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했던 파트너 돌봄이 나에게 왔다

[사회적 소수자와 돌봄] 동성 파트너를 간병하며 경험하고 배운 것들

캔디 | 기사입력 2022/06/10 [08:54]

예상치 못했던 파트너 돌봄이 나에게 왔다

[사회적 소수자와 돌봄] 동성 파트너를 간병하며 경험하고 배운 것들

캔디 | 입력 : 2022/06/10 [08:54]

※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었고, 서로 돌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돌봄 사회를 위하여,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돌봄 현장을 조명하고, 다양한 돌봄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파트너의 암 진단 그리고 시작된 간병

 

2년을 꽉 채워 투병하고, 파트너가 세상을 떠났다. 40대 초반이었던 동성 파트너의 투병 생활을 함께하며,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깨닫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나에게 차곡차곡 쌓였다.

 

나의 파트너 력사는 튼튼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심각하게 아픈 일도 많지 않았고, 그때의 우린, 건강을 걱정하기엔 젊기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건강을 챙기기 위해 홍삼도 먹고 운동도 곧잘 했지만, 그 이상 뭔가를 더 하진 않았다. 아니, 뭘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발병하기 2년 전, 파트너는 급작스러운 하혈을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하혈은 꽤 오래 갔고, 응급실과 산부인과 진료를 여러 차례 받았다. 큰 질병이나 원인이 발견되지 않은 채 다행히 하혈은 멈추었고, 이후에는 다시 산부인과에 가지 않았다. 자주 병원에 가서 상태를 확인하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돌봄의 시작은 종종 잔소리이다. 돌봄은 상대의 소소한 상태를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 나의 파트너, 력사가 직접 만든 식탁이다. 목공을 좋아한 력사는 식탁, 책장 등을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캔디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언젠가부터, 배가 아프다는 말을 종종 하기 시작했다. 등을 톡톡 치면 배가 아프다는 말에 병원에 가라 했지만, 심하게 아픈 게 아니었기에 병원행은 하루하루 미뤄졌다. 그러던 5월, 작정하고 친구가 의사로 일하는 병원에 찾아갔다. 증상을 묻던 친구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당장 초음파와 CT 등을 찍어보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 일차 의료기관에서 초음파 검사를 하고, 결과를 받고, 이러기까지 한 달여 시간이 걸렸다. 의사는 우리에게 큰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큰 병원의 진단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난소암 4기.

 

그때까지도 우리는 저 단어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이런 병을 앓아 본 적도, 간병을 해본 적도 없는 우리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나마 주변에 가족들의 큰 병을 겪어본 친구들이 몇 있어, 이런저런 조언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우리의 상황과 100% 일치할 수는 없었다.

 

동성 파트너 관계인 우리였지만, 일차 의료기관에서는 별 무리 없이 같이 들어가서 의사 선생님의 상담을 받곤 했다. 하지만, 대형병원에서는 약간 달랐다. 둘의 관계를 물었고, 가족을 데려오라고 했으며, 가족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등본을 떼 가는 것도 아닌데, 친구라고 말한 내 입을 정말 꿰매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냥 가족이라고 해도 된다.>

 

‘입원’은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린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가서야 내가 ‘보호자’임을 알 수 있었다. ‘보호자’라니. 내가 이이의 보호자가 맞긴 한데, 내 명칭이 보호자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나의 것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커다란 의지와 확신을 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이후 2년 동안 많은 것들에 영향을 미쳤다.

 

병원에서는 ‘법적 보호자’가 아닌 나를 크게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면 거듭거듭 어머니를 모셔올 것을 제안하곤 했다. 나는, 존재와 몸짓으로 내가 보호자임을 끊임없이 알렸다. 주도적으로 궁금한 것을 묻고, 방향을 묻곤 했다. 어차피 이 병원에 하루 이틀 다닐 것이 아니니, 내가 보호자임을 계속 주지시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실제로 어느 순간 이후에 의사는 더 이상 어머님을 제안하지 않기도 했다. <병원이 ‘내가 보호자’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다음 스텝을 논의하고 현재 상황을 알아야 할 때 정말 중요하다.>

 

‘보호자’의 일들, 시작도 끝도 없는

 

암으로 투병을 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항암 약이 독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찌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발을 맞추고 싶어 하는 그녀를 위해 적당한 업체들을 찾고 예약하는 것부터가 내 일의 시작이 되었다.

