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낯선 길을 떠나는 것이야

마리 꼬드리, 고티에 다비드 글‧그림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안지혜 | 기사입력 2022/05/18 [09:08]

사랑은 낯선 길을 떠나는 것이야

마리 꼬드리, 고티에 다비드 글‧그림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안지혜 | 입력 : 2022/05/18 [09:08]

오랜만에 옛 선배 B를 만났다. 선배는 코로나로 수입이 준 몇 달 동안, 낮에는 하던 일을 계속하고, 밤이면 고강도 노동으로 언론에도 자주 나왔던 온라인 쇼핑몰 물류센터에서 일했다고 한다. 영화 <모던타임즈>에 나오는 찰리 채플린의 개그가 오히려 인간적이었다며, 기계처럼 일하는 게 아니라 기계도 못하는 일을 하게 만드는 구조에 대해서 실감 나게 들려줬다. 선배의 말맛에 빠져서 듣던 나는, 그 이야기가 예상과 다른 결론에서 끝맺자 조금 당황했다.

 

“그래서 나는 거대 정당이 중요해졌어. 그런 물류센터를 오늘 막을 수 있는 현실 정치가 중요해.”

 

B 선배가 오랫동안 진보 정당과 소수 정당 활동에 힘써왔던 것을 알기에, 그 말이 어쩐지 슬펐다. 선배의 말에 공감하거나, 혹은 반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떨어져 지내는 십수 년 동안, 각자의 시공간에서 생활하며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서로가 더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는 엄청난 틈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달라진 우리는 계속 우정을 쌓아갈 수 있을까?

 

▲ 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고티에 다비드, 마리 꼬드리 쓰고 그림, 이경혜 옮김, 모래알) 중에서

 

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고티에 다비드, 마리 꼬드리 쓰고 그림, 이경혜 옮김, 모래알)는 뿌리가 다른 두 존재가 사랑하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새를 사랑하는 곰이다. 지난 여름, 곰은 새와 함께 보내며 행복했고 ‘너의 곰’이 되었다. 그런데 계절은 둘을 떨어트려 놓았다. 겨울이 오자 새는 따듯한 남쪽으로 떠나야 했고, 곰은 겨울잠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사랑은 용기와 질문을 샘솟게 하니까!

“왜 우리는 해마다 헤어져야 할까?”

곰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한다.

“난 큰 결심을 했어. 세상 끝에 있는 너를 찾아가기로 말이야.”

 

그리고 사랑의 여행을 잘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편지를 쓰기로 한다.

“난 너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기로 했어. 그러면 꼭 네가 곁에 있는 것 같으니까.”

결국 이 그림책은 곰이 새를 만나러 가는 동안에, 새에게 쓰는 연애편지이자 여행기이다.

 

곰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다. 그물에 잘못 걸려 강에 빠져 죽을 뻔하고, 화산이 터지는 뜨거운 길에서 정신이 혼미해져 신기루를 만나기도 한다. 사막에서는 뜨거운 목마름을 견뎌야 했고, 전쟁이 터진 길을 잘못 만나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 하지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집을 떠나 이렇게 먼 길을 혼자 가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 마리 꼬드리, 고티에 다비드 글, 그림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중에서

 

도전은 빈 고목에 몸을 숨기는 법, 지도를 보는 법, 먼 길로 돌아서 가더라도 덜 위험한 길로 가는 법을 배우게 했다. 길에서 만난 고양이, 부엉이, 다양한 친구들의 환대를 받으며, 친구랑 함께하면 두려운 길 앞에서도 겁이 덜 난다는 걸 깨우쳤다. 그리고 스스로가 때로는 꽤 용감하다는 것도, 다정하다는 것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곰은 여행하는 내내 글을 쓰면서 새로운 내가 되어 갔다. 그래서 새와의 만남이 어긋나는 어떤 순간, 곰은 다시 결심한다.

“계속 너한테 편지를 쓸 거야. 내 여행을 끝까지 기록해 보고 싶거든.”

 

맨 처음, 혼자 있는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서 편지를 쓰기로 했던 곰은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해 쓰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기록 안에는 사랑의 본질을 암시하는 마음들이 녹아있다. 새의 섬에서 새의 얼굴 가면을 써보고, 새의 둥지에서 잠을 이루고, 새가 되는 꿈을 꾸지만, 곰은 자신의 또 다른 마음도 알고 있던 것!

“널 다시 만날 생각을 하면 너무나 행복하면서도 사실은 아주 조금 겁이 난다는 것도 말해야 겠지?”

 

그렇다면 이 둘은 무사히 만나서,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곰과 새를 방해하는 악인이 없이도, 이렇게 조마조마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또, 마지막에 드러나는 새의 모습은 어쩐지 내 안에 있던 어떤 편견을 부숴주는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난다. 시간과 공간의 계절이 바뀌면서 이들을 둘러싼 친구들, 잠시 만난 동물들 모두 기꺼이 환대하는 점도 인상 깊다.

 

▲ 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고티에 다비드, 마리 꼬드리 쓰고 그림, 이경혜 옮김, 모래알) 표지

 

사실 나는 세상살이에 좀 찌들어서인지, 세상 끝에 있는 너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겨운지, 새의 서식지로 곰이 찾아가는 것이 과연 새에게 기쁜 일인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이 책을 읽었다. 거기다 세상에 끝에 있는 곰과 새를 정치적 가치관이 다른 사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 혹은 인간 종과 다른 종의 관계로 대입해보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어쩌면 사랑은 세상 끝에 있는 너를 반드시 만나, 너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코 닿을 수 없는 너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시도 안에 있는 것 아닐까. 이 그림책을 보다 보면, 사랑은 새를 만나는 순간이 아니라 새를 만나기 위해 글을 쓰는 순간에 담겨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게 익숙한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용기 내어 나의 세계를 너에게 확장해보는 것, 사랑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닿아보려는 노력의 여정 어디쯤에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종종, 내 오랜 사람들과의 우정과 인연이 내가 길을 떠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닿으려고 하는 순간들, 그러니까 그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어디쯤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필자 소개]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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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색 2022/05/29 [07:49] 수정 | 삭제
  • 바람의 질감 표현 너무 좋다.
  • OO 2022/05/18 [19:36] 수정 | 삭제
  • 사랑도, 우정도 확장이죠. 열려라 참깨!
  • 2022/05/18 [16:45] 수정 | 삭제
  • 그림책이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새삼 알겠습니다.. 작가들의 세계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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