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다, 여름이고, 여름일 것이다. 하지만

[극장 앞에서 만나]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연출 <무스탕: 랄리의 여름>

신승은 | 기사입력 2021/08/06 [09:18]

여름이었다, 여름이고, 여름일 것이다. 하지만

[극장 앞에서 만나]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연출 <무스탕: 랄리의 여름>

신승은 | 입력 : 2021/08/06 [09:18]

토끼 같은 자식, 여우 같은 마누라. 흔히들 말하는 이 문장에는 남편, 아버지, 남성을 칭하는 단어는 막상 하나도 없으면서 그 주체는 남성이며 여성은 대상화되어 있다.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의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Mustang, 2015)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토끼 같은 자식, 여우 같은 마누라, 이 두 선택지뿐인 다섯 자매에 관한 이야기다.

 

여름영화다. 하지만 아름다운 햇빛을 담지는 않는다. 해는 따가우며, 더위를 식혀줄 막간의 바람조차 차단된다. 하지만 끝내 당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선사할 것이다. 그 바람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다. 바람의 비밀은 글의 끝에 공개하겠다.

 

▲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의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Mustang, 터키, 프랑스, 2015) 스틸


여성에게는 국가도, 가족도 없다

 

보수적인 터키의 작은 마을, 다섯 자매가 할머니, 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 무더운 하굣길, 다섯 자매는 바닷가에서 잠시나마 더위를 식힌다. 또래의 남학생들과 함께 놀며 기마전을 하기도 한다. 이를 본 옆집의 아줌마가 자매의 할머니에게 사실을 알린다. 재밌게 놀고 돌아온 자매들을 기다리는 건 할머니의 무서운 ‘검사’다. 아랫도리를 남자들에게 비비지 않았냐며 한 명 씩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남은 자매들은 일제히 문을 두드리며 들어간 자매의 석방을 요구한다.

 

첫 시퀀스부터 어이가 없다. 동떨어져 보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런 곳이 있구나, 2015년 개봉작인데 그렇구나. 그 거리감은 사실 허상이다. 안도하고 싶은 일순간의 허상. 하지만 기마전을 했다고 무언가를 ‘검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과연 우리 사회에는 없는가? 다른 모습으로 다른 외양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2021년, 안타깝게도 아직 어느 국가에나 성차별은 존재한다. 그 양상이 다양할 뿐이다. 손가락 모양으로 난리가 났던 나라가 있다. 기타 피크를 집는 듯한, ‘조금’을 표현하는 것 같은 손가락 모양으로 대한민국의 몇몇 기업은 사과를 했다. 글을 쓰면서도 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현실이어서 웃음이 쏙 들어간다. 남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손 모양이라는 남성 중심 사이트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 이미지를 사용한 기업 중 한 곳은 해당 디자이너를 찾았는데, 심지어 남성이었다.

 

머리가 짧다고 페미니스트라는 ‘논란’이 있는 나라가 있다. 올림픽 양궁 금메달을 딴 여성에게 어처구니없는 오발을 날리면서 메달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고 정치권이 가세했다. 외신들은 아직까지 이런 문화가 있는 대한민국에 충격을 받았고, 이는 ‘sexual abuse’ 즉 성적 학대라며 반응을 표했다.

 

디지털 집단 성폭력 N번방, 불법촬영, 룸살롱의 나라, 텔레비전만 틀면 성범죄를 저지른 연예인이 나와서 깔깔대는 나라에 사는 내가 과연 저들이 겪는 성차별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성차별의 양상을 비교하며 경중을 나누는 것 자체가 웃기다. 우리는 동떨어질 수가 없다. 국가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더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족마다 가부장의 모양새가 조금씩 다르다. 다양해서 더 화가 난다. 가스라이팅의 양상도 아주 다채롭기 그지없다.

 

▲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의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Mustang, 터키, 프랑스, 2015) 스틸


여성에게는 국가도 가족도 없다는 말은 중의적으로 다가온다. 법과 제도로 지켜줄 국가와, 품으로 지켜줄 가족이 없다는 의미, 그리고 국경과 혈연을 넘어서서 연대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친족 내 성폭력을 당한 내가 가족에게 폭언을 당한 너의 일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홀로 이 영화를 보고 나와 뜨거운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시 나를 포함해 각자 집에서 차별을 받으며,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술집을 전전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약속을 안 해도 술집에 가면 그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을 만나 술집에서 이 영화 이야기를 실컷 했다. 그 즈음에 만들었던 노래가 “가스등”(신승은 작사·작곡)이다. “내 집이 생기면, 고마운 친구들 모아서, 비루한 안주에 소주를 나눠 마실 거야/ 눈물을 담을 작은 용기를 집들이 선물로 가져다주겠니.”라는 가사로 끝나는 노래다.

