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 찾아와도 나는 여전히 ‘나’

다른몸들이 읽는 영화 〈스틸 앨리스〉

이혜정 | 기사입력 2024/07/19 [10:26]

질병이 찾아와도 나는 여전히 ‘나’

다른몸들이 읽는 영화 〈스틸 앨리스〉

이혜정 | 입력 : 2024/07/19 [10:26]

[기획의 말] 주류 질병 서사를 비판하고, 새로운 질병 서사를 쓰며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을 하는 ‘다른몸들’에서 미디어 속 질병과 장애를 이야기합니다.

 

처음 부은 손을 붙들고 깨어나던 날을 기억한다. 평소처럼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디딘 손목으로부터 올라오는 날카로운 통증과 맞닥뜨렸다.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은 낯설다 못해 공포스러웠다.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몇 달 전부터 아팠던 무릎을 절뚝거리며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선고를 내리듯이 내게 말했다.

“류마티스 관절염입니다.”

 

나는 그날의 장면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진료실에 감돌던 서늘한 공기와 의사의 눈빛, 그리고 말투.

 

“어떻게 해야 해요?”

나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내게 뭐라고 답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위로의 말을 건넸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원했던 답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진료실을 나섰다. 갑자기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병원 한가운데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고난들에 대해 짐작해보면서. 엄청난 공포가 덮쳐왔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짐작했던 고통은 실제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는 그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영화 〈스틸 앨리스〉 속 앨리스가 병명을 듣던 그 순간에 나는 그 날의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는 단어에 직면하자 앨리스는 잠시 침묵한다. 잠깐의 침묵 속이 영원처럼 깊다. 그런 앨리스를 바라보던 나의 동공은 순간 텅 비어버렸다.

 

▲ 영화 〈스틸 앨리스〉(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 2015)에서 앨리스(줄리앳 무어)의 모습


〈스틸 앨리스〉(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 2015)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로 언어를 잃어가는 언어학자 앨리스의 일상을 조망한 영화다. 어찌 보면 평범할 수 있는 ‘일상’ 조각들의 모음집 같다. 앨리스는 이 조각들 속에서 자주 멈칫한다. 질병 때문에 익숙했던 일상들이 생소해지기 때문이다. 영화는 등장 인물들의 고양된 감정이나 극적인 사건들에 집중하지 않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사소한 변화들을 따라간다. 너무나 사소해서 포착하기도 힘든 그런 변화들 말이다. 그러나 마침내 어긋나기 시작하는 장면들에 도달했을 때, 관객들은 그 작은 균열들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첫 장면은 과거형이다. 어느 평범한 하루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앨리스의 생일에 가족들이 모이고,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던 대화가 어느 순간 어긋난다. 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대화에서, 앨리스가 자신과 언니 사이의 관계를 불쑥 들이민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대화의 참여자들은 이 작은 균열을 포착하지 못했고(너무나 당연하게도), 이야기는 곧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한 가족의 화기애애한 한 때는 다행히도 무사했다.

 

대화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서로의 시공간을 맞추어 나가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대화가 어긋난 이 찰나로부터 앨리스의 시공간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던 이 하루의 균열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스가 기억하는 한 때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첫 장면은 과거형으로 읽힌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검은 스크린 너머로 앨리스의 독백이 있었을 것만 같다.

“아, 맞아. 그때부터였어.”

 

사실 질병을 앓는 이들에게 이러한 장면들은 굉장히 많다. 조깅을 하던 앨리스가 갑자기 방향을 잃고 서 있었던 장면이나, 강연 중 갑작스럽게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곤란했던 장면과 같이 ‘지금 생각해보면’이라고 할 만한 장면들 말이다. 그렇게 영화는 주인공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린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질병의 순간순간들을 다시 살아내는 느낌까지 받았다. 앨리스가 가족들에게 질병을 털어놓는 순간, 가족들의 표정을 확인하던 순간,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이 내 질병에 대해 부담스러워하던 순간, 질병 때문에 일자리를 잃던 순간, 담담하게 자살을 설계하는 순간, 자살에 실패하던 순간, 순간들. 힘겨웠다.

 

아픈 몸의 당사자로서 연설할 때의 앨리스를 보면서는 〈다른몸들〉의 아픈 몸들의 모임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처음 나의 질병 경험에 대해 털어놓던 순간을 떠올렸다.(관련 기사: 삶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이가 없도록 -<질병과 함께 춤을>④ 질병과 성폭력 그 자연스러운 연결고리 https://ildaro.com/8641) 그때부터였다. 내가 용기를 낸 것은, 나의 질병을 수용하게 된 것은, 그리고 마침내 나의 몸을 이해하게 된 것은.

