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기억들, 배 타고 떠나는 여행의 맛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12편: 바다 위의 호텔(뉴카멜리아호)에서 하룻밤

이내 | 기사입력 2024/02/24 [21:02]

바다 위 기억들, 배 타고 떠나는 여행의 맛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12편: 바다 위의 호텔(뉴카멜리아호)에서 하룻밤

이내 | 입력 : 2024/02/24 [21:02]

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 밤의 부산항. (사진-이내)


바다 위에서 빠져든 깊고 푸른 잠 

 

여행 앞뒤로 스케줄을 몰아 두어 떠나기 전에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직전 일주일은 비가 얼마나 퍼붓던지 책방에는 누수가 발생하질 않나, 폭우 속에서 잠깐 걸었을 뿐인데 몸살을 조금 앓았다. 여행 전에 체력을 만들어두겠다는 계획은 물 건너가고 오히려 두통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따뜻한 물을 계속 마시고 급하게 두통에 좋은 지압 혈자리를 검색해 이동 중에 계속 손톱으로 눌러준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는 것이다.

 

‘뉴카멜리아’라는 이름의 커다란 배는 ‘바다 위의 호텔’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해 질 녘 승선해서 다음 날 해 뜰 때 후쿠오카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식당, 목욕탕, 간단한 편의점, 노래방까지 갖추고 있어 하룻밤 지내기에 충분하다. 전에 친구들이랑 시모노세키로 가는 비슷한 배를 탔을 때는 너른 방에 둥글게 모여 앉아 술판을 벌이고 신나게 놀았다. 이번에도 한 방에서 여러 명이 함께 자는 3등칸을 예약해 두었는데 몸 상태가 걱정이었다.

 

체크인 대기하며 발견한 어느 블로그 포스팅에, 마침 선내에서 객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바다 위 여행의 낭만이고 뭐고 일단 맑은 머리로 일본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과감하게 추가 비용을 내고 2층 침대가 하나 있는 작은 방을 얻었다. 배가 출발도 하기 전에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평소에는 전혀 떠올리지 않는 기억들이 어딘가 숨어 있다가 툭 튀어나오는 것도 여행의 선물이다. 새로운 곳에서 과거의 아는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좀 답답하게 느껴지던 (젊은)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기억이라도 더 붙잡고 싶어지나 보다.

반짝이며 일렁이는 바다가 모든 기억을 품고 있다가 배 위에 오르면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도 위에서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 해 질 녘 부산에서 승선해서 다음 날 해 뜰 때 후쿠오카에 도착하는 커다란 배 '뉴카멜리아’는 몸살 기운이 남아있던 내게 숙면과 회복을 선사했다. 카멜리아는 동백꽃이라는 뜻이다. . (사진-이내)


#바다 위의 기억들

 

최초의 기억은 엄마랑 둘이서 통통배를 타고 부산 근교 가덕도로 가는 길. 하늘도 바다도, 굽이굽이 작은 바위섬의 해안을 따라가는 모든 장면이 눈부셨다. 그중에 가장 선명한 기억은 행복한 엄마 얼굴.

 

스무 살 어느 날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배를 타고 팔이 빠져라 그물을 당긴 적도 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일당은 받았다. 두 달 정도 머물던 키부츠에서 딱 하루, 작업리스트의 내 이름 옆에 ‘Fishing’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지. 참신한 기억을 안겨주려는 누군가의 음모였을까. 그렇다면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

 

중국에서 돌아오는 배 안에서는 야전 침대를 겨우 얻어 잤다.  배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상인으로부터 밀수품을 대신 가지고 나가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파도 위 햇살로 불멍과 물멍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깨달았다.

 

제주에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별을 보며 사랑을 속삭이던 밤. 사랑은 참 짧기도 하지.

 

영도와 남포동을 이어주던 대중교통의 배가 사라진 게 얼마나 아쉬운지 모른다. 오노미치에서 무카이지마로 가는 작은 배(차는 30엔, 사람은 80엔, 10분이면 도착한다.)가 반가웠던 이유인가 보다. 지난 일본 여행에서는 이 배를 걸어서 한 번, 자전거로 두 번, 차로 한 번 탈 수 있었다.

 

그리고 숙면과 회복의 배, 내리자마자 다시 타고 싶어진 배의 기억이 이번에 추가되었다.

