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발달한 미래,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을까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숨 EXHALATION

강현주 | 기사입력 2024/03/14 [21:29]

AI가 발달한 미래,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을까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숨 EXHALATION

강현주 | 입력 : 2024/03/14 [21:29]

[필자 소개] 강현주. 전기전자공학을 공부했지만 컴퓨터과학에 좀 더 가까운 분야에서 일한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검증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일을 주로 한다.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을 파헤치고 분석해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여러 기술들이 널리 쓰이고 있는 지금, 과학기술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읽어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잘 견디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큰 몫을 한다고 믿는다.

 

▲ 바닷가에서 찍힌 필자의 모습.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으며, 여러 종류의 SF 도서를 즐겨 읽는다. (사진-강현주 제공)

 

인공지능, SF 도서들이 보여주는 미래의 사회현상들

 

챗지피티, 미드져니, 제미나이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가 출시되고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의 결과물을 자연스럽게 업로드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졌음을 실감한다.

구립 도서관 홈페이지에도 ‘인공지능 기반 도서 추천 서비스’ 항목이 있다. SF에 대한 관심도 뜨거워서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SF 작품들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나도 여러 종류의 SF 도서를 즐겨 읽는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건 테드 창의 『숨』이다.

 

테드 창은 물리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했고, 테크니컬 라이터로 일하며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소설을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테크니컬 라이터는 사용자가 기술이나 기기 혹은 앱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문서를 기획하고 작성하는 직업이다.

이공계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 개발만 할 것 같고 문서 작업을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복잡한 기술들이 수없이 빠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개발자가 아주 기초 단계부터 직접 다 구현하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프레임워크나 라이브러리를 잘 활용하여 제품을 개발하는 역량이 중요한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기술이 널리 쓰이기 위해서는 요점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사용자가 이해하기 쉽게 정리된 기술 문서가 필요하다. 딥러닝(컴퓨터가 인간 두뇌 작동 방식처럼 독립적으로 데이터를 조합, 분석하여 학습하는 기술) 개발 프레임워크 중 파이토치가 가장 널리 사용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정리된 기술 문서의 영향이 컸다.

 

테드 창의 소설은 테크니컬 라이팅을 오랫동안 해온 작가의 특성이 잘 묻어난다.

소설의 도입부는 대체로 이 소설의 설정이 되는 기술을 요점만 간결하게 살려서 전달한다. 기술 문서의 도입부에는 읽는 사람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도록 초록과 같은 요약본을 적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소설 또한 도입부부터 소설 속 세계가 어떤 기술을 골격으로 하여 작동하는지 알려준다. 어떤 소설들은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해 그 의문이 해소되거나 비밀이 알려질 때까지 소설을 손에서 놓지 않도록 끌고 가는 힘이 된다.

 

하지만 창의 소설은 이 소설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자리잡고 있는 세계의 설계도를 미리 알려줌으로써 독자가 헤매지 않고 소설의 다른 요소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모두 이와 같은 도입부를 보여주고, 그 세계 내에서 기술을 사용하면서 개인들이 겪게 되는 갈등과 고민을 다룬다.

 

▲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역『숨』(리커버)-EXHALATION, 엘리. 2022. (원서: Exhalation: Stories) 출판사 제공 사진


인공지능 기반 ‘애완동물’ 서비스를 둘러싼 이야기

가상세계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과 현실세계 사람들의 애정과 행동방식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전직 동물 훈련사인 애나가 디지언트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기반 ‘애완동물’ 서비스를 개발하고 출시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소설이다. 많은 작품들이 인격을 지닌 인공지능 기반의 개체를 다룰 때에는 이미 완성된 상태의 인공지능 로봇 등을 집으로 데려오는 데에서부터 서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동물이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쳐 성장하듯 인공지능도 초기 단계의 미숙한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인격이 성장하고 사고 체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디지언트는 초기에는 여러 가지의 비슷한 서비스들도 출시될 정도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 하지만 디지언트를 키우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용자들은 점점 디지언트들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디지언트 서비스를 제공하던 블루감마사는 폐업을 하고, 사용자들은 새로운 가상 세계 플랫폼으로 이동하여 다른 서비스들을 이용하면서 디지언트들의 세계는 점점 좁아진다.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애착을 갖고 길러온 디지언트들이 새로운 가상 세계 플랫폼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디지언트를 구동하는 엔진 프로그램이 새로운 가상 세계 플랫폼에서도 작동할 수 있도록 소스 코드를 새로 개발해야 한다. 이는 숙련된 여러 명의 개발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그를 위해선 큰 규모의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 애나와 그녀의 블루감마사의 이전 동료였던 데릭은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은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 되어온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이라는 주제를 살짝 비틀어서 인격을 가진 개체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이 긴 시간 동안 공 들여야 한다고 설정한다. 그런데 이 설정은 실제 산업 현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인공지능 서비스들은 수많은 훈련의 결과물이다. 인공지능 모델은 주어진 데이터를 이용하여 설계한 사람이 원하는 답을 만들어내기 위한 일련의 통계적 훈련의 결과물이고,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면 수 없이 많은 숫자들의 집합이다. 가장 높은 성능을 보이는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델의 구조를 변경하고 다양한 훈련 기법을 사용하여 실험하기 위해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은, 이 소설에서 디지언트들이 점점 인격을 형성하고 자신의 사고 회로를 복잡하게 만들어 가며 성장해간다는 설정과 많은 부분에서 겹쳐볼 수 있다.

