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되는 곳은 여기밖에 없으니까 놀자, 놀자, 놀자!”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6편: 오노미치의 진짜 마지막 밤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빈집 프로젝트’로 생겨난 가게에서 밥을 먹고는, 하루만 더!
오노미치에서 예정된 2박이 끝나는 아침, 마음이 넘쳐서 술렁거린다. 게스트하우스 스텝 ‘타마’와 어제 만나 친해진 여행자 ‘고우’가 나를 배웅해 주고 싶다고, 가기 전에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숙소의 1층 공유공간에서 스치듯 만난 누군가가 낡은 빈집을 고쳐 여러 가게가 들어가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며 들러보라 했다. 그곳에 7시 반부터 아침밥을 파는 킷챠우이(きっちゃ 初)라는 가게가 있다는 말에, 꼭 가 보고 싶어졌다. 좁은 골목에 손으로 쓴 것 같은 작은 간판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가니 작은 마당에 할머니, 엄마, 아빠, 어린이, 강아지(귀여운 시바견이었다)가 옹기종기 앉아 밥을 먹고 있다. 강아지와 셀카를 한 장 찍고 킷챠우이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 소파 테이블과 주방 옆 식탁 정도가 전부인 작은 식당 가운데에는 커다란 오뎅 나베가 올려진 난로가 있다. 겨울 특별 메뉴로 이번 주에 처음 선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가게 주인 ‘도이’가 메뉴판 없이 아침 정식은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해준다. 신상인 오뎅 정식을 주문하고 주방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하얀 쌀밥에 미소시루, 반찬 몇 가지와 냄비에서 내가 고른 세 종류의 오뎅이 쟁반 위에 곱게 차려져 나왔다. 천천히 음미하며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니 ‘내일도 또 먹고 싶다, 아니 매일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타마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더 묵을 수 있냐고 묻고(다음 숙소 하루 분을 환불 없이 취소하고), 고우에게 하루 더 오노미치에 있기로 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계획은 어긋나야 제 맛? 오노미치에서 누굴 봤게?
타마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배웅 대신에 산책을 함께 해 주었다. 내가 녹차를 좋아한다는 얘길 듣고 오노미치에서 직접 기른 녹차를 파는 가게로 안내했다. 상점가 어딘가에 연결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 끝에 작은 찻집이 나타났다. 아슬아슬한 나무 계단을 오르면 테이블이 단 두 개 있는 다락방이 있다. 점원이 “하루 중 딱 지금 시간의 햇빛이 좋다”고 말하며 갈대와 마른 꽃을 우리 앞에 장식해 준다. 오래되어 낡고 좁은 나무 건물 다락방에서 새로 사귄 친구와 오전 햇살 받으며 앉아, 녹차와 화과자와 타이야키(일본 붕어빵)을 먹는다. 여기서는 내내 꿈 같은 풍경 속에 머물게 된다. 너무 고마워서 내가 사겠다는데 “너는 멀리서 온 손님이니 당연히 대접받아야” 한단다.
타마가 남편인 히로짱의 고향 마을에 정착하게 된 사연은 자세히 듣지 못했다. 지금은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게 삶의 전부라고 한다. 타마의 아들 에이타로와 린타로를 보면 그녀의 삶의 모양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고, 호기심이 넘치며, 어른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어린이들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은 나에게서 영영 멀어진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타마 같은 친구의 삶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건 곁에서 보고 상상하고 배워야 할 테니까. 나에게 친구는 언제나 학교다.
맛있는 녹차를 구하고 싶던 참에 가게에서 녹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특히 바닷가에서 말려 미네랄과 바다 향을 느낄 수 있다는 녹차의 맛이 궁금했다.