 

어떤 영화는 보여주지 않고 보여준다

 

아무튼 바닷가 ‘사태’ 이후로 할머니와 삼촌은 점점 더 이 자매들을 옥죈다. 할머니는 이들에게 여우 같은 마누라가 되기 위한 신부수업을 시작하고, 삼촌은 이들이 함부로 외출하지 못하게 집에 철창을 친다. 그래도 다섯 자매는 방안에서 프레임 안을 사이좋게 메우며 햇빛을 맞는다. 그들이 나누는 우애를 그릴 때만큼은 카메라도 미간을 피는 것 같다. 하지만 가득 차던 화면은 점점 비어간다. 토끼 같은 자식이 차례로 여우 같은 마누라가 되기 위해 시집을 ‘보내진’다. 처음 보는 남자애와 첫째를 앉히고 여자 어른들이 차를 마시며 동의를 한다. 그러고 남자 어른들이 들어와 동의를 하면 다음으로는 결혼식이다.

 

첫째가 가고, 둘째도 간다. 셋째는 더 멀리 가게 된다. 다섯이 채우던 프레임은 서서히 비어간다. 영화의 시점도 다섯 자매의 시점에서 점점 남는 자인 막내, 랄리의 시점으로 옮겨간다. 관객을 남는 자에 위치시켜 끝까지 방법을 찾게 한다.

 

▲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의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Mustang, 터키, 프랑스, 2015) 스틸


와중에 삼촌은 자매들을 성폭행 한다. 이 영화가 이를 연출한 방식에 관해서만 나는 반나절 내내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남은 반나절은 그렇게 연출하지 못한 영화들에 관하여 비판하고 싶다.

 

컷 바이 컷으로 설명을 시작하려 한다. 시간은 밤이고 장소는 랄리와 넷째 누르의 방이다. 1cut. 자다가 소리에 뒤척이는 랄리/ 2cut. 방에서 조용히 나가는 삼촌/ 3cut. 1cut과 같은 랄리의 반응 쇼트, 오프 사운드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 한 거야? 뭐 한 거냐고! 내가 묻잖아”/ 4cut. 랄리가 1층에 있는 할머니와 삼촌에게로 내려간다./ 5cut. 랄리의 시점샷(point of view)으로 보이는 당황하는 삼촌과 할머니. 할머니가 아직 안 잤는지 묻는다./ 6cut. 랄리의 바스트 샷, “목이 말라서요” 단호하게 대답한다./ 7cut. 침대에서 뭔가를 황급히 지우는 누르/ 8cut. 방으로 들어온 랄리가 묻는다 “안 자?”/ 9cut. 누르가 당황하면서 잘 거라고 눕는다.

 

여기서 성폭행을 묘사하거나, 노출하거나, 사운드로 은유한 컷은 단 한 컷도 없다. 하지만 명확히 알 수 있다. 삼촌이 누르에게 성폭행을 저질렀다. 구 소련 영화감독 쿨레쇼프가 실험해 이름 붙인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가 있다. 무표정인 남자 사진에 빵 사진을 붙이면 사람들은 ‘배고픔’으로, 아이의 관 사진을 붙이면 ‘슬픔’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cut이 있다. cut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날아가는 주먹 쇼트 다음에 멍을 문지르는 사람의 쇼트를 붙이면 직접 액션 씬 없이 폭력을 표현할 수 있다. 멍을 문지르는 사람의 쇼트 다음에 주먹을 후후 부는 사람의 쇼트를 붙여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본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컷과 컷 사이의, ‘본 것’과 ‘본 것’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셈이다. 관객의 눈은 바늘이 되어 컷이라는 천을 꿴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가 나온다. 어떤 영화는 보여주지 않고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시각적인 쾌감에 의존해 트라우마적인 씬을 연출하는 감독들이 있다. <추격자>(나홍진 감독, 2008)는 성폭행‧살인 피해여성의 모습을 풀샷에 이어 클로즈업으로 또 잡은 연출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각적인 쾌감으로 가해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대신하기 위해서? 그럼 무엇이 남는가. 다시 말하고 싶다. 여러번 말하고 싶다. 영화는 cut이 있다. cut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보이지 않으면서 표현할 수 있다. 다른 이야기들은 변명이다.

