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축제, 도시 외곽이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 열리던데요?

2023 시드니 마디그라 & 월드 프라이드에 가다 (상)

박주연 | 기사입력 2023/03/17 [10:40]

퀴어축제, 도시 외곽이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 열리던데요?

2023 시드니 마디그라 & 월드 프라이드에 가다 (상)

박주연 | 입력 : 2023/03/17 [10:40]

2년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열리던 때를 기억하는가? 당시 국민의당 예비후보였던 안철수 후보는 한 방송사 TV토론회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드러내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선 시의 중심에서 퀴어축제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안 후보는 ‘차별에 반대하지만, 그런 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 받아야 된다.’는 요지의 발언도 했다. 이 발언은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혐오표현에 해당한다’고 지적 받았다. 정치인이 잘못된 정보와 차별을 야기하는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해로울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사실 퀴어축제(’자긍심의 달’이라 불리는 6월에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를 비롯한 연계 행사들이 세계 다양한 도시에서 열린다)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전하는 이는 한둘이 아니다. 서울과 각 지방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즈음엔 더 그렇다. 그 중 하나의 레퍼토리는 ‘해외 퀴어축제는 안 그렇던데…’이다. 해외에서 열리는 퀴어축제는 선정적이지 않고, 정치적이지 않고, 심지어 군중이 밀집되지 않은 외곽에서 하는데, 한국 퀴어축제가 문제라는 것. 정말 해외는 다를까?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 호주 시드니 거리에 있는 광고판에 시드니 시가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관광객을 환영한다는 말이 적혀있다.  ©일다

 

해외의 ‘선진(?)’ 퀴어축제를 체험해 보기 위해 “2023 시드니 마디그라 & 월드 프라이드” 기간 동안 시드니를 방문했다. 몇몇 행사에도 참여하며 자세히 들여다 보니, 느끼는 게 많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다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다르지 않다”는 걸.

 

많은 도시에서 유치를 원하는 국제 축제, 월드 프라이드!

 

호주에서 가장 큰 도시 시드니에서 매년 열리는 퀴어축제는 ‘시드니 게이와 레즈비언 마디그라’(Sydney Gay and Lesbian Mardi Gras)라는 이름으로, 여름 기간인 2월 중에 열린다. 하지만 올해의 축제는 시드니 마디그라이기만 한 게 아니라 월드 프라이드(World Pride)이기도 했다.

 

월드 프라이드는 인터 프라이드(Inter Pride)라는 단체가 주관하는 축제로,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 한국에선 퀴어 퍼레이드라고 한다)와 다양한 예술 활동, 컨퍼런스 등이 열리는 행사다. 1981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인터 프라이드는, 처음엔 미국 내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연대를 이끌어 내고자 결성되었지만 이후 세계로 범위를 확대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월드 프라이드’라는 행사를 조직했는데, 1997년 월드 컨퍼런스에서 이탈리아 로마가 첫 개최지로 선정됐다. 2006년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2012년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됐다. 그 뒤로도 거의 2년 간격으로 캐나다 토론토, 스페인 마드리드, 미국 뉴욕, 덴마크 코펜하겐과 스웨덴 말뫼에서 열렸고, 올해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월드 프라이드 개최지는 쉽게 결정되는 게 아니다. 해를 더해 갈수록 월드 프라이드의 ‘관광객 효과’가 입증됨에 따라, 개최를 희망하는 도시가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 지고 있다. 호주 시드니가 개최지 후보에서 개최지로 선정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영국 가디언 기사('Years in the making': the story behind Sydney’s successful WorldPride 2023 bid, 2019년 10월 22일자, Gary Nunn)에 따르면, 2023년 개최지 입찰에 뛰어든 건 호주 시드니, 캐나다 몬트리올, 미국 휴스턴 세 도시였다. 후보들 간의 뜨거운 유치 경쟁 이후 시드니가 인터 프라이드 회원들의 투표에서 60%를 득표함으로써 최종 개최지로 선정됐다.

