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라는 걸 밝히기 어렵지 않았나요?’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숲은 생각한다

김고은 | 기사입력 2024/01/24 [14:21]

‘페미니스트라는 걸 밝히기 어렵지 않았나요?’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숲은 생각한다

김고은 | 입력 : 2024/01/24 [14:21]

[필자 소개] 김고은. 공부하는 인터뷰어.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20대를 꼬박 보냈다.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동양고전을 공부하며,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배운다는 게 뭔지 알게 됐다. 거기에 우리가 나눠야 할 무언가가, 우리를 연결시켜 줄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공동체와 책에서 배운 것을 사회에서 생산해보고자 30대는 인터뷰어로 살고 있다. 공부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 동양고전 공부와 인터뷰 활동을 동시에 이어나가는 중이다.

『어쩌다 유교걸』(2023), 『함께 살 수 있을까』(2023)를 썼고, 『다른 이십대의 탄생』(2019)과 『낭송 사자소학』(2018)을 함께 썼다.

 

▲ 필자 김고은. 동양고전 공부와 인터뷰 활동을 동시에 이어나가는 중이다. 2023년에 책 『어쩌다 유교걸』과 『함께 살 수 있을까』를 출간했다. (필자 제공 사진)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망설인 이유

 

“페미니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데,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밝히기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최근에 ‘저자와의 만남’에 초대받아 다녀온 대안고등학교에서, 학생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이다. 내가 쓴 책 『어쩌다 유교걸』의 부제 ‘페미니스트의 동양고전 덕질기’를 보고 한 말일 테다.

 

내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0년 전, 대학에서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고 별세계에 눈을 뜬 것처럼 희열을 느꼈고, 가부장제에 반기를 들겠다고 주위에 선언하고 다녔음에도 말이다.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만나고 3년 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로 평생 페미니즘을 싫어할 것처럼 굴었던 나의 여성 친구들까지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내게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늘어난 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마치 세상이 둘로 쪼개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를 가나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밝힐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편인지 아닌지 검증하지 않는 곳은 동창회가 유일했다. 하룻저녁 만나 옛 추억을 회상하고 싶은 이들만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물론 세상이 둘로 쪼개진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전투 의지를 불태우며 싸움을 축제로 만드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분노를 에너지원으로 쓸 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페미니즘의 불길이 일었을 때 속수무책으로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내게 질문해 주었던 친구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을 때만 어설프게나마 웃으며 대면할 수 있는 시간, 정체를 밝히면 밝히는 대로 어색하고 밝히지 않으면 그런대로 이상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질문을 받은 현장에서 나는 시간 문제상 “어쩔 수 없었다”고 짧게 대답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며칠 내내 저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혼맹’의 위험과 ‘또 다른 자기’들

 

페미니스트라고 확언한 시간보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던 시간이 더 길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게 된 건, 『숲은 생각한다』라는 인류학 책을 읽고 나서였다. 아마존에서 4년간 생활했던 저자 에두아르도 콘이 아마존에 살고 있는 루나족이 어떻게 숲을 만나는지를 담아낸 낸 책이다.

 

▲ 『숲은 생각한다 -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원제: How Forests Think 에두아르도 콘 지음, 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표지 이미지. 캐나다의 인류학 교수이자 코스타리카에서 생태학을 공부한 저자가 아마존 숲속 생활상을 4년간 관찰, 사색한 결과물을 담은 책이다.


책은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서 자고 있었던 저자에게 주민이 다가와 엎드려 자지 말라고 경고해 주는 말로 시작한다. 똑바로 누워서 자야 재규어가 우리를 자신과 똑같이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 또다른 포식자라는 것을 알게 되므로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은 은유로, 세상을 만나는 능력을 의미한다. 루나족은 인간성을 숲에 투영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들, 숲을 포함한 이 세계 존재를 ‘또 다른 자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숲을 만나지 않고, 숲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만난다.

 

그런데 만일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엎드려서 자면 재규어와 눈을 마주칠 수 없으므로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태에 빠지는 것을 ‘혼맹’이라고 부르는데 혼을 인지하는 능력이 쇠퇴한 상태, 즉 관계를 알아차릴 수 없는 무능력의 상태를 의미한다. 만일 ‘또 다른 자기’들을 인식할 수 없다면, 그러니까 누군가를 알아차릴 수 없어서 관계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완전히 눈이 멀게 된다.

 

이 책을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함께 읽은 뒤 에세이를 발표하던 날, 10년간 지낸 공동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면서 내 에세이를 낭독했다. 그간 마음이 묻어두고 있었던, 세상을 먼저 등진 친구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이 너무 황폐한 단어라고 느끼고 있었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사회적으로 자살을 비극적인 개인의 선택이라고 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구를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 책을 따라 친구의 죽음을 ‘혼맹’으로 부름으로써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게 됐다.

 

