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서사’가 정치 드라마를 만났을 때!

대만 드라마 시리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

박주연 | 기사입력 2023/05/29 [14:41]

‘여성 서사’가 정치 드라마를 만났을 때!

대만 드라마 시리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

박주연 | 입력 : 2023/05/29 [14:41]

국회, 정부 등 정치판 이야기를 다룬 정치 드라마라고 했을 때는, 여전히 남성의 얼굴이 주요하게 드러났던 콘텐츠들이 주로 언급된다. 물론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거나 분발한 작품들도 있다. 영미권 드라마는 〈마담 새크리터리〉(Madam Secretary 2014~2019), 〈부통령이 필요해〉(Veep 2012~2019), 〈외교관〉(The diplomat, 2023) 등이 있고, 한국 드라마인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2021)와 최근작 〈퀸메이커〉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세계 평균 여성의원 비율 25.6%, 그리고 한국의 제21대 여성 국회의원 비율 19%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은 아니지만.

 

▲ Netflix에서 배급 중인 대만 드라마 시리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 중 공정당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지는 ‘여성 서사+정치’ 콘텐츠를 발견할 때면 설렌다. 작품이 정말 재미있었을 땐 더더욱. 넷플릭스에서 4월 공개된 대만 드라마 시리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를 봤을 때가 그랬다.

 

진보정당의 좌충우돌, 치열한 대선 캠프 이야기

 

8부작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는, 공정당(공평정의당)이라는 진보정당 대선캠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그렇다고 블랙 코미디 형식을 띄고 있지도 않다. 대선 캠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대만의 정치 상황과 사회 이슈를 적절히 버무린 구성이다.

 

주인공 웡원팡은 공정당 홍보부의 차장이자 대변인으로, 지역에서 여러 번 재선에 성공하였으며 정당 내에서도 인정 받는 원로 정치인 아버지를 두고 있다. 하지만 반년 전, 그녀는 시의원 재선에 도전했다가 한 시민과 몸싸움을 벌인 일이 선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그 일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이후 원팡은 공정당 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딸인 원팡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고, 예상되듯(?) 원팡과 아버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다.

 

원팡의 동료들 또한 극 중 주요 인물이다. 원팡의 선임인 천자징은 공정당 홍보부장으로, 그래픽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아내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정치판과 선거에 매료된 워커홀릭인 그는 일-가정 양립이라는 ‘세기의 미션’ 앞에서 좌절 중인 중년 남성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인물, 공정당 홍보부에 새로 입사한 장야징은 들어오자마자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청년이지만, 크나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에서 공정당 대표이자 대선 후보로 활약하는 린웨전 모습 ©Netflix


그리고 공정당 대표이자 대선 후보 린웨전은 중년 비혼 여성으로, 현재 총통인 보수정당 민화당(민주평화당) 쑨링셴에 맞서 대만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자 한다.

 

이야기는 대선을 10개월 앞둔 시점부터 시작된다. 민화당의 쑨링셴이 연임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후, 부총통 후보로 자오창쩌 입법원 원장이 거론된다. “역대급 미남 입법원 원장”이라 불리는 자오창쩌는 20대가 된 아들, 딸과 아내를 둔 다정하고 멋진 ‘남편/아버지’이자 ‘젊은 정치인’으로 시민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현 여성 총통과 호감도 높은 남성 부총통 콤비에 맞서야 하는 공정당 사람들은 진보적 이슈로 시민들의 관심을 어떻게 얻을 것인지, 10% 지지율 차이가 나는 상황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지 매일매일 머리를 굴린다.

 

하지만 정치판, 선거판이 어디 뜻대로 굴러가는 곳이던가.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등장인물 각자가 풀어야 할 개인적 사정 또한 만만치 않다. 이 선거, 과연 어떻게 될까?

 

“대국 우선”(큰 일 먼저)이란 말에 반기를 드는 여성들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의 재미는 여러 가지다. 일단 대만의 정치 구도나 상황, 선거가 진행되는 방식이 어떤지 엿볼 수 있고, 이를 한국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정당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고충 그리고 즐거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대학에서 같이 시위했던 후배에게 이제 변절자라는 소리를 듣게 된, ‘현실정치’의 정당 당원이 된 청년, 노래방에서 운동권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달래는 중간 관리자, 여전히 예전의 관습과 ‘꽌시’(인맥, 사람 관계)를 중시하는 윗세대들. 이들의 차이와 어우러짐도 ‘웃픈’(웃기면서 슬픈) 포인트다. 무엇보다 빛나는 여성 캐릭터들, 여성들의 이야기가 잘 녹아들어 있다는 장점을 빼놓을 수 없다.