 

병원에 주기적으로 다니고, 치료를 위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 돌봄이 대부분의 동성 커플에게는 정말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아 갔다. 병원 예약 시간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었고, 환자의 상태는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열이 났고, 어느 날은 또 평소처럼 잘 움직이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다행히 동료들이 상황을 이해해 줬고, 재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일반 회사에 다니는 이들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일들이었다.

 

보호자가 1인이라면 더 어려우리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하루 세끼를 요리해 가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아침에 일어나 음식을 만들고, 또 그것을 치우고, 또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그 행위만으로도 지쳤다.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은 차가 없어 택시를 부르고 또 불렀고, 응급실에 가야 했던 날은 택시가 빨리 잡히지 않음을 원망하기도 했다. <돌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주 돌봄자 스스로가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 것이 돌봄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환자만큼, 보호자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다.>

 

내 경우 이 모든 돌봄의 시간을 파트너의 어머니,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이 함께해주었다. 어머님은 아픈 딸을 너무나 옆에 끼고 돌보고 싶어 하셨지만, 빠르게 그 돌봄을 나누어야 함을 받아들이셨다. 70대의 노모에게 병원 간이침대는 너무 힘들었고, 이미 오랜 시간 함께 살지 않았던 둘은 24시간 붙어 있는 것부터가 서로에게 스트레스임을 깨달았다. 어머님은 딸이 시간을 나누어 몇 주는 자신과 함께, 그리고 또 몇 주는 나와 함께 머물며 장소에 따라 다른 돌봄을 주고받는다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인정했고, 나를 또 다른 보호자로 받아들였다. 물론 내가 딸의 파트너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셨지만, 믿고 신뢰하고 논의할 수 있는 보호자임을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돌봄 과정에서의 스트레스를 떨쳐 낼 수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은 우리 모두가 서로 돌봄을 나누는 관계임을 적극적으로 알려왔다. 입원했을 때는 돌아가며 면회를 왔고, 항암치료를 할 때는 돌아가며 병원에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돌봄의 경험이 있고 없음을 떠나, 나와 파트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함께 논의하고 제공해준 친구들 덕분에 투병의 전 과정이 조금은 수월할 수 있었다. 돌봄을 나서서 나눠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기도 했다. 친구들은 투병이 고립되지 않아야 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또 한편으로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사실 주요한 결정은 환자 본인의 선택이 늘 우선되곤 하였다. 항암치료가 효력이 없었던 파트너에게, 그럼에도 양약을 믿고 치료를 따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암 환우들의 커뮤니티에는 온갖 정보들이 있었고, 심사숙고하고 취사선택한다 해도 모든 선택이 치유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환자의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믿음은, 파트너의 어떤 결정들을 반박하거나, 거절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사실, 가장 후회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돌봄 자가 되었을 때, 판단과 결정을 하는 것이 누구의 몫이 되는지는 정말 중요하다. 환자의 의지와 선택을 존중해야 하지만, 혹시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않고 조금은 싸우고, 목소리를 높이고, 보호자로서 내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있다고 강조할 것이다.

 

▲ 력사 그리고 나, 친구들과 다 함께 했던 대마도 캠핑.   ©캔디

 

다가온 죽음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

 

2년여에 걸쳐, 수많은 항암을 하고 또 했던 파트너는 어느 날 갑자기 ‘호스피스로 옮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전주에도 그런 말은 전혀 없었던 지라, 마음의 준비도 없이 호스피스로 이관되는 기분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다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고 대비하고 있지 않았기에, 의사가 전한 비보는 분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파트너는 자연치유에 매달렸다. 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세뇌했고,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변화를 지켜보는 나는, 이 사람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 당시 파트너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마음이 매우 초조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분노와 버티기로 소비할 순 없었다. 당사자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정하게 하고, 요양병원에서 나와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고, 어머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이번에도 친구들이 발 벗고 나서주었다. 매일같이 친구들이 돌아가며 파트너를 방문했고, 설명하고 설득하기를 반복했다. 결국 파트너는 요양병원에서의 치료가 불필요함을 인정하고, 퇴원하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퇴원 후의 거취도 사실상 문제이긴 했다.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라 4층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우리 집에는 갈 수 없었고, 어머님이 사시는 집은 너무 멀었다. 또 친구들의 손을 빌렸다. 여분의 방이 있는 친구들이 큰 결심을 하고 공간을 내어주었다. 축복 같은 일주일의 순간이었다.

