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죽을 수 있을까

‘받고 싶고 하고 싶은 좋은 노년 돌봄’을 고민하는 연재를 시작하며

김영옥 | 기사입력 2023/03/08 [12:46]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죽을 수 있을까

‘받고 싶고 하고 싶은 좋은 노년 돌봄’을 고민하는 연재를 시작하며

김영옥 | 입력 : 2023/03/08 [12:46]

숫자는 몸의 형상을 띠지도, 붉은 피를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다. 숫자와 통계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또한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맥락 자체가 달라지기도 한다.

 

코로나19 사망자는 거의 고령자, ‘재난’은 누구의 재난인가?

 

2023년 3월 7일 현재 코로나19 확진자는 총 30,581,499명이고, 그중 사망자는 34,049명이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60세 이상 사망자가 31,898명, 전체 사망자의 93.7%에 해당한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80대 이상이 20,302명으로 59.63%를 차지한다.

 

단순 수치로만 보면 한국은 ‘K-방역’이라는 말에 값할 만큼의 방역 통치를 해낸 것 같다. 늘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는 일본의 경우, 확진자는 32,958,774명이고, 그 중의 사망자는 70,788명에 이른다. 한국과 비슷하게 확진되었지만, 사망에 이른 사람은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초기에 집단 면역을 선택했다고 놀라움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스웨덴은 2,696,168명 확진에 사망 23,563명. 영국(24,315,983명 확진, 205,540명 사망)이나 독일(37,928,944명 확진, 166,875명 사망)과 비교해볼 때 역시 우려한 것보다 괜찮은 결과다.

 

이쯤이면 벌써, ‘도대체 이 번잡한 숫자들은 다 뭐란 말인가?’ 의아해하며, 지루해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맥락에 따른 깊은 해석을 생략한 채 숫자에 주목하다 보면, 사람의 삶은 의도치 않게 하찮은 숫자놀음에 휘말린다.

 

▲ 지금까지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의 압도적인 다수가 고령자이다. 또한 80대 이상이 과반을 차지한다. 우리는 과연 코로나19 ‘재난’이 누구에게, 어떤 재난인지 물어야 한다. (출처: pixabay)

 

그런데 그 숫자가 가리키는 사람이 ‘노인’이면 사정은 더욱 나빠진다. 어느 나라에서든 코로나19 재난 시기에 사망한 사람은 대부분 고령자다. 이들은 ‘재난’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한 ‘피해자’일 뿐으로, 사회적 애도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코로나19인권대응네트워크 등 인권단체 8곳은 코로나19 희생자에 대한 공적 추모와 애도를 위한 정부의 책임 있는 조처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기도 했지만, 시민사회 차원의 호응은 거의 없다.)

 

노인요양시설이 언급될 뿐, 그 속의 노년들 이야기가 없다

 

2020년 초 첫 발발 소식이 나온 이래 코로나19 ‘재난’이라는 말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도대체 이게 어떤 지평하에, 어떤 의미에서 재난인지, 그리고 특히 누구에게 어떤 재난인지를 확실하게 짚어보지 않으면 ‘재난’ 또한 상투적인 수식어로 전락한다. ‘재난’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울증이 도질 만큼 민감한 사람도 그 감각에 구체적인 방향성이 없으면, 재난 상황에서 배우는 것도, ‘이후’의 올바른 변화를 위해 나서는 힘도 미미할 뿐이다.

 

우리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재난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 가능한 제대로 알고자 노력했고. 특히 가장 강한 경고가 기저질환자와 노약자를 향하고 있었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2020년 초 거의 모든 시설에 내려진 (예방적) 코호트 격리 방역 지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만나기까지, 언론에 기댄 우리의 노력은 여전히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인요양시설이 언급될 뿐, 그곳에 거주하는 노년의 이야기는 생략되고 있음을, 언급되더라도 너무나 두루뭉술해서 ‘안다’고 할 수 없음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예방적)코호트 격리를 시행한 요양원들의 원장, 사무국장, 노조 임원 등을 인터뷰하면서, ‘노인요양시설’을 ‘사람’과 ‘삶’의 장소로 접근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데 얼마나 생략되고 있는지 절감했다.