돌아 나오는 좁은 길 끝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골목 안 작은 가게를 들여다봤다가 일본 배우 타키토 켄이치(滝藤賢一)와 코앞에서 눈이 딱 맞았다. 쉴 새 없이 봐 온 일본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라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더니 찡끗 웃어 준다. 일본 드라마 「코타키 형제의 사고팔고」의 동생 역을 맡은 개성파 배우인데, 정작 일본인 타마는 전혀 모르는 눈치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촬영을 준비 중인 스태프들과 구경하는 인파로 상점가가 북적거린다. 타마가 구경하던 지인에게 물으니 내년 NHK에서 방영될 드라마라고 했다. 짧은 일본 여행 중에, 게다가 도쿄도 아닌 시골에서 연예인까지 보다니, 도대체 이번 여행운은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타마와의 산책과 티타임 데이트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개인실에서 도미토리로 짐을 옮겨 두었다. 마침 아침밥을 먹었던 킷챠우이 가게 주인 도이가 숙소에 찾아왔다. 그의 옛친구가 오노미치에 방문했기 때문인데, 친구를 이 숙소로 데리고 왔다. 가게 바깥에서 다시 만난 도이에게 “행복한 식사였다”고 인사하고 “내일도 아침 먹으러 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침에 킷챠우이 가게 창가 테이블에 있던 한 분이 자신은 ‘내가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1층에서 가게를 하는데, 어제 나를 봤다’며 인사를 했었다. 뭘 파는지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로컬 오가닉 제품이 작고 아늑한 가게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오미야게(기념품) 할 만한 걸 찾아 찬찬히 구경하다가 사바칸(고등어 통조림)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일본 기념품은 아니지만 이번 여행에서 본 영화에 영감을 받은 선물로 딱 맞을 것 같았다. (후쿠오카 나카스 지역의 오래된 영화관에서 영화 ‘사바 칸즈메’를 봤었다.) 게다가 커다란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 지역에서 친환경적으로 만든 것이란다. 지역에서 재배한 쌀로 만든 국수면과, 동네 누군가가 일러스트를 그렸다는 예쁜 테누구이(주방용 수건)도 골라 담았다. 쇼핑을 어려워하는 나에게 선물을 고를 기회마저도 이렇게 딱 맞게 찾아온다.
이 게스트하우스에 최대 몇 명까지 묵을 수 있을지 세어 보았다. 스무 명까지는 가능할 것 같다. 벤치에 앉아 언젠가 한국에서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올 즐거운 상상을 하며 헤벌쭉 웃었다.
‘관심’이라는 사랑의 행위
오노미치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는 나의 메시지에, 고우는 배웅 대신 드라이브를 시켜 주겠다고 답장했다. 마침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같이 가자는 다정한 제안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 잃어버린 동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태도나 성향이 닮았다.
어젯밤 라면 가게 마타타비에서 돈 없이 여행하는 고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누구는 술을, 누구는 밥을 사겠다고 서로 다투었다. 나도 지갑 속에서 5천 엔짜리 지폐를 꺼내 혹시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이 돈을 받아달라고 했었다.
노래를 부르고 살아 보겠다고 한 걸음 내디뎠을 때, 나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의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용기를 낸 누군가에게 내가 받은 것들을 돌려주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내가 받아 온 것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돈으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부끄럽지만.) 나는 서로 주고받는 것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이 흐르고 흐르는 커다란 동그라미를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늦은 오후에 고우를 만나러 항구에 갔다. 건너편 섬에 주차된 그의 집(차)은 캠핑용 도구들과 널린 빨래로 여행의 냄새를 잔뜩 풍기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다. 고우가 고향인 후쿠시마를 떠나 도쿄로 상경한 이유는 밴드 활동 때문이었다. 지금은 니가타에 정착해 사진가를 꿈꾸면서도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밴드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새로운 노래를 서로 소개하는 동안, 자동차는 음악을 싣고 지는 해를 좇아 달렸다.