 

그리고 블루감마사의 폐업으로 해당 서비스가 종료했음에도 디지언트들에게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 방법을 찾아다니는 모습도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애정을 가진 대상에 대해 행동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디지언트들을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고 이전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 싶은 그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들은 소설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어떤 관계가 좋은 관계이며, 그 관계를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필수이지만, 우리는 이를 자주 까먹고는 한다. 관계를 맺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고 성장해나가는 소프트웨어 객체이기에, 독자는 이 관계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을 함으로써 실제 인간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이더라도, 진정한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의 완성도가 아니라 이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이 소설에 무척이나 애정을 느꼈다.

 

▲ 테드 창(Ted Chiang)의 두 번째 작품집 『숨』(Exhalation) 원서 표지 이미지 (Picador)

 

사람들의 ‘잘못된 기억’ ‘기억의 오류들’이 없다면, 관계나 사회는?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또한 관계를 다루는 소설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람이 기억의 오류를 가질 수 없다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인지 체계에 일으킬 수 있는 변화들을 상상해보라고 요청한다.

사용자의 모든 기억을 영상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라이프로그’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세상이 기본 설정인데, 24시간 내내 녹화된 이 방대한 기록 중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탐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때 이 방대한 기록을 쉽고 빠르게 검색하는 웻스톤 사의 신종 검색 기술인 ‘리멤’이 등장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쉽고 빠르게’라는 점은 공학 분야에서 서비스를 개발할 때 자주 언급되는 핵심 원칙이기도 하며, 신기술을 이용해서 개발된 상품을 광고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장점이기도 하다. 리멤을 통해 사람들은 인간의 큰 특징이기도 한 왜곡된 기억을 갖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리멤을 이용해 딸의 라이프로그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화자는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나서야 딸에게 사과를 하지만, 딸의 반응은 여느 사람들과 대체로 비슷하다. 우리가 잘못된 기억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세계에서 갈등은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거짓말을 했던 사람이 바로 사과한다고 해서 모든 갈등이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과를 받는 일은 상처를 회복하는 수많은 과정 중 초기 단계에 필요한 일에 불과하다. 사과를 받은 사람은 그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하고, 이후의 삶의 시간들 속에서 그 사람은 이 고통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의미를 해석해낼 수 있어야 상처가 아물어가는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과거에 딸에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다급하게 딸에게 달려가 진심으로 사과한다. 화자가 큰 용기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용기는 즉각적으로 보상받지 않았고 나는 그 점이 좋았다.

 

▲ 충남 공주시의 지역 축제 현장에 마련된 행사장에서, 주최측이 제공하는 책을 읽는 필자의 모습. (사진-강현주 제공)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과거에 대한 사과라는 점에서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기다렸던 사과가 있었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의 기대는 여러 번 좌절되었다. 나는 상대로부터 그토록 바랐던 사과의 말을 들었지만 내가 예전에 오랫동안 상상해왔던 만큼 후련하거나 기쁘지 않았다. 다른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원한이 있거나 억울한 사연이 있는 귀신들은 상대의 사과를 받으면 성불하는데, 나는 귀신이 아니니 성불할 수도 없다. 사과를 받고 나서도 그 뒤의 삶을 살아야 하는 내가 있었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동안 이 관계에서 나에게 영향을 끼쳤던 일들을 다시 꺼내어 해석해야 했다. 그리고 사과를 받은 뒤의 내가 상대방에게 취해야 할 태도를 선택해야 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혼란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리멤’을 이용해 과거를 확인해서 내 기억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해서 조금 더 빨리 사과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이후의 내가 겪어야 하는 일들은 비슷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상상력

 

창의 소설 속에서 나오는 다양한 과학기술들은 실제 이를 해석하고자 하는 다양한 과학자들의 이론에 기대고 있다. 예를 들어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평행우주론을 다루는데, 양자역학의 원리를 탁월하게 접목시킨 프리즘이라는 장치가 등장한다. 프리즘은 단순히 평행우주 속 자신과의 통신기기가 아니라, 기기 내의 이온 어레이를 이용해서 유한하게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설정이 있기에 사람들은 최대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프리즘을 활용하고 싶어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고통을 받게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세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한 다양하고 복잡한 이론의 요점들을 활용해서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겪는 다양한 고민들을 다룬 작품을 읽다 보면, 실제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기술을 개발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새로운 기술이 얼마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홍보하게 되고, 도파민 생성을 목표로 하는 숏폼 콘텐츠가 가장 큰 파급력을 가진 시대의 사람들은 주로 이 기술이 얼마나 신기한지만을 짧게 이야기한다. 기술을 사용하게 되는 사람들은 이 기술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큰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에 출시된 과학기술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사회 현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과학기술은 더 복잡한 이론을 바탕으로 발전할 것이고 그로 인해 놀라운 경험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기술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이제라도 고민을 할 필요가 있고 과학기술과 사회 구성원간의 상호작용에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테드 창의 소설은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이 이야기하는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미래에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고 헤아려보는 데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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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winkle 2024/03/16 [19:16] 수정 | 삭제
  • 과학기술의 발전을 별도로 보고, 거기에 따라가는 인류와 인공지능이 미칠 해악에 대해 논하는 지금 꼭 필요한 질문을 던져주는 소설 같네요. 예술가의 사회적인 역할이라는 게 이런 걸까 싶기도 하고.. 과학기술과 사회 구성원간의 상호작용에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 큰 울림이 있어서 머리에 맴돌았어요.
  • ㅇㅇ 2024/03/15 [21:45] 수정 | 삭제
  • 미래에 갔다왔나봐.. 이런 생각이 문득!
  • 머글 2024/03/15 [19:24] 수정 | 삭제
  • 너무 재밌네요! 도서관에서 sf소설 몇권 빌려와서는 바빠서 못읽고 반납했는데, 다시 도전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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