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를 일터와 삶터에서 피부로 느끼고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전국의 여성농민들을 만납니다. 여성농민의 시선으로 기후위기 그리고 농업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대안의 씨앗을 뿌리는 새로운 움직임과 공동체적 시도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만 오천 평 과수원의 ‘대표’가 되기까지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짓기 시작했어요. 처음 2~3년은 견습 기간이었죠. 아빠랑 겁나 싸웠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안 맞았어요. ‘나 못 해 먹겠다’고 집을 나간 적도 있었죠. 그러다가 아빠가 3년 전에 저한테 전권을 넘기면서 제가 대표가 됐고, 땅도 제 명의가 되면서 세대교체가 된 거죠. 엄청 싸워서 얻어낸 권한인 거예요.”
평소에는 둘이 작업하다가 봄에 인공 수분할 때, 가을에 배 딸 때 일손이 많이 필요하면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트위터에서 모집을 하기도 하고, 인근에 사는 이주노동자들을 일시 고용하기도 한다.
서울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아산으로 내려온 지 6년, “지금 생각해보면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말하는 후주 씨.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유기농 전환이 남긴 건 ‘빚’
지금 후주 씨네 과수원의 배나무는 1958년 할아버지가 배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심은 나무들이다. IMF 금융위기 때 사업이 힘들어진 부모님이 내려와 농사에 합류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유기농으로 완전히 전환했다. 전환은 쉽지 않았다. 농약에 의존한 세월이 길다 보니, 자생력이 떨어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첫 3년은 아예 열매를 맺지 못했다.
유기농 배 농사의 선구자 격인 부모님은 유럽, 캐나다 등에 연수를 다녀오며 열정을 쏟아부었다. 십수 년을 고스란히 바친 끝에 “나무들도 자기 사이클을 찾고, 사람도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되면서 유기농 농사가 자리 잡았다.
공들인 과수원이 위기에 봉착한 건, 후주 씨가 서울에서 철학과 석사 학위를 딸 즈음이었다. 연로한 부모님의 농사를 이어받기로 한 여동생이 농사를 포기하면서 과수원이 공중분해될 상황에 처한 것.
“식품공학과를 나온 여동생이 농사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는데, 막상 해 보니 농사랑 너무 안 맞는 거죠. 특전사 나온 제부도 와서 한번 시도해 봤는데, 특전사를 다시 가지 농사는 못 짓겠다고.(웃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봐 온 게 있어서 그런지 일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었어요. 또 어린 남동생 유학을 보내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했죠.”
철학 공부할 때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말할 정도인 후주 씨였지만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후주씨가 물려받은 건 농사만이 아니었다. 빚도 함께였다. 유기농 농사를 정착시키기까지 아빠가 그간 상당한 액수의 빚을 져 왔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제 입장에서는 억울했어요. 엄청 울기도 했고요. 나는 그냥 철학 공부하면서 속 편하게 사는 게 좋은데, 왜 농사지으라고 해서 내 인생 꼬아놨나 싶었죠.”
몸이 고된 건 참을만했지만 마음이 힘드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우울증까지 생겼다. 빚도 빚이지만 아빠랑 사사건건 부딪치는 게 더 힘들었다. “성인 자식과 부모가 같이 살면 생기는 당연한 문제들”에, 가부장적인 아빠의 태도까지 더해져 죽을 맛이었다.
후주 씨는 가업을 승계받는 청년 농부들이 “일이 힘들고 돈이 안 벌리는 것보다 부모님이랑 트러블이 생겨서” 농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한다.
“(연로한) 부모님 입장에서는 힘드니까 자식들한테 물려주려고 ‘와서 농사 지어라’ 하죠. 그런데 막상 직장 관두고 내려오면, 물려주는 게 불안한 거죠. 가족이니까 일을 막 시키면서도 월급을 따박따박 쏴주진 않잖아요. 자식 입장에서는 착취당하는 거죠. (그에 대해 문제 제기하면) ‘네가 여기서 먹고 자는 값이 얼만데’, ‘어차피 나중에 다 물려줄 건데’ 이러면서 싸우기도 하고. 생활 습관이나 자녀 양육 문제에 대해서 다투기도 하고요.”
지난한 싸움 끝에 전권을 넘겨받고 착실하게 농사지은 결과, 다행히 지금은 빚의 절반 정도 갚았다.
한국 농가, 40세 미만 경영주 가구는 1%대에 불과
지금 농촌에 후주 씨 같은 2030 세대가 얼마나 있을까? 통계청의 ‘2020 농림어업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농가 인구 중 60대 이상이 57.0%를 차지하며 후주 씨와 같은 2030 세대는 11%(28만 3천 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40세 미만 청년 경영주 가구의 비중은 고작 1.2%(1만 2천 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화 이후 한국 사회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위해 농촌보다는 도시를 중시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것이 장려됐다. 또 도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농작물은 싸게 공급되어야만 했다. 부담은 농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1990년대 들어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면서 값싼 수입 농산물이 들어왔고, 농가 소득은 더욱 낮아졌다. 게다가 정부는 농업의 규모화, 시설화를 추진하며 소수의 대농(大農)과 농업 관련 기업만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농가 소득은 2019년 기준으로 도시가구 소득(2인 이상)의 62.2%인 상황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20년 농가경제의 실태와 변화요인’) 더욱 심각한 건 농가 소득 중 농사와 직결되는 ‘농업’으로 벌어들인 소득만 따지면 24.9%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제 농촌에서 나고 자란 청년은 농사를 이어받지 않고 도시로 떠난다. 힘들게 농사지어도 먹고살기 힘든 구조에서 부모 또한 자식에게 농사를 물려주려 하지 않는다.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청년들은 농촌을 떠나 농촌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는데, 개발 자본은 농지를 투기와 개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도로와 주택, 산업단지 건설 등으로 1년에 전체 농지의 1%씩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사회가 발전주의에 갇혀 도시화와 산업화만을 추구하며 농업과 농촌을 등한시해 온 결과는, 이렇듯 ‘농촌의 소멸’로 드러나고 있다.
농산물 먹거리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안타까워
후주 씨는 지금 상황이 심각한 것에 견주어 정치권이나 시민들이 위기감을 못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한다.
“경제가 어떻고, 부동산이 어떻고, 그래서 나라가 무너진다 이런 얘기는 계속해도 농업과 먹거리에 대해서는 위기감이 없는 것 같아요. 진짜 마트에서 감자 하나 가지고 몸싸움을 해 봐야 정신을 차릴까요?”
한국은 쌀 이외의 대부분 작물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제 고령의 농민들이 돌아가시고 기후위기 등으로 식량 수급이 불안정해져 다른 나라들이 문을 걸어 잠그면, 한국인들은 그야말로 “밥이랑 배추, 소금만 먹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라고 후주 씨는 말한다. “극소수의 부유층만 신선한 농산물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 것.
후주 씨는 청년 농부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하루만 출하를 안 해도 이 나라가 비상이 걸릴 거다”라는 말을 한다며, 시민들이 “(먹거리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안타깝다”라고 말한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게 공산품이 아니라는 걸 인식해야 해요. 공장이야 바로 지어서 돌리면 물건이 나오지만, 농사는 그렇지 않잖아요. 농업기술이 있어야 하고, 농지가 있어야 하고, 생물체이기 때문에 최소한 1년이라도 작기를 거쳐야 한단 말이에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한 시민들의 관심이 절실하다. (인터뷰가 2편에서 이어집니다)
[필자 소개] 나랑(김지현) 독립 인터뷰어. 글쓰기 안내자. 목소리가 되지 못한 목소리를 기록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게 안내한다. 지금은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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