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중독으로 이끄는 것과 거리 두기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명랑한 은둔자

손정림 | 기사입력 2024/04/30 [10:39]

우리를 중독으로 이끄는 것과 거리 두기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명랑한 은둔자

손정림 | 입력 : 2024/04/30 [10:39]

[필자 소개] 손정림. ‘비건먼지’ PD 겸 디자이너. ‘비건먼지'는 2020년에 모인 비건 페미니스트 크리에이티브 팀으로, 비건 가시화와 비거니즘 대중화를 위해 비건들의 이야기와 함께 채식과 동물권, 환경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유튜브 영상과 영화, 팟캐스트 등을 통해 비건들의 일상과 삶을 다루는 인터뷰 콘텐츠, 비건 입문자를 위한 정보성 콘텐츠, 다양한 비건 제품을 소개하는 리뷰 콘텐츠 등을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비건 예능 ‘디톡스하우스’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필자는 비건먼지의 비쥬얼 브랜딩과 콘텐츠 디자인을 담당하며, 이번 ‘디톡스하우스'의 메인PD로 제작을 총괄했다.

 

▲ 사진-손정림(‘비건먼지’ PD 겸 디자이너)


일요일 아침. 창문으로 햇빛이 새어들고, 새가 노래하고, 계획도 할 일도 없는 하루가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주중 일하는 날들의 터널 끝에서 맞는 여유의 빛이자 기쁨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날이 두렵다. 이런 날 나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깬다. 막연한 갈망, 내 마음의 문을 긁어대는 이름 모를 불안, 아릿한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응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외로워.

- 캐롤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p.183

 

2020년.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은 아름다운 연도지만, 그 해는 COVID-19로 시작되었다. 집에 갇혔다. 세상 사람들은 갑갑함에 아우성치고, 어떻게 하면 이 불청객을 내쫓을지 골몰했다. 그런데 어쩐지 이 감옥 속에서 나는, 나아졌다. 내가 완벽히 엉망이어서 그랬을까? 드디어 그 때가 와버린 것이다. ‘나’와 마주해야 할.

 

나의 중독의 역사는 길다. 중학교 땐 리듬게임에 중독되어 매일 새벽까지 게임을 했고, 대학교 땐 술과 담배 없인 살 수 없었다.(고등학교 땐 잠시 정신을 차렸던 걸까?)

 

특히나 2019년엔 6mg 담배와 만취, 거식과 폭식이 일상이었다. 가장 독한 담배로 타들어가는 마음을 덮어보았고, 잔뜩 취해 이성을 잃어야만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나의 공허함은 굶주림 때문일 것이라고 위장하다, 공허를 덮어보기 위해 터질 듯이 먹어대기를 반복했다. 감당할 수 없는 불이 나면, 그곳을 탈출해야 한다. 영혼을 잃을 정도로 불행하다면,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옥죄이는 현실을 벗어나니 들리는 마음의 소리

 

그래서 얻은 자기만의 방. 사실 금방 이 집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코로나의 저력에, 별 수 없이 3년을 살게 되었다. 항상 넘치는 스케줄과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정신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따분할 정도의 독방 생활이 시작됐다.

 

▲ 캐롤라인 냅(Caroline Knapp) 에세이집 『명랑한 은둔자』(김명남 역, 바다출판사, 2020) 원제: The Merry Recluse (촬영: 손정림)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 캐롤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p.40

 

도망쳐 모든 것을 차단하니 의외로 술도, 담배도 생각나지 않았다. 중독보단 상황이 독이었단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를 중독으로 이끄는 것은 공허, 괴로움, 도망치고 싶은 마음-현실이라는 독이다. 담배연기와 취기로 가려 들리지 않았던 마음의 소리들이 그제야 들려온다.

중독에서는 겨우 벗어났지만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 무수한 물음표가 찍히고 있을 때 이 책을 만났다. 나아지고 있긴 한 건지, 나는 평생 괴로울 사람인 건지…. 길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난 캐롤라인. 당신도? 나도요. 책을 읽는 것이지만 캐롤라인과 수다를 떠는 것 같았다.

