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의 추억
2000년대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조용히 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컴퓨터의 전원을 누르곤 했다. 그때는 보호자가 모르게 컴퓨터를 하는 것을 ‘몰컴’이라고 불렀는데, 컴퓨터의 세계에는 금기의 규칙을 넘어서라도 접속하고 싶은 재미난 것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이 없거나, 기껏해야 2G폰이던 시절에 컴퓨터는 청소년의 놀이문화를 매개하는 강력한 상징물이었다. 나는 인터넷에 접속해서 이런저런 것을 하면서 방과 후의 시간을 한가하게 흘려보냈다. 웹툰을 보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최근 '웹툰'이라는 말은 성공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진입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그게 뭐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낯설고 생소한 신조어였다. (웹툰의 역사를 논할 때 관용구처럼 소환되는) 다음 웹툰이 아직 ‘만화 속 세상’이던 시절에, 웹툰은 곧잘 ‘온라인에서 연재되는 만화’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었다. 하지만 웹툰은 단지 출판 만화의 페이지를 그대로 온라인에 옮겨놓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는 엄마가 만화책 대여점을 운영하다가 사업을 접은 후 가져온 만화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그런 만화책을 읽는 것과 웹툰을 읽는 것은 분명히 다른 행위 같았다.
웹툰의 작가들은 선생님-문하생 구도에서 나온 장인으로서의 만화가와는 어딘가 달랐고, 오히려 우리와 아주 가깝고, 비슷한 곳에서 살아가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유머 코드를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이처럼 웹툰이 전문성의 영역보다는 비교적 아마추어 문화와 가까운 곳에서, 특유의 문법과 독법이 조금씩 개발되고 정착되고 있던 시절에 나는 처음으로 웹툰의 독자가 되었다.
생활툰과 ‘일상’
생활툰은 작가의 '일상'을 소재로 삼는다. 그것이 생활툰의 대표적인 특징이지만, 사실 일상을 콘텐츠의 소재로 삼는다는 아이디어가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포털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제작되었던 블로그 서비스도 일상을 기록하여 누군가 읽을 수 있게 제공하는 플랫폼이고, 이제는 채널 어디를 돌려도 볼 수 있는 연예인 관찰 예능이나, 유튜브에 넘쳐나는 일반인 브이로그도 모두 누군가의 일상을 편집하여 만들어낸 콘텐츠들이다.
그러나 그 ‘일상’은 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일상은 수많은 관계망과 상품 경제, 정체성과 권력 구도가 교차하는 가운데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의 요소들 중 어떤 부분이 선택되거나 버려지면서 콘텐츠로 제작된다. 우리는 아름답게 연출되고 편집된 누군가의 일상을 보고, 즐기고, 그것을 내 위에 버티고 서 있는 나의 생생한 날것의 일상과 비교해본다. 우리는 누군가의 편집된 일상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닮아가려고 하기도 하고, 애초에 내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의 일상이 그 자체로 편집되고 구성되어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일상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일상은 우리가 끊임없이 개발하고 제련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완성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생활툰에서 서사화하는 '일상'은 그런 종류의 콘텐츠들에서 다루는 일상과는 거리가 있다. 생활툰의 일상은 대단하거나 멋지지 않다. 잘 조직되거나 계획되어 있지도 않다. 사소하고 평범한 그 일상의 요소들은 이들의 삶이 신자유주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열심히 어필한다. 독자의 시선으로 낢이나 김진이라는 사람의 일상을 엿볼 때, 거기엔 끊임없이 실패하거나 미달되는 자아가 있다. 그리고 그건 작가 개인의 독특한 발명품이 아니라, 사회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감성을 만화의 문법으로 번역해 낸 결과물로 보였다.
*1kg면 대략 한근 반 정도 / <고깃집에서의 5인분> / “1kg가 쪘다는 건 그만한 양을 온몸에 얇게 펴발랐다는 것이란다.” *큰 결심은 그것대로... / “오늘부터 햄버거는 끊는다, 하루에 한 시간씩 운동이다” / 지키기 힘들다 / “으으...힘들어, 마감도 해야 해..., 귀찮아....” -서나래, <낢이 사는 이야기> 중에서
*몸이 정말 예전 같이 않다는 게 확! 화악! 느껴지고. / 젊을땐 밤새 술마셔도 말짱하더니... 요즘엔 다음날 꼬박 누워 지낸다. *게으르고 더럽다고 욕하실지 모르겠지만, / ”아! 또 감아야 하나!“ / 머리 감는 일은 너무너무 귀찮아요 -김진, <나이스진타임> 중에서
그래서 생활툰의 작가가 표현하는 한계와 자기비하는 공감과 동질감의 대상이 된다. 반복되는 실패담을 통해서 독자는 작가와 공감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 시대에 생활툰의 작가들이 자주 독자들이 형성하는 친밀한 관계망 안에 불러들여진 것도 그러한 생활툰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은 생활툰의 작가들을 마치 친구처럼 여겼고, 다른 작품에 게스트로 등장하면 아는 사람처럼 반가움을 느꼈으며, 때로는 친근함을 강조하기 위해 ‘언니’와 같은 호칭으로 호명하기도 했다. 그러한 관계망 자체가 작품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생활툰과 젠더
생활툰이 이미 교차되고 구성된 ‘일상’의 편집물이라면, 젠더는 그 안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을까? 때때로 사용되던 ‘언니’와 같은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활툰의 작가는 무성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당시 온라인상에서는 젠더가 분명하게 여/남으로 분화되어있다는 믿음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었고, 여성인 작가가 그리는 생활툰은 ‘여성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러한 성별의 설정은 공감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주요한 기제 중 하나였다.
