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사라진 한국,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선례”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인터뷰(상)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그와 관련된 새로운 입법 없이 2020년 12월 31일이 지났다. 올해 1월 1일부터 우리는 임신중지로 인해 처벌 받지 않는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해 온 시민단체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이하 셰어)의 문을 두드렸다.
2019년에 설립된 셰어는 2015년 장애여성공감에서 진행한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사업을 통해서 만난 활동가, 연구자, 변호사, 의사들이 이듬해 결성한 ‘성과 재생산 포럼’을 전신으로 한다. 단체 설립 이전부터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의 일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2018년엔 책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를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셰어는 의료, 법/정책, 교육 분야에 초점을 맞춰 활동해가고 있다. 재생산 건강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소수자 친화적인 의료 환경을 논의하는 ‘셰어의 친구들’ 팀, 개인의 성과 재생산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고민하는 ‘입법 내비게이션’ 팀, 금지가 아닌 긍지를 배울 수 있는 성교육을 모색하는 ‘에브리바디 플레져랩’ 팀에서 각각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셰어의 나영 대표와 기획운영위원인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 최현정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를 줌(Zoom)으로 만났다. 셰어와의 인터뷰는 ‘낙태죄’가 사라진 지금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논의해야 할 것들을 짚고, ‘모두를 위한 재생산권’이 실현되는 사회의 청사진을 그리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2019년 헌재 판결 이후 국회는 이렇다 할 대체 입법을 내어놓지 않았고, 작년은 한해 내내 많은 이슈가 코로나19에 집중되었다. 대중들이 참가할 수 있는 행사나 집회가 열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러다 보니 2020년 12월 31일이 되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낙태죄’가 사실상 폐지되었음에도 그 의미가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셰어 활동가들은 입을 모아 “‘낙태죄’가 없어지고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건 분명한 승리”라고 강조하며, 한국의 ‘낙태죄’ 폐지 운동과 성과는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선례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했다.
나영 대표는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여전히 예전에 만들어졌던 처벌이나 허용 조항을 그대로 남겨둔 상태에서 제한적인 규정을 만드는 ‘합법화’ 모델이 많은 상황 속에서, ‘합법’의 테두리를 만들지 않고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이뤄냈다는 점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합법화’ 상태인 해외 국가들에서도 처벌 조항을 완전히 폐지하고 비범죄화로 가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요. 캐나다에 이어 한국의 ‘임신중지 비범죄화’ 선례가 각국의 운동을 진전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실제로 지금 여러 국제연대 단체에서 한국 사례를 공유해 달라며 온라인 워크샵과 회의, 인터뷰 제안이 오고 있어요.”
지난 해 정부가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제한을 두고 일부 임신중지만 허용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을 때, ‘낙태죄’를 부활시키지 말라며 여기저기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됐다.(관련 기사: 정부의 ‘낙태죄’ 개정안은 “평등권 위반” http://ildaro.com/8878) 그러나 한 켠에선 결국 한국도 ‘14주까지만 허용’한다는 틀이 만들어 질 것이라는 예상이 높았다. 나영 대표는 “끝까지 정부안에 반대하는 투쟁을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최현정 변호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확인했다”는 말로 ‘낙태죄’ 폐지의 의의를 설명했다.
“2019년 헌재 결정이 있었을 때 승리를 축하하는 분위기였지만 ‘정말 완전한 비범죄화가 가능한가?’ 라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어요. 결국 어느 선에서 협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느 선이 최선일까 고민하기도 했죠. 그리고 작년 10월 임신중지를 ‘허용’하긴 하지만 여러 ‘규제’가 담긴 정부의 개정안이 나왔고, 일부 언론에선 이것이 마치 ‘진전’인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과 여러 단체, 각계에서 등의 비판 성명을 발표했고 그것이 시민들에게 공유되면서 시민들이 함께 목소리를 냈죠.”
최현정 변호사는 “우리가 1년 전에 고민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전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잘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이제 정말 (처벌과 규제로) 돌아갈 수 없음을 확인한 것”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대체 입법을 쉽게 생각했던 정부와 국회, 뜨끔했을 것
그간의 과정을 보면, 정부와 국회의 역할은 미비하고 아쉬운 수준이었다. 나영 대표는 “깊이 있는 논의를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꼬집었다.
