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를 일터와 삶터에서 피부로 느끼고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전국의 여성농민들을 만납니다. 여성농민의 시선으로 기후위기 그리고 농업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대안의 씨앗을 뿌리는 새로운 움직임과 공동체적 시도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남편 이름으로 출하, 남편 통장으로 정산”
“(부부 농민의 경우, 여성농민이 농사를 지어도) 농산물이 대부분 남편 이름으로 출하되고, 또 정산대금도 남편 통장으로 들어오니 여성들은 농업 소득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개중에는 비겁하게 상품은 남성 명의로, 비상품은 여성 명의로 내는 경우도 있어요. 반대인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여성농민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는 열악한 경제적 지위와 맞물려 있다. 구점숙 씨는 그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농산물 출하와 정산은 물론, 농지도 남편 명의로 돼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보니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거나 투자를 해본 적 없는 여성농민이 많다. 이러다 보면 자신의 농업 활동이나 농민 신분을 증명하기 어려워져 각종 제도나 정책에서 배제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농촌 사회학자 정숙정은 여성농민의 열악한 경제적 지위가 불평등한 제도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농지원부, 농가 경영체 등록, 수당이나 보조금 신청과 금융실적, 조합원 활동, 생산물 출하 등이 서로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농가에서 사용하는 자동차의 소유주와 농업인 경영주가 다를 경우 유류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또 거래 실적이 많을수록 대출이 용이해 가구 대표에게 금융 활동을 몰아주는 방식이 권고되기도 한다. 대표 명의를 사용할 때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되어 있는 일련의 제도 운용방식은 가족농의 가부장성을 재생산하고, 여성을 배제하는 성차별 관행을 강화한다.”(정숙정, ⌜‘여성×농민’의 교차성 : 여성농민의 불평등 경험과 정체성」, 농촌사회 제31집 1호, 2021년)
농사일에서 여성과 남성과의 일당 차이도 여전하다. 점숙 씨는 “여성농민은 남성의 60~70%의 일당을 받는다”고 말한다. 2020년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이 진행한 ‘여성농민 성평등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0.1%가 “같은 일을 할 때 남성 농민과의 일당 차이가 4-5만 원가량 난다”고 답했다.
남성이 더 높은 일당을 받는 이유는 ‘남성이 더 힘든 일을 한다’는 논리인데, 점숙 씨가 말하는 실상은 다르다. “힘든 일은 대부분 기계로 하고, 불편한 자세로 오래 일하는 사람들은 바로 여성들”이라는 것.
“남성들은 기계 작업이나 무거운 것을 드는 일, 예를 들면 괭이질을 해요. 여성은 섬세하게 돌보고 관리하는 일을 하죠. 마늘 농사로 치면 심고 풀 관리하는 일, 쪼그리고 앉아서 캐고 분류하는 건 다 여성 몫이에요. 이 일이 8할 정도에요. 남성은 수확할 때 기계 작업을 하거나 들고 옮기는 일을 하죠.”
여성농민들, ‘텃밭’에서 생산의 주체가 되다
구점숙 씨는 현재 ‘남해 새지매 공동체’(‘새지매’는 남해 사투리로 ‘작은 엄마’, ‘숙모’라는 뜻)에서 여성농민들과 공동 경작한 농작물을 ‘언니네텃밭’에 출하하고 있다. 언니네텃밭은 지금처럼 농산물 거래에서 온라인 직거래가 차지하던 비중이 크지 않던 2009년에 전여농이 만든 여성농민생산자협동조합이다.
가부장적인 농촌 문화와 성차별적인 제도의 결합으로 여성농민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언니네텃밭은 소중하다. 지역마다 여성농민들이 생산자 공동체를 만들고, 생태 농업으로 직접 생산한 제철 농작물을 ‘꾸러미’로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보내고 있다. 최초로 ‘채식 꾸러미’를 시작했으며, “소득과 상황에 관계없이 누구나 먹을거리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기부 꾸러미와 나눔 꾸러미도 발송한다. ‘언니네장터’에서는 단품 농작물도 만나볼 수 있다.
‘언니네 텃밭’을 단순한 친환경 농산물 유통 플랫폼으로만 볼 수는 없다. 여성농민의 경제적 지위와 권리 향상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언니네텃밭 운영위원장인 점숙 씨는 말한다.