*친구 : 어머, 생각보다 괜찮은걸? (가슴팍에 새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 가슴이 커서 새의 크기도 커졌다.) 가슴이 좀 끼네... *진 : ...‘빅버드’가 됐잖아! (친구와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있다. 티셔츠 좌측에 ‘그냥 버드’라고 적혀 있다.) -김진, <나이스진타임> 중에서
특히 낢의 상징적인 노란색 신체는 부풀거나, 구부러지거나, 굵어지거나, 흐물거리는 방식으로 ‘이상적’인 여성 신체와 반복적으로 불화한다. 통상의 신체와 변형 신체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오가는 이 자유로운 노란색 덩어리는 통제하거나 가꾸어야만 하는 대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우리의 추한 실체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흔들고 움직이고 사용하고 널부러놓는 몸 그 자체이다.
이 작품들에 내재한 자조적인 자기비하의 감성은 일상에서 젠더와 불화하거나 타협하거나 투쟁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들의 감각과 연결되었다. 그 연결감은 ‘공감된다’라거나 ‘내 이야기다’라는 반응으로 표현되며, 자신의 고통이 외롭게 동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위로를 주었다.
2021년의 생활툰에서 젠더 읽기
<낢이 사는 이야기>와 <나이스진타임>이 시즌을 더해가고 완결되는 동안에도 웹툰 산업은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웹툰을 보는 공간이 컴퓨터에서 모바일로 옮겨갔고, 인기 웹툰에서 생활툰이 차지하는 비중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2021년에도 새로 연재되는 생활툰을 찾아본다. 편 단위로 끊어지는 서사 구조와 공감 콘텐츠는 여전히 웹툰이라는 장르의 가장 정석적인 재미를 담보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두 작품의 감성이나 젠더 표현이 그 시대의 공통 감각과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처럼, 최근 연재되는 생활툰들은 또 다른 시대성 위에서 그려지는 느낌을 준다. 요 몇 년간 젠더는 독해의 부수적인 요소에서 점차 중심적인 요소로 등극하고 있으며,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여러 새로운 전형을 생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생활툰의 젠더 표현은 이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작품의 작가들도 여전히 여러 실수와 실패를 반복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젠더의 설정이 거의 없다. <대학일기>에서 한없이 과제를 뒤로 미루다가 어거지로 작성하여 제출하고,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에서 졸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아침을 맞는 ‘자까’의 모습은 젠더 정체성과 무관하게 대학생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된다.
거의 장르화된 실패담을 보여주는 <모죠의 일지>에서는 실패 자체가 적극적인 공감의 요소가 아니다. 모죠가 저지르는 실수들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상천외한 것처럼 그려지며, 이 때문에 모죠의 실패는 생활툰의 ‘분량’을 확보하는 서사적 장치처럼 활용된다.
*모죠 : 이걸 바로 굽기만 하면 마카롱 꼬끄 완성입니다 / 너무 순조로워서 놀라울 지경인데요 / 이거 이거~ 이렇게 잘해서야 2편으로 나눠 그릴 만한 분량도 안 나오네요~ / 설명서만 따라 하니까 쉽....어? / (설명서에 ‘*짤주머니로 짠 반죽은 충분히 말린 후 구워줍니다’라고 쓰여 있다.) 어? -모죠, <모죠의 일지> 167화 “마카롱 만드는 만화 (1)” 중
이처럼 흔히 ‘여성적’이라 상상되는 요소들이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는 작품 속에서 여전히 ‘딸’이라 불린다. 친족 관계망 속에서 그들의 젠더는 호칭을 통해 표현된다. 이때 부정되는 것은 사회적 관계로서의 젠더가 아니라, 젠더에 본원적으로 내재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허상의 특성들이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어떤 식으로든 젠더와 관계 맺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 관계는 항상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젠더와 맺는 관계들은 항상 복잡하다. 우리는 그것을 승인하거나, 타협하거나, 갈등하거나, 조정하면서 우리 자신의 일상을 직조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일상을 서사화하는 장르인 ‘생활툰’은 누군가가 자신의 일상에서 젠더와 관계 맺는 방식을 드러내곤 한다. 이 글에서 하나의 장르로 거칠게 묶어낸 작품들은 ‘여성의 일상’이 어떤 식으로 조직되고 해석되고 서사화되는지 읽어낼 수 있는 하나의 장이다. 이것은 작가, 독자, 플랫폼 중 어느 한쪽의 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주체들의 공명을 통해서 조금씩 그 실체를 형성한다. 그래서 생활툰을 읽을 때, 우리는 단지 컷과 컷 안에만 갇혀 있지는 않다. 그 컷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만나고, 또한 우리의 세계를 만난다.
필자 소개: 은진(로라). “유니브페미 활동가. 글 쓰는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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