 

▲ 시드니 국제 공항엔 이곳이 시드니 임을 알리는 글자 ‘SYD’ 또한 성소수자의 존엄을 상징하는 무지개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짐을 픽업하는 곳에서도 무지개가 발견됐다.  ©일다

 

시드니의 입찰 제안서는 무려 158페이지였다고 하는데, 수많은 자원활동가와 퀴어 활동가들이 정성을 쏟은 결과였다. 당시 통상투자관광부 사이먼 버밍엄 장관, 당시 상원 의원이었고 현재 외무부 장관인 페니 웡 등의 정치인들 또한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 개최를 지지했다. 페니 웡 장관은 2002년 상원 의원에 당선된 이후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회계법인이자 컨설팅 회사인 딜로이트는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가 개최될 경우, 기존 마디그라 방문객 109만4000명~122만500명에서 25~40%까지 방문객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시드니가 소속된) NSW주 관광부는 이 행사가 6억6,400만 달러 이상의 경제 효과를 낼 것이라 추측했다. 이렇듯 월드 프라이드는 많은 도시가 원하는 국제 축제로 발돋움해 가고 있다.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시드니 최대 이벤트로 손꼽힐 정도.차기 월드 프라이드 또한 2025년 미국 워싱턴, 202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내정된 상황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아직 아시아 국가에서 개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2025년 개최지로 대만 카오슝이 선정되어 기대를 모았지만, 작년 여름에 대만 측에서 개최 포기를 선언했다. 인터 프라이드에서 ‘대만’이라는 국가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한 탓에 불가피하게 축제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아마도 중국 커뮤니티와의 관계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국제 성소수자 커뮤니티도 국가들 간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공원 등에서 물을 마실 수 있는 식수대에서도 프라이드 문구가, 버스 정류장과 버스 안에서도 프라이드와 함께 한다는 ‘시드니 메트로’(Sydney Metro, 호주 내 가장 큰 공공 교통 기관)의 광고를 볼 수 있었다.  ©일다

 

17일 동안 시드니를 가득 채운 수백 개의 행사들

 

2023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는 2월 17일부터 3월 5일까지, 17일 동안 열렸다. 마디그라의 주요 행사인 페어데이(빅토리아 공원에 모여 음식도 먹고 부스도 구경하고 공연도 즐기는 행사), 마디그라 파티, 본다이 비치 파티, 마디그라 영화제, 마디그라 퍼레이드뿐만 아니라 월드 프라이드 퍼레이드, 인권 컨퍼런스, 300개가 넘는 예술 문화 공연 및 스포츠 이벤트들이 17일을 알차게 채웠다.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 참여 계획을 세우는데만 한참이 걸릴 정도로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다.

 

행사의 폭도 넓었다. 시드니 현대 미술관에선 청소년 퀴어들을 위한 예술 행사 “GENEXT x PRIDE”가, 시드니 시청에선 나이든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립과 외로움에 대한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나이든 성소수자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자리로 마련된 ‘애프터눈 티 파티’인 “Coming Back Out Salon”이 열렸다. 시청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행사는 호주 예술 위원회(Australian Council for the Arts) 및 주 정부와 시드니 시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다.

 

또한,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는 입찰 제안 당시부터 이번 월드 프라이드를 선주민(First Nations, 여기서 선주민이란 현재 ‘호주’란 이름의 땅에서 영국의 지배가 시작되기 전부터 살아온 이들을 말하며, 현재 호주 인구 중 3~4%를 차지한다)들을 위한 행사를 중심에 놓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선주민 퀴어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는 공연, 전시 등이 마련된 것은 물론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 홈페이지를 비롯한 많은 안내문엔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가 열리고 있는 이 땅은 Gadigal, Cammeraygal, Bidjigal, Darug, Dharawal 부족이 살아온 땅이다”라는 점을 명시했다.