“남성들은 돈 되는 환금작물 중심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해요. 농협, 기술센터 등 기술을 전파받는 거나 정보망, 관계망이 다 남성 중심으로, 관행농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여성농민이 주도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주류 농업에서 우리가 주체가 되기는 어려우니, ‘텃밭’에서 생산의 주체가 되자고 했던 거죠.”
집안의 갈등을 환영하는 이유
여성농민들은 500평 이하의 텃밭에서 스스로 작부 체계를 세우고, 친환경 농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며,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내 건 농산물을 출하했다. “농사에서 자기 결정권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조용했던 집안에 분란이 생기고 남편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점숙 씨는 이런 갈등을 환영한다.
“가정의 평화는 누군가가 참음으로써 생기는 거잖아요. 남편은 제일 맛있는 걸 자기 주변 사람한테 판매하고 싶어, 그런데 여성농민은 언니네텃밭에 최고 좋은 걸 납품하고 싶은 거예요. ‘내 얼굴이 나가니까 언니네텃밭에 제일 좋은 상품을 내고 싶다’. 서로의 요구가 달라지면서 갈등이 생겨난 거죠. 초창기엔 (남편한테) ‘텃밭 좀 갈아줘’ 하면 ‘내일 해 줄게’, ‘모레 해 줄게’ 해서 막 싸우곤 했는데, 이제는 (언니네텃밭으로 소득이 생기니) 우리의 달력에 따라서 남편들이 협력적으로 나오는 게 변화라고 볼 수 있겠죠.”
언니네텃밭은 여성농민이 생산하고 출하해서 팔리면 곧장 소득으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를 통해 여성농민이 경제적 주체로 설 수 있게 됐다.
“언니네텃밭을 하면서 여성농민들에게 소득이 생겼어요. 그 전까지 여성농민들 중에 자기 이름으로 농업 소득이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꾸러미 공동체에서는 회원들 일인당 연간 500만 원~1,000만 원 정도의 소득이 발생해요.”
대단치 않아 보여도 2021년 농업평균소득이 대략 1,200만 원임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언니네텃밭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통장을 만들었다는 여성농민도 있다.
여기에 더해 언니네텃밭은 여성농민들의 자매애를 북돋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꾸러미뿐만 아니라 단품도 공동체적인 생산 방식을 지향한다. 점숙 씨가 속해있는 새지매 공동체에서도 300평 정도의 협업농장에서 마늘과 토종 차조를 생산하고 있다.
남해 새지매 공동체…함께라서 행복하다
언니들과 크고 작은 일을 함께하며 “언니들 안에서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내가 제일 행복한 것 같다”고 말하는 점숙 씨. 여성농민의 삶을 살고 또 지켜보면서 이들의 지혜와 힘, “수평적 연대”를 수없이 목격한 점숙 씨에게 농사의 의미를 물었다.
“농사를 지으면 안 외로워져요. 작물하고의 어떤 교감으로부터 오는 위안이 있거든요. 오늘은 많이 컸네, 내일은 더 자랐네, 아이 탐스럽게 열매를 맺었네, 풀과 싸우더니 이렇게 건강해졌네. 농사에 집중하다 보면 여러 가지 사회관계에서 오는 피로도나 어려움, 스트레스가 풀려요. 이 조그만 씨앗에서 꽃이 올라오는 그 힘찬 기운을 받게 되는 거예요.”
점숙 씨의 말을 들으며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안토니아는 드넓은 대지 위를 걸어가며 휙휙 씨를 뿌린다. 무심한 듯 어제 해 왔던 일을 오늘 또 반복하나, 그 행위 속에서 여성농민들은 생명을 창조하고 세계를 창조한다.
성차별적 농촌 문화 속에서도, 기후위기로 가중된 노동과 시름 속에서도 묵묵히 씨를 뿌리는 점숙 씨와 여성농민들을 응원한다. (끝)
※참고자료 이수미, ⌜여성농민 성평등 실태조사 결과」,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2020년 정숙정, ⌜‘여성×농민’의 교차성 : 여성농민의 불평등 경험과 정체성」, 농촌사회 제31집 1호, 2021년
[필자 소개] 나랑(김지현) 독립 인터뷰어. 글쓰기 안내자. 목소리가 되지 못한 목소리를 기록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게 안내한다. 지금은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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