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없다고 임신중지 권리가 보장된 건 아니다

2022 대선 기획: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⑦ 성과 재생산의 권리

김보영 | 기사입력 2022/02/23 [10:50]

‘낙태죄’ 없다고 임신중지 권리가 보장된 건 아니다

2022 대선 기획: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⑦ 성과 재생산의 권리

김보영 | 입력 : 2022/02/23 [10:50]

얼마 전, 원치 않는 임신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한 책 <턴어웨이: 임신중지를 거부당한 여자들>(다이애나 그린 포스터 지음, 동녘)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나는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책의 배경이 된 미국의 상황과 ‘낙태죄’가 폐지된 한국의 상황을 자주 비교했다. 의료전달체계나 건강보험 제도, 문화적·종교적 배경 등의 차이 때문에 미국과 한국을 단순히 비교하긴 어렵지만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상황은 두 나라가 함께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는 중요한 정치적 국면마다 임신중지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거나, 임신중지에 대한 정치인의 개인적 입장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반면, 한국의 정치권은 임신중지에 대한 정치적 논쟁에 오히려 소극적인 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립되는 입장과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2022년 대선 국면에서, 성과 재생산 관련 의제가 과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 2019년 4월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소식을 접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 ©박종주

 

성과 재생산의 권리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의 문제다

 

수많은 시민이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였고 ‘낙태죄’를 폐지하는 매우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정치권은 이 의제에 소극적인 모습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 성·재생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다양한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할 시기이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법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마련하려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왜일까?

 

임신중지는 갈등의 소지가 많은 쟁점이기 때문에 회피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여전히 성·재생산에 관한 문제는 사적 영역에 관한 것이며 국가가 개입할 지점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법과 제도 마련이 지연되는 것은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여전히 임신중지 시술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은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사실 임신중지를 비롯한 성·재생산 권리가 법과 정책으로만 충분히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이 의제가 소홀히 다뤄지는 이유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어쩌면 성·재생산 영역은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임신중지는 국가가 나서서 보장해야 할 권리의 영역이 아니라 혼자서, 여전히 비밀스럽게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청소년이, 장애인이, 성소수자가 섹스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여러 의문이 떠오른다.

 

우선 성·재생산 영역은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성·재생산 자체가 먹고 사는 일에 관한 문제다. 성·재생산 권리는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 안정적인 소득과 주거 공간을 보장받을 권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아동의 권리, 교육받을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임신중지라는 사건은 삶의 특정한 시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임신의 유지 여부를 선택하는 것은 삶의 장기적인 계획과도 맞닿아있으며,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관한 선택이기도 하다.

 

비용, 정보, 방법, 건강, 교육…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내가 활동하는 단체인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이하 ‘셰어’)에서는 2020년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발표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함께 해 온 많은 이들이 ‘임신중지의 전면 비범죄화’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일 뿐임을 강조해왔다. 성·재생산 권리는 의료, 교육, 노동, 사회복지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고, 이를 보장할 의무 국가에 있다고. 국가는 더 이상 인구 정책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와 건강 보장’의 차원으로 성과 재생산에 관한 정책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 2020년, 셰어에서 발표한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 셰어 홈페이지에서 법안 및 해설집 전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srhr.kr ©셰어

 

이러한 요구와 제안이 반영되어, 이제는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 보장’에 관한 내용이 여러 정책에서 언급된다. 2020년 12월 발표된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21~2025)에는 성·재생산권 보장에 관한 내용이 새롭게 포함되었다. ‘저출산’ 현상을 해결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었던 정책 방향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의 전 생애에 걸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고려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은 시작 단계이며 한계도 많다. 제5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2021~2030)에는 인구집단별 관리 내에 ‘모성건강’을 ‘여성건강’으로 개편하고, ‘여성의 생애주기별 맞춤형 건강정책 추진’을 표방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과 유사한 틀에서 ‘남녀가 함께하는 생애주기별 성·재생산 건강증진 강화’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정책 제안이 부족하며 여전히 여성건강에 관한 대표 지표를 ‘모성사망비’로 설정하고 있다. 모든 시민의 전 생애에 걸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가 책임지고 달성해야 할 것은 ‘모성사망비’ 감소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국가는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권을 주요하게 고민해야 한다. 임신을 중단하고 싶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안전하게 임신중지 시술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 과연 국가는 현재의 실태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을까? 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개선의 의지 얼마나 갖고 있을까?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라는 대단한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여전히 임신중지를 하고자 할 때에는 제약이 많다. 임신중지 시술 비용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병원마다 ‘부르는 게 값’이다. 수술적 임신중지 과정에서는 임신 진단 진찰료, 임신중지 수술 비용, 회복에 필요한 약제 비용, 합병증이 발생할 경우 추가 입원비와 약제비가 발생할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이 모든 비용을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임신중지 시술을 하는 병원도 당사자가 여러 방식을 동원해 찾아야 한다. 유산유도제는 여전히 도입되지 않았다. 임신중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임신중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는 포괄적 성교육의 시행도 아직은 먼일이다.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함에도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많다.