 

돌봄의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몇 개 꼽자면, 그중의 하나는 분명 그 일주일이다. 분명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매일같이 친구들이 찾아왔다. 다 같이 모여앉아 추억을 나누었고, 유언장을 함께 쓰고 공유했고, 게임을 하고 수다를 떨었다. 나에게도 약간의 여유 시간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하루하루가 나에겐 가시방석이었다. 친구들이 파트너를 봐주는 동안 병원 호스피스 병동 진료 예약을 하고, 의뢰서를 들고 찾아가 상담했다. 가족이 와야 한다는 설명에, 당사자 동의서를 들고 가서 친구(내)가 환자를 처음부터 돌보았고, 지금도 돌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꾸역꾸역하고 나서야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의사의 판단을 듣고, 그 병원의 호스피스 시스템을 듣고, 예약을 했다. 돌아와서는 호스피스에 가서 좀 요양하고 다시 치료를 받겠다 결심하는 파트너의 말을 받아주며, 그래도 호스피스를 가긴 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설득했다. 자식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는 어머님을 바라봐야 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엄마가 아닌 친구들과 있는 것을 선택한 딸을 서운해하는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몸은 편했지만, 이후의 모든 과정을 잘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중압감이 점점 높아져 갔다.

 

환자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져 갔고, 본인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내가 이이의 ‘진짜 보호자’가 될 수 없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죽음을 곁에서 지키고자 했던 어머니는 당연히 호스피스 병동의 단 한 명만 가능한 보호자가 되었다. 절친한 친구인 나는, 어머니의 자리를 뺏을 권리도, 자격도 없었다. 혹시나 교대하자고 연락이 올까 싶어 매일매일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며 연락을 기다렸지만, 결국 병동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파트너와 어머니에게 쪼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진통제 등 통증을 줄여주는 처방을 했고, 향후 연명치료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했다고 한다. 파트너는 다행히 이전에 사전연명의료 거부 신청을 해둔 상태였다. 다시 한번 본인의 선택을 확인하고, 가족에게도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던 듯하다. 이 과정을 겪으며, 어머니는 좀 더 확실하게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계셨다.

 

동성 파트너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소원을 뿌리치는 것을 누가 할 수 있을까. 파트너는 병원을 싫어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한 일주일 있었나? 병원에 더 이상 있기 싫다는 환자의 말을 뿌리칠 수 없어 이번에는 이이를 데리고 막내 이모네 집으로 갔다. 점점 걷는 것도, 일어나 앉는 것도, 먹는 것도 힘들어지는 이를 보는 것은 그저 견뎌야 하는 형벌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파트너에게도 지옥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자존심이 세고,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파트너는 자력으로 화장실을 가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오면서 자기 죽음을 깨달았다.

 

이 시기에 어머님은 나에게 많이 의지하셨다. 자식을 돌보기엔 체력이 부족한 자신을 알았고, 지금 이 순간의 서러움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님과 모든 추억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한 공간에서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돌봄을 나누는 것은 의미 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나는 끊임없이 파트너의 기준에서 판단했지만, 나보다 수십 년을 더 살아내신 어머님의 판단은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파트너의 거절과 관계없이 기저귀를 샀고, 병원에 가기 싫다는 말에도 이젠 병원에 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려주셨다. 나와 함께 논의하고 내리는 결정이기도 했기에, 내심 감사하기도 했다.

 

중요했던 순간 중 하나는, 친구들이 함께 편지를 써서 어머님께 건넸을 때였다. 그 편지에는 우리가 둘이 얼마나 가까운지, 내가 얼마나 파트너를 열심히 돌봤는지와 함께 나를 ‘상주로 올려줄 것’을 부탁하는 말이 쓰여있었다. 한참을 편지를 읽으시던 어머님은 장례식은 본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상주로 이름을 올려줄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상복은 함께 입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파트너의 마지막은 호스피스 병동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당연하게 보호자는 어머님이 되었다.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이번엔 정말 마지막일 것만 같은데, 전화로 사망 소식을 듣게 될까 봐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웠다. 그때가 내가 이 사람의 법적 파트너가 아닌 것이 제일 서러웠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어찌어찌하여 병실에는 나와 어머님 둘이 함께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환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또 한편으로는 정신을 붙들어 맨 채 장례식 준비를 했다. 장례식장을 고르고, 상조회사에 전화하고, 장지를 고르고, 화장장을 예약했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현실이었다. 마음을 다해 슬퍼하기만 할 수 있는 것도 큰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또 한편으로는 이 모든 선택을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파트너는 1년 전 오늘 2021년 6월 10일 새벽, 어머님과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을 맞이했다.