 

사회가 무엇인지에 관해 체현된 지식을 얻고자 하면 ‘현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코로나19 재난 시기 (예방적)코호트 격리를 시행한 노인요양시설의 실태를 조사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긴 탐구와 연구의 길 초입에 있음을 깨달았다. 노인요양시설은 사람이 삶을 사는 곳이고, 그 삶을 가능케 하는 돌봄노동/활동이 수행되는 곳이고, 요양원 ‘외부’에 거주하는 ‘보호자’가 다양한 형태로 연루된 곳이다. 또한 국가책임제를 내세운 고령자 복지 시스템의 실상과 허상이 뒤엉킨 곳이다.

 

‘기저질환이 있는 고령자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전면적인 면회 금지와 (예방적)코호트 격리라는 보호조치는 필수다.’ 이 단순한 문장 뒤의 마침표가 억지스럽고, 더 나아가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일깨워져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깊고 폭넓은 ‘앎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사실은 은폐되었고, 여전히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방문이 자유로웠던 스웨덴 요양원의 ‘위험한’ 상황과 실제 결과

 

앞에서 잠깐 언급한 스웨덴의 경우를 다시 인용해 보자. 스웨덴에서 요양원은 노년들이 선택하는 노년기 삶의 장소, 즉 ‘집’이다. 누군가의 집을 폐쇄하거나 격리하는 건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된다. 소문이 퍼뜨린 혐의와는 달리, 스웨덴의 요양원에서 확진되고 사망한 노년의 수는 코로나19 재난 이전과 비교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요양원에 거주하는 노년들은 가고 싶은 곳을 갔고, 방문객을 막지 않았다. 보호의 이름으로 강제된 격리 외엔 다른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스웨덴의 고령자가 누린 ‘위험하고 자유로운’ 사생활과 삶은 매우 새로운 관점으로 안내한다.([코로나 대응, 현장을 가다] 스웨덴의 노인들은 어떻게 팬데믹을 지나왔을까, 시사IN 2022년 10월 20일자 참조)

 

미국의 시인이자 언론인인 월트 휘트먼은 남북전쟁(1861-1865)이 한창인 1862년 북부군에 참전하여 지원 간호사로 3년간 복무했던 경험을 나중에 회고록으로 남겼다. 병동에는 무관심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고, 젊은 환자들은 ‘익명성’ 속에 모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고 그는 증언한다. 자신의 글쓰기는 이들의 삶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소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늘 병동 하나 혹은 여러 병동이 모여 있는 곳을 가로질러 다니며 한 명도 놓치지 않게 신경 쓰면서 사소한 것이나마 전하려고 노력한다. 달콤한 과자 하나라도, 한 장의 종이라도, 아니면 친절한 말 한마디나 고갯짓이나 눈빛이라도 말이다. [...] 병동 전체가 기운을 북돋워 줄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 행동은 사람들을 읽고 마법의 주문을 깨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 병동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각자의 사례가 글로 쓰이기만 한다면 비극시, 서사시, 낭만시, 그리고 사색에 잠기게 하고 몰입하게 하는 책이 될 것이다.” (매들린 번팅 『사랑의 노동』, 김승진 옮김, 반비, 2020, 186-187쪽에서 재인용)

 

휘트먼이 언급하고 있는 저 무거운 무관심, 그 속에서 이름과 자기만의 생의 서사를 상실하고 모호하게 존재하는 ‘아픈 몸들’에서 나는 (특히 코로나19 재난 시기) 노인요양시설의 노년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진행한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예방적) 코호트 격리가 시행되었던 시기엔 요양보호사를 포함한 직원들이 모두 한 공간에 머물러 북적대니 노년들은 나름 흥겹기도 했다. 그러나 친지들의 면회나 본인들의 외출이 전면 금지된 시간은 어쩔 수 없이 고립과 단절의 위험을 초래한다. 무관심과 익명성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직 ‘내 일’이 아닌 노년들의 외로움을 공감, 연결할 수 있는 구조는?