 

질병을 앓는 시간들은 많은 것을 상실하는 과정이다. 앨리스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화장실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운동화 묶는 법을 잃어버리고, 운동화를 둘러싼 기억들을 잃어버린다. 그의 시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현재의 앨리스를 ‘앨리스가 원치 않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앨리스의 존재는 그렇게 과거형이 되어버린다.

 

▲ 영화 〈스틸 앨리스〉에서 앨리스(줄리앳 무어)와 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화는 돌봄의 영역도 놓치지 않는다. 아픈 몸들이 미래를 설계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돌봄’ 문제 때문이다. 앨리스의 돌봄을 둘러싸고 가족들은 ‘현실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애쓴다. 가족 구성원의 일상을 유지시키는 데 어려운 조건들을 만드는 앨리스는, 가족 구성원에서 분리되어 돌봄을 자처한 막내딸과 살아간다.

질병을 가진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이 아직은 멀다. 그 방법을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질병 서사가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이 영화는 극적인 장치 없이 관객들에게 가장 극적인 이야기를 건넨다. 일상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는 전달받는 이에게 가장 깊숙이 가닿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지점들이 있다. 앨리스의 계급적 위치가 그렇다. 앨리스는 저명한 언어학 교수이자 학자다. 그가 가진 자원은 풍부하다. 일상 한 토막만 들여다봐도, 그가 가진 다양한 자원들을 확인할 수 있다. 화목한 중산층 가정, 넉넉한 경제적 여건, 높은 사회적 지위 등. 그래서 그에겐 선택지가 넓고 다양하다. 대개 이러한 설정의 목적은 질병으로 인한 상실의 낙차를 키워 서사를 극적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각자의 지옥이 존재할 뿐 누군가의 지옥이 더 끔찍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설정은 그 서술방식과 괴리가 있다.

 

이런 서사들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문대 교수도 아니고, 중산층 가정 환경에 놓여있지도 못하며, 좋은 주치의를 만날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질병을 가진 이들이 가진 고통과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메시지가 부재한 탓이다.

그래서 이 현실적인 이야기 끝에 등장하는 ‘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당혹스럽지만,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돌봄을 사랑이라는 감정에 기대 여성에게 전가해 온 구조를 반복하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앨리스의 돌봄을 전담하는 이도 앨리스의 막내딸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전형적이면서도 체제 순응적이다.

 

▲ 영화 〈스틸 앨리스〉에서 앨리스(줄리앳 무어)와 남편 존(알렉 볼드윈)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계지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내내 울 것 같은 마음으로 봤다. 영화 속에서 나를, 혹은 알츠하이머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겹쳐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Steal Alice’(앨리스를 빼앗다)로 읽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Still Alice’(여전히 앨리스)였다. 나는 영문 제목을 확인하고서 많이 울었다. 질병이 찾아와도 나는 나다, 과거형이 아닌 생생한 현재형의.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과거형이었다. 질병 이후의 나를 인정하지 못했다. 나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질병 이전의 나의 일상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변할 뿐이다.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이가 그것은, 그것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자 소개] 이혜정. 성폭력피해생존자이자 전업활동가. 2011년 류머티즘 진단을 받았다. 때때로 문고리를 돌리지 못할 정도로 통증에 시달리곤 하지만,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 질병인 탓에 아프다는 사실을 의심받곤 했다. 질병을 삶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재는 느려진 삶의 속도에 맞게 일상을 꾸려가고 있다. 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프다고 말하기를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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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4/07/24 [13:56] 수정 | 삭제
  • 나를 잃는 게 아니라는 말. 와닿았었거든요. 질병도 노화도..
  • 동병상련 2024/07/23 [16:41] 수정 | 삭제
  • 질병인의 목소리를 먼저 내주는 분들이 있어서 참 고맙습니다.
  • 핸드 2024/07/20 [11:14] 수정 | 삭제
  • 언어학자가 언어를 상실해가는 것으로 극적 설정을 한 거라고 이해했습니다. 다른몸들이 읽는 시리즈는 다른 지점들을 더 생각하게 해주네요. 그리고 줄리안 무어의 팬이 되기에 적절한? 영화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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