혼맹은 이 세계에 실존하는 위험이다. ‘또 다른 자기’들의 생태학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죽음을 부를 수 있다. 누구나 혼을 통해서, 그러니까 관계 맺기를 통해서 삶을 가꾸어간다면 거꾸로 그로 인해서 죽을 수도 있다. 내 친구의 죽음은 단지 한 개인의 비극적인 서사라고만 부를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내재해 있는 것이 그의 삶 역시 위태롭게 한 것이다. 그의 죽음이 혼맹이라면, 그가 죽은 것처럼 다른 누구도 죽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 생각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일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내 주변 여자 친구들이 내게 자신들이 어딘가 아프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섭식장애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 연예인들이 스러지듯이 죽어 나갔다. 자살 시도를 한 여성 청소년들의 기사가 올라왔다. 이 사회에서 혼맹은 너무 흔한 일이 되었다. 내 친구가 죽은 것처럼, 누구라도 그렇게 죽음 가까이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페미니스트가 받는 시선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분투가 힘겹게 느껴진다. 최근에 ‘2030 남성 그룹’ 유권자가 ‘코어 보수 그룹’ 유권자보다도 젠더 문제와 차별금지법 이슈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기사를 봤다. 내가 어떤 이들과 함께 살아나가야 하는지, 막막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건, 정말이지 별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든 기도할 일이 생기면 나는 ‘누구든 덜 아프고 덜 죽게 해주세요’ 하고 빈다. 그러나 만년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 중 하나다. 그럼으로써 나의 ‘또 다른 자기’, 그러니까 가까운 친구들부터 이름모를 어떤 여성들까지 그 옆에 서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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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기 2024/02/01 [15:00] 수정 | 삭제
  • 고은의 글이 위로와 힘이 되어요. 많이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아주 작은 일 역시 내가 안전한지 확인하고나서야 겨우 말하게 되는거 같지만, 그럼에도 작은 일부터 같이 하나 하나 해나가요. 고은이 함께 있어서 다행입니다
  • 트루스 2024/01/26 [20:54] 수정 | 삭제
  • 엄청 철학적인 내용이네요.
  • Ll 2024/01/26 [17:31] 수정 | 삭제
  • 감정소모는 자제하시고 여기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이 TED영상을 보시길 권해요 https://youtu.be/uaEsX5DT2-0?feature=shared
  • 정의롭자 2024/01/26 [17:14] 수정 | 삭제
  • 남성이 여성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서는 안되는 것처럼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려해서도 안됩니다. 우울증과 자살관련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남자가 훨씬 우울증을 겪고 자살을 많이한다는 통계가 제시되는데도 불구하고.기사의 예시로 든 사례는 여자였고 일러스트그림도 절망에 빠진 여자 그림이었죠. 도처에 이런 담합과 눈속임을 벌이며 끊임없이 혐오감정을 부추기면서 당신들은 혐오를 당하고 있다 주장합니다. 정말 참으로 부조리해요.
  • 페미니스트 2024/01/26 [11:59] 수정 | 삭제
  • 성범죄의 공포에 일상에서 떨어보지 않는 사람은 페미니스트가 되기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유엔에서 정의한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 GBV)에 대해 찾아보면 좀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이퀄리스트 2024/01/25 [21:35] 수정 | 삭제
  • →마루
    범죄대상이나 피해자의 성별여부를 기계적으로 엮어서 젠더차별로 치환시키고
    그걸로 남녀를 갈라치고 질낮은 선동하시려고 하시는데,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범죄자는 범죄대상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낮보다 밤에 일어나는 강력범죄가 압도적으로 많으면
    강력범죄자들이 밤에 다니는 사람들을 차별해서 일까요??

    강도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자들을 범죄대상으로 삼는건
    부자들을 차별해서 일까요??

    범죄자는 범죄대상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선별"하지요.

    그리고 그 선별기준은
    늘 철저하게 범죄자에게 이익되느냐 아니냐 일뿐입니다.

    세상사람의 90%가 동성애자여서
    대부분의 강간피해가 동성끼리 발생하고
    강간이나 데이트폭력, 불법촬영의 피해자 대부분이 남성이 된다면

    강간범,데이트 폭력범,불법촬영범죄자들이
    "남성"을 차별해서 범죄를 저지른다고 하실건가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가 누구에게 자가당착을 운운하는지 모르겠네요.
  • 마루 2024/01/25 [16:22] 수정 | 삭제
  • 온라인 댓글에 이퀄리스트라고 스스로 칭하는 분들은 대부분 자가당착이 심한 것 같이 느껴지는데, 알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듦. 강간죄나 데이트폭력, 불법촬영 같은 젠더폭력의 가해자는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습니다. 성별을 이유로한 폭력과 차별이 있음을 인정해야죠. 범죄 피해나 자살률이 어떻게 감성팔이가 될 수 있나요. 그런 게 반페미니즘적인 발언입니다. 만약 남성자살자들의 사회적인 타살 동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요. 이 글 쓴 분이 말하는 "또 다른 자기들"을 생각하며 그 옆에 있어주세요.
  • 이퀄리스트 2024/01/25 [15:28] 수정 | 삭제
  • 범죄나 자살로 감성팔이 성별갈라치기 하는걸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페미니즘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글이네요.팩트는 대한민국 건국이래 남성범죄피해자가 여성보다 적었던적이 없었고, 남성자살자가 여성보다 적었던 적이없습니다. 그런데 범죄로 죽어가는 '여성'때문에 자살하는 '여성'들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되셨다구요?? 그 동기자체가 얼마나 차별적이고 편향적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자백이네요.
  • Zany 2024/01/24 [21:03] 수정 | 삭제
  • 함께 살 수 있을까를 우연히 읽었어요!! 대단하지 않은 듯 이야기하는 대단한 인터뷰이들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인터뷰를 한 김고은씨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책인데.. 반가운 에세이를 찾았네. 혼맹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 블루베리 2024/01/24 [16:08] 수정 | 삭제
  • 나도 뜬금포로 페미냐 물으면 말문이 딱 막혀버릴 때가 많았는데, 그건 질문이 아니라 공격에 가까웠기 때문인 것 같아요. 궁금해서, 알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라,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례한 발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꼭 답변해야 할 필요도 없는데, 하지 않으면 찝찝하고, 그런 상황일 때 답변과 태도를 미리 준비해둬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답변도 좋은 것 같아요. 많은 게 생략되어 있어서 의미심장하기도 한데, 있는 그대로 솔직한 답변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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