도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교육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부부유별”과 같은 과거 사상과 그 흔적들의 역사성이나 현재적 의미가 토의되지 않고, “성평등한 가정”과 “(일-가족) 양립”과 같은 가치가 선언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생활과 윤리> 시간에 부부유별 이런 거 배우거든요. 물론 옛날 과거의 사상을 아는 것도 필요하고,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긴 하는데 어떤 점에서 명확히 문제인지 안 나와 있어요. 초등학교에서는 엄마가 집안일 하는 삽화 바꾼다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고등교육과정)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거 같고. 그래서 뭔가 약간 구시대적으로 성평등한 느낌? 남녀 간 성평등한 가정을 만들고, 양립을 위해 노력을 해야 되며, 이런 게 나오긴 하는데…” -교사 인터뷰 내용 중-
도덕과 사회 교과서에는 성차별의 문제나 양성평등의 가치를 사례로 다루고 있으나, 그 의제는 이성교제나 가정생활에 한정되어 있다. 이는 성평등을 개인의 인식 변화에 한정해서 다루는 경향 속에 나타난다. 또한, 성평등 가치관을 다루고 있는 교과서에는 “과거에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등의 수사로 성차별을 과거의 것으로 묶어두고, 현재는 “발전하였다”, “무너지고 있다” 등의 단언으로 성평등이 이미 도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평등 교육은 성별 고정관념 및 성역할에 대한 개인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개인의식과 행동의 변화는 젠더 불평등이 역사적 구성물임을 이해하고, 사회, 문화, 법, 제도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할 때 시작된다. 성적 차이를 ‘양성’의 본질적 차이에 가두고, 차별을 ‘과거’에 묶어둔다면 기대하기 어려운 인식이다.
성차별 만연한 교실…스쿨미투는 ‘터질 게 터진 것’
학생들은 학교의 성차별적 구조와 현실을 민감하게 인식하면서, ‘스쿨미투’에 대해 “터질 게 터진 것 같다”고 말한다. 개인의 과목별 역량을 남녀의 차이로 환원한다든지, 교사의 성별을 막론하고 성차별 언행이 만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여학생들이 이런 상황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 선생님이 시험지 채점하시다가 ‘여자애들이라 그런가 이 과목을 잘 못하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도 있고. 그런 거에서 느꼈던 것 같아요. [스쿨미투는] 터질 게 터진 것 같다 싶기도 하고.” -청소년 인터뷰 내용 중-
교사들도 청소년 세대의 의식 고양에 비해 학교와 교사 집단이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여학생도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학업 능력과 리더십 자질을 발휘하도록 독려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가…”라는 말로 ‘여성’으로서의 몸가짐과 태도를 훈육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는 학부모에게서도 나타난다. “얌전한” 딸로 키우지 않겠다는 부모가 늘어나고 있지만, “성 조숙증을 걱정”하거나 “성이 덜 발달되기를” 바라는 건 주로 여학생의 부모라고 한다.
종합해 볼 때, 학교는 단순히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편에서는 여학생들에게 남성들과 같은 독립적 인간으로 성장해야 할 것을 독려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여성적 역할을 유지하라고 훈육하는 등 새로운 젠더 규범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가르치지’ 않은 성평등이 어떻게 가능할까
특히 안타까운 것은 성평등 교육에 의지를 가진 교육 주체들에게조차 성평등 교육은 ‘위험한’ 것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이슈 등이 사회화, 대중화되고 그에 대한 백래쉬(backlash, 사회의 진보적 변화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동) 역시 강하게 부상하면서 교육기관 및 행위자들에게 직·간접적인 압력과 위협이 행사되고 있다. 상황이 이런지라 교사들은 성평등 교육에 소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안 해도 되는” 교육인데 괜히 했다가 학부모 민원 등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성교육과 양성평등 교육은 실은 새로운 거고 안 해도 되는 거고요. 실은 해서 두려운 분야에요. 자기 옵션이자 얘기해도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에 잘 말하지 않고…”
그렇다면 학교에 성평등 교육 체계와 내용이 잘 자리잡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한 교사는 체벌금지 조치가 가져온 변화를 예로 들며 “교육부에서 공문이 내려오면 된다”고 답변하였다. 이 교사가 말한 “공문”은 교육 당국이 성평등 교육에 대한 철학과 정책을 일관되게 마련하고, 실행 의지를 분명히 갖춰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평등 교육에 대한 철학과 내용이 부재한 상황에서 양적 확대와 강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평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데 어떻게 성평등이 가능하겠는가. 교육 당국의 대책은 기존 교육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본 글은 필자의 관련 논문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엄혜진·신그리나(2019) ⌜학교 성평등 교육의 현실과 효과-젠더 규범의 재/생산, ‘위험한’ 성평등 교육⌟)
*필자 소개: 신그리나.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이자 경희대와 중앙대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치고 있다. 성매매 문제와 여성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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