빛이 다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도착한, 아무도 없는 작은 해변에는 신사의 입구를 알리는 토리이(鳥居)가 석양을 오롯이 마주하며 서 있었다. 올 여름 영덕 고래불해수욕장에서 말없이 바라보던 아침, 한낮, 해 질 녘, 한밤의 바다로 이미 한계치를 넘을 만큼 바다의 아름다움을 몸에 채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바다보다 산이 더 좋다고 외쳐왔는데, 그때를 분기점으로 무게중심이 바다 쪽으로 이동했을 정도다. 이름도 모를 일본의 작은 해변에 도착해 바라본 하늘과 바다의 빛은 순식간에 내 의식 너머로 쏟아져 들어왔다. 세포 하나하나가 기쁨에 휩싸여 꿈틀거린다. 그 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모래 위에 앉아서, 오늘이라는 해가 건너편 섬을 넘어 사라지는 동안 배웅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츠카레사마데시타. 마타 아시타!’(수고했어요. 내일 다시 만나요!)
귀중한 물건을 찬찬히 꼼꼼하게 바라보는 행동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가 있다고 고우가 알려줬다. (뭔지는 까먹었지만)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타인을, 자연을, 세상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구석구석 바라보는 것 자체가 사랑의 행위라고. 사진을 찍으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시간을 통해 깨달았다고 한다.
줄리아 카메론의 책 『아티스트 웨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의 편지가 떠올랐다. 삶의 물살에 발을 담그고 ‘관심’을 놓지 않는 작가의 할머니는 언제까지나 따르고 싶은 모습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장면과 순간이라도 흘러가 버리고 만다. 해를 배웅하며 머문 그날의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리더라도, 각자의 삶 속에서 관심이라는 사랑의 행위를 이어가는 것만큼은 몸에 남았으면 하고 바랐다.
대학 시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쓴 레포트 생각이 났다. ‘Maximized Life’라는 제목이었다. 경험주의자로 온갖 경험에 나를 활짝 열어 최대한의 삶을 살고 싶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말이든 글이든 주문이 되고 기도가 된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조급할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내내 조급해하며 살아왔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장면이겠지만, 어쩌면 스무 살의 그 주문 덕분에 오늘의 바다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전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지 않은 삶이었는데, 돌아보면 내 몸 구석구석에 특별한 경험들이 새겨져 있다.
공장지대 한가운데 있는 작은 클럽, 남아공 친구의 송별회 밤새 "놀자, 놀자, 놀자!” 즉흥 잼, 랩, 그리고 춤
밤에는 고우와 그의 친구 CJ를 따라, 모르는 사람의 송별회에 가게 되었다. 공장지대 한 가운데 작은 불빛을 따라 들어가니 클럽이 있었다. 밤에 시끄러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위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필립이 오노미치를 떠나게 되어 그의 친구들이 악기를 하나씩 가져와 즉흥 잼을 하는 자리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남아공 사람에게 일본어로 만날 때와 헤어질 때의 인사를 동시에 하고 곧이어 음악에 빠져들었다.
기타 두 대와 베이스 두 대, 건반과 드럼 세트, 이름 모를 일본 전통 악기들이 모였다. 전통 악기의 소리를 내려면 온도를 맞춰줘야 한다며, 누군가 난로 앞에서 나무 악기에 마사지를 하고 있다. 언제 끝날 지 아무도 모르는 음악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몸을 흔든다. 나중에는 래퍼까지 등장했다. “이런 게 되는 곳은 여기밖에 없으니까 놀자, 놀자, 놀자!”에 맞춰 다 같이 손을 번쩍 들어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노미치 이야기로 작은 매거진을 만들 계획이라는, J라는 친구에게 내가 부산 배급을 맡겠다고 큰소리 쳤다. 그랬더니 ‘너도 오노미치 이야기로 글을 써서 책을 만들어 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말만 하면 뭐든지 이루어질 것 같은 오노미치의 (진짜) 마지막 밤이 한 번 울리면 사라지는 즉흥 음악에 실려 둥둥 떠다녔다.
쿠라시키로 떠나기 전날 밤, 온갖 우연이 가져다 준 색과 소리와 말을 머릿속에서 돌려보고 또 돌려보느라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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