 

평등의 원칙에 따른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정책 필요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가 점차 구체화되고 있는 점은 반가운 일이나, 여전히 관련 정책이 표방하는 관점은 많은 경우에 ‘저출산 위기 극복’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의 전 생애에 걸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법과 정책의 준비는 매우 미비한 상태이다.

 

▲ 2020년, 셰어에서 발표한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곁에, 함께’>, 셰어 홈페이지에서 전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약을 이용한 안전한 임신중지, 수술로 하는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설명 영상도 홈페이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셰어

 

셰어에서 만든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은 포괄적으로 성·재생산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월경, 피임, 성별확정 및 성별정정, 보조생식기술, 임신, 출산, 임신중지, 포괄적 성교육, 일터·교육기관·보호 및 복지시설에서의 성·재생산 권리의 보장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또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를 제시하고 있고, 종합계획의 수립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과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이 의제가 미미하게 다뤄지고 있는 상황이 유감스럽다.

 

그 와중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을 제정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한 점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동시에 여전히 채워져야 할 부분도 많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셰어는 이재명 후보의 공약에서 우회하거나 회피하고 있는 부분들을 짚고,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반차별’의 원칙 하에 통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입장문을 발표했다. 가령, 이 후보는 여전히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본인의 의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사회적 합의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차별금지법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출발점이다. 성별이나 연령, 장애, 인종, 이주 지위,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 등에 따른 차별과 낙인으로 인해 고용이나 노동, 교육, 관련 시설, 정보와 자원 등에 제약을 받는 이들은 차별금지의 원칙 없이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성·재생산 권리의 보장이 단순히 보건복지나 여성 영역이 아니라 노동, 주거, 교육 등 사회 전 영역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때문에 셰어의 기본법(안)에서는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종합계획 수립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저출산’ 대책이 아니라 ‘성·재생산 권리 보장 종합계획’이 세워져야 할 때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경우 유산·사산 휴가에서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제외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제74조 3항의 단서 규정을 삭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임신중지 상담서비스를 표준화하고, 임신중지 시술 방법과 지침을 마련하며, 임신중지 약물 도입을 통한 선택권을 확대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진보당 김재연 후보의 경우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과 여성건강기본법 제정 공약을 제시했다. 기본소득당 오준호 후보의 경우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 제정, 모든 여성에게 월경용품 바우처 제공, 산부인과를 젠더건강의학과로 변경, 유산유도제 신속 도입, 임신중지 시술 건강보험적용 등의 공약을 제시했다. 노동당의 이백윤 후보도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 제정에 대한 의지를 표현했고, 유산유도제 즉각 도입, 사후피임약 일반의약품 지정, 임신중지 시술 건강보험적용, 근로기준법 유산·사산휴가 적용 범위에 임신중지 포함 등을 공약했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후보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공약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길 바란다. 모든 시민의 삶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차별 없이 성·재생산 권리를 누리는 세상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공약을 만날 수 있길, 선거 기간 내내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관한 의제가 널리 이야기되길 간절히 바란다.

 

필자 소개: 김보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에서 활동하고 있다. 근간 『턴어웨이: 임신중지를 거부당한 여자들』(다이애나 그린 포스터 지음, 동녘)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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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달 2022/02/26 [15:07] 수정 | 삭제
  • 낙태죄 폐지됐는데 대체입법 못(안)하고 대선 앞두고 있는 정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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