 

▲ 새벽의 후쿠오카항. (사진-이내)


배 위 흔들리는 침대에서 깊은 숙면을 취한 나의 몸과 마음은 여행할 수 있는 상태로 복귀되었다. 비행기나 버스와 달리 왜 모든 선박에는 고유한 이름을 붙여주는지 이유가 궁금해져서 찾아봤다. 캄캄한 미지의 바다로 보내는 배에 기도의 마음으로 이름을 붙인 것 같았다. 기차나 비행기도 없던 시절부터 먼 길을 떠날 수 있게 해 주던,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꽃이나 여신의 이름을 배에 지어준 게 시작이었나 보다. 어촌 마을의 작은 고깃배에도 언제나 손으로 직접 쓴 ‘희망호', ‘코스모스' 같은 이름이 있는 게 귀여워 흥미롭게 보곤 했다.

 

돈 없어서 선택한 배가 고맙게도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너 정말 추억 부자구나!'

배 안에서 조금씩 작아지는 육지의 모습, 해가 뜨거나 지는 바다 위로 일렁이는 누운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을 좋아한다. 축축한 소금 바람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마구 때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느낌마저도 좋아한다. 그게 배 타고 떠나는 길의 맛이니까.

 

상쾌해진 몸과 마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동백꽃(카멜리아)이 길고 긴 치유의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면, 돌아오는 길의 딱정벌레(비틀)는 3시간 40분 만에 나를 부산항에 내려주었다. 시원한 나마비루(생맥주)를 덤으로 안겨주며. 부산에서 버스 타고 강원도 가는 데 걸리는 것보다 훨씬 적은 시간으로 후쿠오카에 갈 수 있다. 후쿠오카 여객 터미널도 시내까지 걸어서 30분. (물론 버스를 탄다.) 도어투도어가 다섯 시간도 안 되는 곳에 일본어를 실컷 쓸 수 있는 도시가 기다리고 있다니. 이러니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다시 갈 결심을 챙길 수밖에.

 

▲ 후쿠오카에서 부산으로 돌아올 땐 딱정벌레(비틀)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3시간 40분만에 도착했다. 시원한 나마비루(생맥주)를 마시며. (사진-이내)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여행자라서 죄송합니다만”

 

후쿠오카는 공항도 시내에서 가깝더니 항구도 가깝다. 버스로 15분 만에 하카타역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출발한 소라와 만나기로 한 장소다. 내 도착 시간이 두 시간쯤 이르지만, 오히려 좋아. 우선 한국에서 예약해 온 JR 패스 교환을 위해 하카타 기차역 창구에 들렀다. 일본은 지역마다 철도 회사가 달라서 하카타에서 남쪽 규슈 방향, 북서쪽 오사카 방향의 창구가 다르다. 작년 여행에는 그걸 몰라서 다른 곳에 줄을 한참 서서 기다렸다. 커다란 하카타 역내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진 지금은 문제없다.

망설임 없이 출근 시간의 인파를 요리조리 샤샤샥 피해 걸으며 목적지에 도착, 마법의 티켓을 손에 넣었다. 일주일 동안 이번 여행에 가장 중요한 이동 수단인 신칸센과 기차를 마음껏 탈 수 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로워 소라의 도착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다. 편의점에서 간단한 요기거리를 골라 역 건너편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을 좋아한다. 일부러 일찍 약속 장소에 나가서 설레는 마음을 만끽하기도 한다. 초록 잔디와 나무와 꽃, 그리고 양복 입은 사람들이 출근 전 잠시 아침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모습을 한참 구경했다.

‘여행자라서 죄송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하고 혼잣말을 했다.

사실, 여행하러 와서 바쁘게 사는 사람들 사이에 흐뭇하게 앉아 있는 악취미가 있다. 유명한 미술관에 가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일본 라디오를 들었다. 일본어 워밍업이라고나 할까. 매주 화요일 음악가이자 배우이자 작가인 ‘호시노 겐'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올나이트닛폰〉을 듣는다. 수요일 아침이면 반드시 누군가가 노래와 광고가 빠진 버전을 유튜브에 올려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당신은 제 일본어 공부의 최대 공로자입니다!)

 

4년째 듣다 보니 진행자인 호시노 겐 뿐만 아니라 피디인 오치아이, 작가인 테라사카, 에이디 미나미, 최근 졸업(일본은 뭔가 그만둘 때 이렇게 표현한다)한 음향의 오사 씨까지 모두 친한 사람 같다. 매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사건사고가 쏟아지는데 ‘어제 호시노 겐 라디오 들었어?’로 시작하며, 수다를 떨 친구를 못 만들어서 내내 쓸쓸하다.