 

▲ 력사가 잠든 곳 ©캔디

 

돌봄의 경험이 준 아픔과 선물을 안고서

 

2년의 세월은 생각보다 길었고, 내가 마주했던 모든 돌봄의 순간은 사실 낯설거나, 어렵거나, 고민스러웠다. 상대의 판단을 존중하고, 나의 판단을 믿으며, 주변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것을 내가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변과 돌봄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병세는 점점 악화하여 갔기에, 시간이 길어져도 모든 경험치가 높아질 수는 없었다. 늘 새로운 상황이 닥쳤고, 새로운 고민거리를 맞이하기도 했다.

 

아픈 시간이었지만, 돌봄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투병과 관련된 정보, 호스피스 병원 찾는 법, 장례식 치르는 법 같은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지, 주변의 도움은 어떻게 고마워하는 것인지, 나를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등, 앞으로의 삶의 나침반이 될 경험들도 많았다.

 

또한 동성 파트너 관계에서 돌봄은, 특히 사망이 동반되는 돌봄 경험은, 나의 위치를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선의에 기대야 하는 모든 순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겨야 하는 모든 추억이, 어떻게 해서라도 함께 해야 하는 순간들이 내가 동성 파트너임을, 숨겨진 사람임을 실감하게 했다. ‘그럼에도’ 해야 하고,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고, 다양한 방안을 친구들과 함께 찾아갔기에 후회하지 않는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직도 집안 곳곳에는 파트너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이 흔적을 보듬어 안고, 혹은 지워내 가며 살아가는 것 또한, 돌봄의 연장일 것이다. 상대방을 돌보는 일로 시작되었던 나의 여정은 나를 돌보는 일로 마무리될 것이다. 이 돌봄의 종착점이 어서 빨리 찾아오길, 오늘도 기도한다.

 

[필자 소개] 캔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성소수자로서 어떻게 나이들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은평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동네 친구들과 즐겁게 살아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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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자 2022/07/17 [17:37]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 demian 2022/07/02 [19:47] 수정 | 삭제
  • 많은걸 배우고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돌아보기 힘든 시간이셨을텐데 다른 분들 위해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나가던 2022/06/30 [19:29]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 헤드셋 2022/06/18 [10:49] 수정 | 삭제
  • 이 글이 나에게로 왔다
  • 차차차 2022/06/16 [21:37] 수정 | 삭제
  • 경험을 나누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 mnipar 2022/06/15 [17:36] 수정 | 삭제
  • 생활동반자법을 위해 저도 한웅큼 더 노력할게요. 그리고 캔디와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한 오늘과 내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 오늘이좋은날 2022/06/15 [12:42] 수정 | 삭제
  • 이렇게 담담하게 글쓰기 참 어려웠을거 같은데,,,,, 매 순간 순간이 참으로 무거웠을 듯 합니다. 이제 홀로 남은 자신을 잘 돌보시길 따뜻한, 솔직한 글 고맙습니다
  • 크래프트 2022/06/15 [08:22] 수정 | 삭제
  • 마음이 너무 너무 아프네요.. 동반자법을 위해 행동해야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 2022/06/15 [04:01] 수정 | 삭제
  •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ㅇㅇ 2022/06/14 [21:55] 수정 | 삭제
  • ㅜㅜ...력사님의 평안을 기도합니다ㅜㅜ
  • 2022/06/14 [10:59] 수정 | 삭제
  •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렇게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파트너의 투병기간을 함께한다는 돌봄의 책임, 그 무게를 돌아봅니다.
  • 설탕 2022/06/14 [10:55] 수정 | 삭제
  • 잘 읽었습니다. 진솔한 글 감사합니다
  • 바다 2022/06/13 [08:38] 수정 | 삭제
  • 긴 여운이 남습니다.
  • 사운드 2022/06/12 [14:02] 수정 | 삭제
  • 서로의 가족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만, 그래도 사망에 이르는 투병을 할 경우엔 파트너와 함께하기가 어렵거나 불편해지는 상황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게 되었어요. 마음이 많이 무겁네요.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앞으로도 주욱 생활동반자법에 투표할 겁니다.
  • 당근 2022/06/12 [11:22] 수정 | 삭제
  •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 2022/06/11 [23:13] 수정 | 삭제
  • 읽고나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본인이 겪으신 일들을 담담하게 말씀해주셔서 저도 저와 제 파트너의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 독자1 2022/06/11 [15:45]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 유리 2022/06/10 [21:58] 수정 | 삭제
  • 2년의 시간을 어떻게 버티고 함께 했을지... 감도 잘 안오네요. 이런 경험을 써주셔서. 정말 고맙게 읽었어요.
  • 독자 2022/06/10 [13:18] 수정 | 삭제
  • 생활동반자법은 인권이구나 하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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