 

그러나 요양시설과 직접적인 연고가 없는 일반 ‘시민’이 요양원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노년들의 고립감과 외로움을 공감하는 건 쉽지 않다. ‘내 일’처럼 느끼는 감각이 일깨워지지 않을 때, 이들 노년이 처한 상황은 ‘먼 곳의 막연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격리된 채, 전면적인 익명성과 모호성 속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특히 코로나19 재난 시기에 요양원의 노년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활기 있는 삶의 박탈은, 요양원이라는 공간에 이미 어느 정도는 기본 특성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난이 현상을 더 악화시켰지만, ‘요양원에 거주하는 노년’을 정체화하는 사회문화적‧심리적 기본 구조가 있다. 조금 격하게 말한다면, 노인요양시설은 늘 준 재난 상태인 곳이다. ‘달콤한 과자 하나, 친절한 말 한마디, 고갯짓이나 눈빛’이 절실한 곳이다.

 

▲ 노인요양시설에서 그토록 긴 시간 단절과 고립을 견뎌야 했던 노년의 ‘통증’과 ‘고통’을 구체적으로 감각하는 ‘동료 시민’의 수는 왜 그토록 적은 것일까. (출처 pixabay)

 

재난은 그것을 날 것으로 직접 겪는 당사자들이나, 기꺼이 이들의 곁이 되겠다고 나선 연루된 이들을 새로운 에너지로 다시 연결하고 연대케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둔감해진 연대 의식을 일깨우는 소중한 계기로 작동한 사례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코로나19 재난이 더욱 심하게 강타한 ‘취약 집단’ 중에 특히 노인요양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초/고령자들은 왜 ‘연루되었다고 느낀, 그래서 어떻게든 곁이 되어 함께 회복을 돕겠다’는 이들을 만나지 못했을까. 노인요양시설에서 그토록 긴 시간 단절과 고립을 견뎌야 했던 노년의 ‘통증’과 ‘고통’을 구체적으로 감각하(고자 애쓰)는 ‘동료 시민’의 수는 왜 그토록 적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우리는 한 해 동안 노인요양시설과 재가돌봄에서 노년을 전문적으로 돌보는 요양보호사를 인터뷰했다. 그 뒤를 이어 다시 한 해 동안 누군가를 노인요양시설에 모신 ‘보호자’를 인터뷰했다. 일상을 스스로 온전히 영위하기 어려워진 노년을 돌보는 일은 ‘집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건, ‘요양원’으로 입소한 상태에서건, 전문적인 혹은 비전문적인 돌봄노동의 성격을 띤다. 동시에 이 노동은 과연 어떤 성격의 ‘노동’인가에 대한 질문을 낳는다.

 

보호자의 자리는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이라는 전문 돌봄노동자의 노동과는 다른 ‘어떤’ 돌봄/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인가, 이것 또한 그동안 간과되어 온 질문이다. 친족과 친구가 돌볼 때, 그 자리가 언제나 ‘보호자’의 자리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돌봄자들의 어떤 서로 다른 돌봄이 필요한가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앞으로 1년간 이어지게 될 글은 지난 3년간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이 이러한 질문과 고민 속에서 ‘더 제대로 알고자’ 애써온 여정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요양시설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선을 질문으로 재구성하면서, ‘좋은’ 노년 돌봄의 가능성, 적절한 나눔으로 가능해지는 ‘정의로운’ 돌봄, 요양보호사가 수행하는 돌봄의 전문적 기술과 지식, ‘보호자 되기/보호자로 살며 돌보기’의 현상 등에 관해 토론의 장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단순한 숫자로 축소되지 않는 노년의 삶이, 살아낸 시간이, 그 안에 깃든 이야기가 오롯이 감각되길 희망한다. 이것은 돌봄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큰 그림의 구체성이 확보되는 과정일 것이다.

 

[필자 소개]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저서로 『흰 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의 페미니즘』(2021), 『노년은 아름다워』(2017),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공저, 2020) 등이 있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독자 2023/03/09 [11:28] 수정 | 삭제
  • 보호자 되기 보다는 직업인으로 돌봄 노동자 되기 쪽이 더 견딜 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재 기대합니다.
  • 2023/03/08 [20:24] 수정 | 삭제
  • 어른이 며칠 병원에 입원해계시는 것만 해도 너무 힘들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나에게 경제적 위기도 왔고 자영업자들이 힘들었다 하지만, 아프고 늙은 사람들만큼 힘들었을까 싶어요. 이 글 보니까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듭니다. 연재 글 잘 찾아읽겠습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