  

▲ 호주 시드니 어느 곳에서나 2023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와 마디그라를 응원하는 광고를 만날 수 있었다.  ©일다

 

시의 주요 기관과 명소에서도 여러 행사가 열렸다. 시드니 세관에선 마디그라 역사를 담은 “Liberate!”라는 전시가, NSW 주립 도서관에선 시드니 퀴어 커뮤니티의 역사를 담은 “PRIDE (R)EVOLUTION” 전시가, NSW 주립 미술관에서도 드랙 공연, 시 낭독, 퍼포먼스, 디제잉, 도슨트 투어가 5시간 동안 진행되는 “Queer Art After Hours”가 진행됐다. 시드니 천문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시드니 왕립 식물원, 시드니 타롱가 동물원 등에서 퀴어 당사자와 앨라이(지지자), 다양한 연령대와 가족을 위한 행사가 열렸다. 유료 행사도 있었지만 무료 행사도 상당수 있었다.

 

스포츠 행사도 여럿 개최되었다. 레인보우 골프대회, 게이 복싱 챔피언 대회, 수영, 무술, 테니스, 축구, 하키, 농구, 아이스하키, 볼링, 레슬링 대회 등에 참여하거나 관람할 수 있었다. 유명 퀴어 셰프들이 마련한 요리를 먹는 행사도 있었고,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는 자리들도 있었다. 파티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매일매일 다양한 곳에서 열렸다. 각자의 상황과 취향에 맞게 골라 갈 수 있는 행사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너무 낯설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레인보우 도시, 곳곳에서 발견한 무지개들

 

월드 프라이드 기간 동안 시드니는 ‘레인보우 도시’(Rainbow City)를 만들기 위해, 시드니 마디그라 45주년을 기념하며 45군데 장소를 특별한 무지개로 꾸몄다. 많은 예술가들과 협업해 도시 곳곳에 다양한 무지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결과 시드니 공항부터 관광 명소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호주 박물관, 본다이 비치, 블루 마운틴 시닉 월드 등지에서 무지개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 2월 17일부터 3월 5일까지,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가 열리는 17일 동안 도시의 어디를 가도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일다

 

특별한 행사가 있는 곳에 가지 않더라도, 전세계 성소수자들을 반기는 무지개는 어디에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성소수자 친화적인지 알리고자 하는 많은 기업들, 동네의 카페, 세탁소, 식당 등을 운영하는 소상공인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축제에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딜가나 무지개가 나를 반기는 이 도시의 모습은 정말 색달랐다.

 

이런 ‘레인보우 도시’로 빛날 수 있는 건, 단지 무지개 몇 천개가 널려있기 때문이 아니다.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 공식 팜플렛 가장 첫 페이지는 NSW 주정부의 광고로 채워져 있고, 두 번째, 세 번째 광고까지도 주 정부와 시드니 시 광고가 자리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이 축제를 지원하고 협력하고 있다는 걸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 축제가 도시에 큰 경제 이익을 안겨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나은 도시, 더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선 다양성을 포용하고 많은 이들이 함께 꿈꿀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이번 시드니 월드 프라이드의 슬로건이 “모여라, 꿈꿔라, 증폭하라”(Gather, Dream, Amplify)인 것처럼.

 

이 부분이야말로 한국과 다른 점이었다. 축제 자체의 크기나 범위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그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 축제를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을 하고, 많은 기업과 소상공인들이 후원하고 있으며, 시민들 또한 축제를 응원하고 즐길 줄 알았다. 무엇보다 한국에선 축제 현장을 둘러싼 혐오세력들이 즐비한데, 시드니에선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드니라고 100% 모든 사람이 성소수자를 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 배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해외 퀴어축제 언급하며 국내에서 열리는 퀴어축제에 대해 뭐라 했던 사람들은 과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 주류, 여행업, 통신사, 금융업, 의류업체 등도 시드니 마디그라와 월드 프라이드를 지지하는 광고판을 내걸었다. 사진 속 네 개의 포스터 중 시드니 시의 광고는 무엇일까?  ©일다

 

이어 (하)편에선 마디그라 퍼레이드와 다양한 행사의 장면들을 전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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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리 2023/03/19 [14:29] 수정 | 삭제
  • 사드니 시에서 건 포스터가 젤 핫하네.
  • 2023/03/17 [17:39] 수정 | 삭제
  • 아 인생에 한번쯤은 이렇게 마음껏 프라이드 누려보는 경험을 해야할 거 같아!!
  • ㅎㅎ 2023/03/17 [12:02] 수정 | 삭제
  •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축제도 도시 전체에서 열립니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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