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를 일터와 삶터에서 피부로 느끼고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전국의 여성농민들을 만납니다. 여성농민의 시선으로 기후위기 그리고 농업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대안의 씨앗을 뿌리는 새로운 움직임과 공동체적 시도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대야미 범밧골 농장에서 만난 30대의 여성 농부
“은빛님, 11월 3일에 인터뷰 가능할까요?” “11월 3일이면 나무날이네요?” “(나무날?) ... 아! 네~ 목요일이요.” “가능할 것 같은데 제가 집에 가서 날적이 보고 다시 한번 확인할게요.” “(날적이? 다이어리?) ... 아 네~ 감사합니다.”
심상치 않은 단어 사용으로 만나기 전부터 호기심을 자아냈던 은빛 씨를 만나러 군포의 대야미역으로 향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배경이기도 한 대야미역(드라마의 ‘당미역’은 당정역과 대야미역을 합친 것으로 알려져 있음)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듯, 전철 창밖으로 가을 산과 밭 풍경이 펼쳐졌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은빛 씨(36세)는 대야미에 살며 농사짓는 소농(小農)이자, 학교나 기관 등에서 어린이와 시민들에게 농사의 가치를 전하는 교육 활동가다. 본인은 “대야미 마을에서 농사짓는 이모”로 불리고 싶단다. 현재 벼농사 100평과 밭농사 500평을 짓고, 틈틈이 마을의 교육용 논과 텃밭도 관리하고 있다.
돈이 없어도 ‘자급’할 수 있으면 곤궁하지 않은 삶
농사를 지어보기도 전에 ‘농사’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은빛 씨. 인도 유학 시절 델리에서 대학을 다닐 때, 그의 관심사는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집 바로 옆이 도시 빈민촌이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에 눌려 자주 싸우고 얼굴이 어두운 도시 빈민의 삶을 목격했다. 그러다 학교를 쉬면서 히말라야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시골의 빈민들을 만났다.
“돈으로 치면 더 가난한 건 시골 빈민들인데 늘 행복해 보이고 표정이 좋았어요. 일단 환경이 달랐어요. 도시 빈민들은 더러운 굴에 살지만 시골에는 나무와 풀, 흙이 있었죠. 도시 빈민들은 자기가 직접 돈을 벌거나 구걸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잖아요. 그에 비해 시골 빈민들은 부족하더라도 농사와 채취로 어느 정도 자급을 했어요. 농사는 혼자 하기 어려우니까 서로 도우며 살았죠. 생태와 자립(자급), 공동체, 이게 어우러져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구나 느꼈어요.”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의 활동이 뭘까를 고민하니 ‘농사’라는 답이 나왔다. 귀국해서 농사를 짓다가 2019년, 고향인 군포로 돌아와 대야미에 터를 잡게 됐다.
마침 대야미에서는 LH와 환경부가 추진하는 택지 개발 사업을 반대하며 ‘생태’의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은빛 씨가 처음 농사를 배운 전국귀농운동본부도 이곳에 교육농장을 두고 있었다.
은빛 씨는 마을 이웃들이랑 텃밭 농사를 짓고 논과 밭에서 거둔 곡식을 마을 공유 방앗간에서 탈곡한다. 넘치는 작물은 이웃과 나누어 먹거나 때때로 열리는 마을장터에서 판매한다. 목화를 재배해 그 솜으로 마을 공방에서 옷을 지어 입는다. 이웃과 밴드를 만들어 마을 잔치에서 연주도 한다.
작년 11월에는 마을 공유 공간도 생겼다. 마을 주민 한 명이 조립식 주택을 공유 공간으로 내놓은 것. 공유 공간 옆에는 적정기술(현지의 재료와 작은 자본을 이용해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하는 기술)로 화덕이 만들어졌고 가끔씩 피자를 구워 먹는다.
“멀어봤자 버스 타고 15분? 마실 나오는 거리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지나가다가 인사하고 반찬 많이 하면 갖다 주고, 모여서 같이 놀고먹고 활동하는 모습이 꼭 ‘마을’ 같아요.”
이곳을 대야미 ‘마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설명하는 은빛 씨 얼굴에 대야미 부심이 가득했다.
농사, 인간과 자연이 주고받는 ‘완벽한 활동’
은빛 씨는 석유 에너지(기계)를 쓰지 않고 삽과 괭이, 호미, 낫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다. “밥을 먹어서 충전한” 딱 그만큼의 에너지로 “지을 수 있는 만큼만 짓는다.” 농약이나 화학비료, 비닐을 써야 지을 수 있는 정도까지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생태 농사는 사실 저의 투철한 구두쇠 정신에서 비롯됐다고 할까요. 화학비료를 안 사니까 돈 안 들고 내가 (작물에서) 받은 씨앗을 심으면 되니까 씨앗을 사지 않아도 되잖아요. 생태 농사가 돈이 많이 들면 안 했을지도 몰라요.(웃음)”
은빛 씨의 밭이 있는 수리산 자락 범밧골 농장에는 대략 100가지의 작물이 꽃과 더불어 자라고 있다. 밭 옆에는 폐파레트로 만든 창고와 퇴비간, 생태 뒷간이 자리하고 있다. 생태 뒷간의 오줌과 똥은 따로 모아져 퇴비간에서 발효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지주대조차 흔한 철심이나 파이프를 쓰지 않고 나뭇가지 등 자연물을 이용한다. 농사에 필요한 물은 빗물과 개울물을 받아서 충당한다.