 

술 없이 살아가는 일은 갈수록 쉬워진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명랑한 은둔자』, p.194

 

그는 자신의 사랑과 결핍, 고립과 중독에 대해 그대로 이야기한다. 굶는 것만이 목표였고, 우울에 익숙해졌고, 문득 죽어버리고 싶었고, 중독되었고, 고립되었단 것을. 내가 얻은 위안은 인정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사람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아. 인정. 인정하자. 스스로 중독에 취약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캐롤라인에게 일어설 수 있는 법을 배웠다. 다시 넘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점차 덜 넘어질 것이고, 나를 일으켜줄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럼 덜 아플 것이라는 걸 가르쳐줬다. 책을 만나 얻은 위안 덕에 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었다.

 

▲ 나의 가장 큰 보조바퀴이자 가족, 팀 ‘비건먼지’. 비건 페미니스트 크리에이터 공동체로써 4년째 함께하고 있다. (출처-손정림)


친밀감은 무섭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편안함과 깊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친밀감이다. 내가 존중받고 이해받는다는 느낌, 세상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진다는 기분을 얻게 해주는 길도 친밀감이다. … 그러니 내 마흔 살 생일의 가장 큰 선물은 그레이스와 개들과 함께 조용히 산책했던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애써 얻은 신뢰가 이 관계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우리의 단단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도 선물이었다. 다 큰 여자 둘이서 세상을 함께 걸어나갈 때 드는 놀랍도록 따뜻하고 자유로운 기분. 그것이 선물이었다.

-『명랑한 은둔자』, p.103

 

편안함과 깊이를 만들어내는 친밀감, 내 삶을 다시 일으킨 버팀목

 

나는 여전히 나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내가 스스로를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단점과 약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더이상 고립되지 않는다. 내가 고립되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퀴 하나밖에 없는 외발자전거라 위태롭다면 보조바퀴를 늘리자. 내가 흔들려 위태로운 순간 내 사람들이 나를 지탱해줄 테니.

 

나의 가장 큰 보조바퀴이자 가족, 팀 ‘비건먼지’. 비건 페미니스트 크리에이터 공동체로써 2020년부터 4년째 함께하고 있다. 내 삶을 다시 일으키며 만나게 된 가장 큰 버팀목이다. 세 명의 멤버들이 함께 살며 각자 중독된 것을 디톡스하는 비건 예능 ‘디톡스하우스’를 기획했다.(영상 시리즈는 ‘비건먼지’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 @veganmonji) 청년 비건 페미니스트들이 함께하며 다정하고도 재밌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늘 머리맡에 두었던 책은 나에게 새겨져, 이제 텍스트를 넘어 캐롤라인이 늘 함께하는 듯하다. 내겐 참 아팠던 ‘중독’이란 키워드였지만, 캐롤라인에게 받은 위로를 나의 방식으로 전해보려 한다. 

 

나는 이렇게 지내. 넌 요즘 어때? 이 글을 읽는 당신께 안부를 묻는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중독될 수밖에 없는, 중독을 시키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누군가의 머리맡 위로가 되길 바라며.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ㅎㅎ 2024/05/07 [16:50] 수정 | 삭제
  • 나도 은둔자, 나름 명랑함 ㅎㅎ
  • 랄랄랄라 2024/05/04 [13:24] 수정 | 삭제
  • 비건먼지라니.. 재밌는 이름이네요. 구독신청했어요.
  • 독자 2024/05/03 [11:52] 수정 | 삭제
  • 사진도 글도 서정적인 느낌이라 몇 번 읽어보았어요. 디자이너분이라 사진이 되게 감성을 건드리네요..
  • 나도 2024/05/02 [11:56] 수정 | 삭제
  • 읽고 싶은 책 리스트가 늘어가는 중..... 인용구가 딱 꽂혔.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