 

매주 청취자들이 30초짜리 라디오 씨엠송을 만들어 보내는 코너가 있다. 멋진 음악을 보내는 사람도 많지만, 말로 하는 코미디 강국인 일본답게 우스갯소리를 그냥 녹음해서 보내는 단골 청취자도 많다. 이번 주에는 어디 야외에서 녹음한 모양인지 목소리랑 비슷한 크기로 매미소리가 담겨 있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지금 앉아있는 메이지 공원에서도 같은 매미 소리가 난다는 게 묘하게 기분이 좋다. 일본 매미는 한국 매미보다 음정이 높고 얇은 소리로 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나라인데 매미 소리가 다르다는 게 흥미롭다. 물론 시끄럽다는 건 똑같다.

 

▲ 이번 여행에 초대해준, 부산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 ‘소라’를 기다리던 메이지 공원. (사진: 이내)


‘무한 친구의 법칙’, 친구밖에 없는 여행이 시작된다!

 

저 멀리 긴 다리로 성큼성큼 소라(이번 여행에 초대해준 부산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가 걸어왔다. “일본에서 만난 게 믿어지지 않는다”가 그녀의 첫 인사였다.

소라는 하카타역 안에 이탈리안 카페를 미리 찾아 둔 모양이었다. 다시 출근길 인파 사이를 지나 이름을 도저히 외울 수 없는 가게에 들어가 이름을 도저히 외울 수 없는 빵과 함께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완전히 낯선 식감과 맛이다. 크루아상처럼 겹겹이 쌓은 페이스트리 안에 피스타치오 소를 넣어 기름에 튀긴, 조개 모양의 빵이다. 에스프레소와 궁합이 좋다. 다음에 가면 꼭 이름을 외워 두기로 한다.

 

소라가 계획한 하루 일정이 무시무시했다. 후쿠오카에서 두 사람을 각각 만나고 오후에 시외버스로 1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곳인 사가현 아리타에 간다. 소라의 고향에서 그녀의 특별한 두 가족을 만난다.

 

웬만하면 하루에 스케줄 하나 이상 잘 만들지 않는 나와는 계획의 규모가 확연히 다르다. 반나절 머무른 후쿠오카에서 지하철을 4번이나 탔다. 모든 여행의 계획이 그렇듯,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한 신문기자 히라바라 씨의 오전 취재가 길어져 텐진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리는 갑자기 쇼핑을 시작했다. 구마모토의 꽃차 브랜드 가게에서 시음을 다섯 잔 넘게 하고, 무인양품을 구석구석 다 살피고도 기약이 없어 다른 친구를 먼저 만나기로 일정을 바꿨다.

전직 고교 야구부 매니저답게 소라의 일 처리는 일사천리, 게다가 변수에도 흔들림이 없다.

 

아직 막 도착한 이국의 도시에도, 운동부 속도에도 적응하지 못한 내가 문제다. 어디서나 찰떡같이 적응할 수 있는 여행자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하루 정도는 언제나 낯을 가리는 게 나의 속도다. 일단은 몸을 좀 움츠리고 파악을 위해 관찰을 시작했다. 걱정할 건 전혀 없다. 여행 직전까지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췄고, 세 번째 만난 외국인 친구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 한 달 넘게 준비한 일본인 친구가 성큼성큼 앞서 걷는다.

 

그리고 결국,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는 무한 친구의 법칙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시작이다. 친구밖에 없는 나의 여행이.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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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바라 2024/03/09 [18:35] 수정 | 삭제
  • 혼자 여행 가고 싶다
  • 마시멜로 2024/02/26 [11:40] 수정 | 삭제
  • 별을 보며 사랑을 속삭이기엔 배 위의 시간이 짧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사랑은 참 짧기도 하지."라니 쿵! ㅎㅎ 넘 공감
  • ㅇㅇ 2024/02/25 [14:50] 수정 | 삭제
  • 나도 첫 뱃여행의 기억이 부모님 친구네 가족들이랑 같이 탄 통통배였는데 그때 생각이 나네요. 바다 위를 떠있다는 거 자체에 들떴던 마음도 생각 나고. 엄청 재밌게 놀았던 추억이 있어요.
  • siren 2024/02/25 [14:02] 수정 | 삭제
  • 배만 타면 멀미를 할 것 같아서 시선을 멀리 던지느라 바쁜데, 그럼에도 배타는 게 싫지 않은 것은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어서겠지요. 캐스트 어웨이를 본 이후에는 좀 더 긴장감이 느껴지긴 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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