범밧골 농장은 은빛 씨의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생태’라고 하면 흔히 나무나 숲을 떠올리지만, 은빛 씨에게 생태는 ‘순환’이자 ‘연결’이다. 인공적인 투입물 없이 땅이 길러낸 것을 거두어 먹고, 사람의 배설물과 농사 과정의 부산물을 다시 땅에 돌려준다. 그래서 농사는 은빛 씨에게 인간과 자연이 주고받는 “완벽한 활동”이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과의 연결”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다.
대야미에도 찾아온 기후위기, 벼 구출 작전
은빛 씨가 기후위기를 체감한 건 대야미에서 농사짓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전에는 농사가 기후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어요. 절기에도 맞았고 비가 조금 안 오거나 조금 많이 오는 건 있었지만, 재난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지금은 해가 갈수록 농사가 어려워질 수 있겠다는 걸 체감해요. 올해만 해도 봄에는 완전 가뭄, 여름에는 폭염에 갑자기 폭우, 가을에는 완전 가뭄...... 중간이 없는 거예요.”
수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을 받아 벼농사를 지었는데 올봄에는 개울이 말라버렸다. 논 바로 아래 있는 샘에서 물을 퍼 왔다. 쩍쩍 갈라진 논바닥 안에 못자리, 딱 그만큼의 공간에만 물을 넣었다.
모내기할 때가 되자, 하는 수 없이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바닥이 보일만큼의 물만 겨우 받아 모를 심었다. 다행히 그 후에 비가 내려 벼가 잘 자란다는 안심도 잠시, 여름이 되자 폭우가 쏟아졌다. 논 안에 토사가 밀려 들어와 벼가 쓰러져 묻혀버렸다. “그래도 논이 겨우 100평이니까” 일주일 내내 그 토사를 긁어내면서 벼를 꺼냈단다.
“토사 속에서 벼를 건져 올리는 마음이 붕괴 현장에서 생존자를 구출하는 심정 같았어요.”
은빛 씨는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며 공동체의 힘을 실감했다고 한다. 마을 단톡방에서 수해 복구를 돕자는 얘기가 나왔다. 이웃들 열다섯 명이 달려왔고 힘을 모아 은빛 씨의 논을 복구했다. 수해로 망가진 길도 정비했다. 추수 때 보니 벼 낱알도 작고 수확량도 적었지만, 이웃들과 함께 살린 것이기에 더 귀하다.
거대한 탄소 저장고, 흙을 지켜야 하는 이유
은빛 씨가 생태 농사를 짓고 있는 범밧골 농장에는 다양한 멸종 위기종 동물들이 살고 있다. “맹꽁이는 감자만 캐면” 나오고, 황조롱이와 참매도 놀러 온다. 반딧불이를 비롯한 다양한 곤충들도 살고 있다.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고라니도 이곳에선 콩잎 순지르기(곁순 제거)를 대신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요새는 산이나 숲도 약을 쳐서 관리하잖아요. 농사를 지어도 관행농으로 농약을 치고 화학비료 쓰다 보니까 (땅이 황폐해지고), 그나마 생태 농사를 짓는 곳에 생물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해요.”
생물 다양성이 파괴되고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면 인류 또한 위협받는다. 논과 밭은 먹거리를 길러내는 터전일 뿐 아니라 다양한 생물이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논의 경우, 자연 습지가 감소함에 따라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대체 서식지의 역할로 주목받고 있다.
더불어 흙은 탄소를 흡수하는 거대한 탄소 저장고다. 건강한 흙에 사는 미생물들은 탄소를 토양 속에 격리하는 역할을 한다. 흙을 살리는 것이 기후위기 대응방법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지만, 지금의 산업형 농업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대규모 농지에 한 가지 작물만 심고 제초제와 농약으로 관리하는 방식은 오히려 흙을 고갈시킬 뿐이다.
은빛 씨처럼 다양한 작물을 돌려짓고 퇴비를 직접 만들어 쓰면 땅속 미생물과 유기물의 함량이 높아져 흙의 탄소 저장 능력이 되살아난다. 생물 다양성을 지키고 흙의 힘도 되살리는 생태 농사가 기후위기 시대의 희망이자 보루인 셈이다.
먹거리 하나라도 자급해 본다면 ‘전환’이 시작될 것
은빛 씨는 도시에 사는 독자들이 “차 타고 주말농장까지 멀리 갈 필요 없”이, 베란다나 옥상 텃밭에서, 그도 어렵다면 “문 앞에 화분 하나 놓고 작물을 키워보길” 권한다.
“딱 하나의 작물이라도 내 밥상에 올려보는 경험과 실천이 중요해요. 그 작은 경험 하나가 생각을 바꿔요. 마트에 가면 제일 싸면서 쌩쌩한 채소를 고르게 되잖아요. 그런데 내가 직접 상추를 길러서 거둬 먹으면 ‘이 상추가 천원밖에 안 한단 말이야?’ 하는 생각부터 들거든요.”
이렇게 먹거리의 극히 일부라도 자급해 본다면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겠다. 소비만 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보는 것, 자연의 순환 고리 속에 놓여보는 것, 그래서 인간이 다양한 비인간 생물들과 연결돼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전환’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마을마다, 지역마다 최소 100명의 사람이 생태적, 자립적, 공동체적인 텃밭을 일군다면 기후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식(食), 의(衣), 주(住), 락(樂)-먹고 입고 즐기는 속에서 소소한 전환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이런 삶을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어요.”
기후위기의 대안을 이미 자기 삶으로 사는 사람, 은빛 씨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필자 소개] 나랑(김지현) 독립 인터뷰어. 글쓰기 안내자. 목소리가 되지 못한 목소리를 기록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게 안내한다. 지금은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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