 

▲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의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Mustang, 터키, 프랑스, 2015) 스틸


무스탕, 랄리

 

이 힘든 서사로부터 카메라가 인물들을 지켜내는 방법은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대체로 핸드헬드로 촬영되었는데 그러지 않은 몇 쇼트들이 있다. 가장 큰 의미로 다가왔던 쇼트는 랄리가 몰래 외출한 낮, 산속 찻길을 혼자 걸어가는 샷이다. 크레인, 스테디, 드론 샷 같은 느낌의 흔들림 적은 쇼트다. 깊은 산속 길을 랄리는 계속 걸어간다. 넓은 세상 속 랄리를 카메라가 묵묵히 따라간다. 랄리가 세상에 비해 턱없이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카메라가 따라가는 덕에 인물은 롱 샷에서 풀 샷으로 점점 커진다.

 

그리고 걸어가는 랄리의 발을 보여준다. 그다음 쇼트는 랄리의 바스트 샷이다. 햇빛 덕에 미간을 찌푸린 랄리가 세상을 본다. 다음 쇼트는 랄리의 시점 샷 격인 넓은 세상의 인서트다. 갇혀 사는 랄리와 넓디넓은 세상의 조우를 그린 이 쇼트는 랄리가 작아 불가능해 보이게 그리지 않고 도전을 지지하는 의미로 그려진다. 신비한 음악이 더해 그 감흥을 더해준다. 저 세상이 랄리가 갈 세상이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랄리는 계속 걷다가, 풋볼 대회에 가게 태워줬던 차주를 만난다. 차주가 어디 가냐고 묻자 랄리가 대답한다. “떠날 거예요.” 슬리퍼를 찍찍 끌면서도 당차게 대답한다. 허황되어 보이는가? 랄리는 그에게 운전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넷째 누르의 결혼식 전, 랄리는 채비를 한다. 이 또한 픽스 샷으로 잡아 괜한 긴장감과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다.

 

랄리와 누르는 기어코 떠난다. 여우 같은 마누라가 되어야 하는 토끼 같은 자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제목인 무스탕의 사전적 의미는 ‘미국 대평원에 사는 야생의 작은 말. 기르던 말이 야생화된 것’이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바람의 비밀을 풀 때가 되었다. 더운 여름, 어디서 불어온 바람으로 랄리는 땀을 식히지 않는다. 야생마가 되어, 무스탕이 되어 달리면서 바람을 직접 만든다.

 

집을 떠난 랄리와 누르가 이동 수단 속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 짧게 여름 햇빛 속 방 안에서 자매 다섯 명이 함께 보냈던 쇼트가 나온다. 조금이라도 더 길었다면 감정을 강요하는 컷이 되었을 것이다. 적절한 편집으로 그 쇼트는 우리에게 랄리와 함께 기억을 공유하게 한다.

 

무더운, 그러나 철창 속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다섯 자매의 여름이었다. 하지만 작은 야생마가 훨훨 달려, 나는 땀까지 마를 정도로 시원하게 달렸던 여름이었다. 지금 한국도 한여름이다. 그리고 여름은 매 해, 뻔뻔하도록, 잊을만하면 또 올 것이다. 두렵지만, 매 여름마다 무스탕이 되기로 랄리에게 약속을 한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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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1/08/13 [15:54] 수정 | 삭제
  • 뭐 이렇게 훌륭한 글이 다 있지
  • 아마씨 2021/08/11 [19:09] 수정 | 삭제
  •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 2021/08/09 [21:10] 수정 | 삭제
  • 기사 너무 좋네요.. 영화도 좋고요
  • 2021/08/07 [11:56] 수정 | 삭제
  • 여자감독들이 확실히 성폭력을 다룰 때 고심하고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반대로 성폭력을 가해자 시선으로 일부러 이용하는 듯한 영화는 화가 납니다.
  • 라오 2021/08/06 [16:46] 수정 | 삭제
  • 반짝이는 리뷰 잘 읽었어요.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넷플릭스에 있당!! 즐거움이 배가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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