 

▲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 주인공 웡원팡과 그의 파트너인 주리야의 모습 ©Netflix


먼저 웡원팡. 원팡은 멋진 정치인이면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다. 드라마에서 원팡의 성정체성은 유별난 일로 다뤄지지 않지만, 그가 성소수자라는 건 분명하게 드러난다. 1화 오프닝 크레딧 이후 원팡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 그의 방 책상 위에 놓인 ‘원팡과 여자친구의 사진’, 휴대폰에 달린 무지개 스트랩, 책장 위에 자리 잡은 무지개색 바탕의 ‘LOVE’ 액자를 함께 든 웨딩드레스 차림의 두 여자 인형이 의도적으로 화면에 보여진다. 원팡의 사무실 옷걸이엔 레인보우 플래그가 걸려있고, 동료들 사이에서 원팡의 성정체성은 전혀 ‘이야기거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성소수자로서의 삶이 평탄할까? 2019년 동성결혼을 법제화한 대만이지만, 사회가 완전히 바뀐 건 아니다. 대만의 무지개평등권빅플랫폼이 동성결혼 법제화 이후 매년 진행하는 ‘동성결혼 이슈와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사회적 태도 여론조사’ 최근 결과(2023년 5월)에 따르면, 성소수자에 대한 친밀도와 지지도가 오히려 소폭 하락했다. ‘동료, 학교 친구, 직장 상사, 친척 등 주변 사람이 동성애자라고 했을 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 대답이 62.6%~71.8%로, 지난 해보다 2%가량 하락한 것이다. 올해 한 동성커플이 타오위안 시의 슈퍼마켓 앞에서 키스를 하다 혐오폭력을 당한 사건도 있다.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는 대만 사회에 성소수자를 향한 편견과 차별, 혐오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 또한 보여준다. 원팡의 ‘폭력 사건’ 이면이 드러날 때가 그렇다. 원팡은 그 사건으로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정당의 신입 직원 장야징이 성추행을 고발했을 때 든든한 연대자가 되어준다. “세상엔 이렇게 그냥 넘어가면 안될 일들이 많아요.”라며 장야징에게 “내가 옆에 있을게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 명장면 중 하나다. 원팡은 “(성추행 대응보다) 대국이 우선”이라는 말에 물러서지 않는다.

 

▲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 주인공 웡원팡과 신입 직원 장야징의 관계는 ‘여성연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Netflix


한편, 천자징을 남편으로 둔 우팡팅은 또 어떤가. ‘사회를 바꾸는 나, 정당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나’라는 생각으로 자꾸 ‘집안일’을 뒷전으로 넘기는 천자징과의 관계에서 균형의 추를 맞추려는 우팡팅의 모습은 안쓰러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단호하고 명확하다.

 

장야징의 비밀과 관련된 이야기도 주요한 이슈다. 이와 관련해서는 작가인 젠리잉(簡莉穎)과 옌스시(厭世姬)는 미투 운동 이후의 대만 사회, 정치계의 성희롱과 성폭력, 친밀한 관계에서의 디지털 성폭력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렇게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통용되는 “대국 우선”(큰 일 먼저)이라는 말에 지지 않고 반기를 드는 말(馬)들의 목소리에 확성기를 제공한다.

 

성소수자 작가들이 써낸 정치 드라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를 쓴 건 젠리잉, 옌스시 두 여성 작가다. 그리고 이들은 작년에 이혼했지만 여전히 좋은 동료로 활동하는 전 부부 사이기도 하다. 젠리잉와 옌스시는 2019년 5월 24일, 대만에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었을 때, 결혼평등권빅플랫폼이 추진한 프로젝트 ‘524개의 축복 +1’에 합류해 혼인신고를 한 524쌍의 커플 중 하나였다. 젠리잉은 연극계에서 활약 중인 극작가, 옌스시는 『염세 동물원』이라는 그림책을 출간한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이번 작품으로 처음 TV 드라마 시나리오를 썼다.

 

▲ 대만이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 법제화를 이루기까지, 2016년부터 2019년의 기록을 담은 책 『비 온 뒤 맑음』(무지개평등권빅플랫폼 지음, 강영희 옮김, 사계절)에 언급된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의 두 작가 젠리잉과 옌스시 이야기


둘은 동성결혼 법제화 운동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으며, 옌스시는 실제로 선거 캠프에서 일하기도 했다. 정치는 그들의 삶과 긴밀히 연결된 부분이었고, 현장을 좀 더 세심히 파악하기 위해 국회의원, 참모, 보좌관, 정당인 등을 인터뷰하고 따라다니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등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정치 운동에 참여한 적 있는 지인들로부터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특히 여성정치인들이 겪는 괴롭힘과 차별, 성희롱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생생한 경험이 시나리오에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작품에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 또한 작가들이 신경 쓴 부분이다. 40대 배우 시에잉쉬앤(謝盈萱)이 주인공 웡원팡 역을 맡은 것도 ‘중년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 드라마에 여러 세대의, 각기 다른 위치에 놓인 여성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노력들이 깔려있다.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는 대만에서 공개된 직후 스트리밍 1위에 오르는 등 많은 인기를 얻었다. 대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정치 드라마, 게다가 여성과 성소수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이 드라마의 매력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변화를 만드는 이들’이라는 작품 제목에 걸맞은 이야기가 담긴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는 분명 국내 시청자들에게도 흥미로울 것이다.

 

※참고 자료

《人選之人》談環境, 多元性別, 廢死 編劇簡莉穎 : 前進一小步就是一種和解, 天下雜誌 2023-05-05

編劇新手打造出話題台劇 簡莉穎, 厭世姬目睹幕僚友「被侵蝕的人生」 用《人選之人-造浪者》突顯網路社群帶來的巨大影響力, VOCUS, 2023-04-30

【人選之人造浪者(中)】 編劇以女同志為主角 厭世姬 : 台灣觀眾夠成熟, Mirror Media 202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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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롤 2023/05/31 [22:14] 수정 | 삭제
  • 정치 드라마, 법정 드라마 엄청 좋아하는데 대만 이야기라니.. 여성정치인이라니...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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