“사실상 국회의원들이나 정부는 해외 모델을 대충 가지고 와서 처벌과 허용의 기준만 바꾸는 정도로 생각했던 거에요. 하지만 막상 관련 법을 바꾸려고 보니까, 굉장히 연결되는 영역이 많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보건의료체계도, 교육도, 노동 환경도 바꿔야 하고, 임신중지뿐만 아니라 피임과 입양 등 전반적인 체계도 바뀌어야 하고. 사회복지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 지원 차원에서도 바뀌어야 하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고.”
막상 입법을 하려고 보니, 임신중지를 다루려면 성과 재생산 권리를 함께 담아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을 거라는 얘기다. 와중에 정부는 상담 후 3일간의 숙려기간이 설정되어 있는 등 보수적인 독일법을 참고해 개정안을 만들었다. 나영 대표는 “이 정도면 되겠지 라고 가볍게 본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중의 수준은 그보다 훨씬 더 높아졌어요. 정부가 시민들의 의식 수준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거죠. 게다가 독일법을 참고했다는 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해요. 저희가 2018년 성과 재생산 관련 국제 포럼에 갔을 때, (국제적 흐름은) 이제 임신중지 ‘합법화’를 논의할 때는 지났다고 했거든요.”
나영 대표는 “여당에서 정부 개정안을 강행하지 못했던 건, 생각보다 반발이 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개인의 재생산권 보장이 국가의 책임 하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설명하며, “그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중요한 의의로 꼽았다.
임신중지를 ‘임신중지’라 기록할 수 있게되었다
‘낙태죄’ 폐지 카운트다운을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는 의료인으로서 “이제 한시름 놓인다”고 했다.
“‘낙태죄’가 있었을 땐 법적인 재제가 있는 거니까 아무래도 부담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젠 내가 임신중지를 시행할 때 가졌던 부담들이 없어진 것 같아요. 1월 1일 이후에 정말 심리적으로 편안해졌어요. 이전까진 여러 생각이 많았던 탓에 밤새고 그랬던 때도 있었거든요.”
최예훈 의사는 “‘낙태죄’가 존재했던 시절에 일어났던 여성 사망 사건들과 같은 문제가 이젠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도 안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전에 임신중지 시술을 하다가 사망한 사건들을 보면 대부분 병원 이송을 빨리 못했기 때문이거든요. 문제가 생겼을 때 큰 병원이나 상급 병원으로 이송해야 하는데, 임신중지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설명을 못하고 망설이다 시기를 놓쳐버렸던 거죠. 아직 현장에서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제 보호자나 남성의 동의 없이 ‘본인 동의 하에’ 임신중지를 할 수 있고, 문제가 생겼을 때 상급 병원으로 이송이 가능해지는 등 변화가 분명히 생겼어요. 저에게는 큰 변화라고 느껴져요.”
그 뿐만 아니라 “임신중지를 ‘임신중지’라고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공식적인 통계를 내고 그에 따른 연구를 진행할 수도, 제도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이전엔 기록을 제대로 쓸 수 없었거든요. 그냥 병원 내에서 혹은 나만 알아볼 수 있게 편법으로 기록하고 처방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었어요. 우회적으로 해야 했으니까요. 이렇게 하다 보면, 일하는 의료인들도 임신중지에 대한 ‘낙인’을 가질 수 밖에 없거든요. 몰래 해야 하는, 뭔가 구린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중요하죠.”
나영 대표는 “임신중지가 불법이었을 땐 사후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이젠 가능해졌다”는 점도 큰 변화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이제는 임신중지 후에 사후관리가 필요하거나 다른 후유증이 생길 경우,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는 의사에게 다시 찾아갈 수 있고, 또 임신중지를 고려한 의료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영 대표는 “그렇기에 ‘낙태죄’가 폐지된 후 첫 해인 올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것.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면 ‘앞으로 또 어떻게 하냐’고 막막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제부터 천천히 해 나가면 돼요. 단기간에 빨리 해결될 일이 아니거든요. 꾸준히 계속해서 변화해 나갈 수 있도록 밀어붙이는 힘을 우리가 만들어 냈다는 것, 이걸 중요하게 보면 좋겠어요.” (앞으로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야 할 내용에 관한 인터뷰가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낙태죄 폐지 관련기사목록
|
사회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