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3년 차가 되었습니다. 해마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농사 지혜가 쌓이고, 땅과 작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깊어져 갑니다. 직접 채종해 이어가는 씨앗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얻는 종자가 더해져 기르는 작물의 종류가 다양해집니다. 농사짓기 전에는 가지는 보라색, 팥은 붉은색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다 익은 가지가 하얗기도 하고 연둣빛을 띄기도 하며, 팥은 흰팥, 재팥, 비단팥, 앵두팥, 갈가마귀팥, 개골팥, 검정팥, 이팥, 털팥 등 이름만큼 다양한 빛깔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훨씬 더 다양한 색과 모양, 향과 맛을 가진 작물이 농부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도시의 생활 양식에 회의가 들었을 때
올해 인상 깊게 읽었던 책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에서 저자 아이우통 크레나키는 우리 인류를 하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인간을 단일한 종이라고 생각하며, 삶의 형태와 존재 양식의 다원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온갖 대중매체에 나오는 ‘성공한 삶’은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를 비롯한 값비싼 소유물로 증명됩니다. 돈이 성공을 정의합니다. 타 존재를 타자화하더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각자의 삶에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라는 메시지가 도처에서 들립니다.
평생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는 언젠가부터 대도시에서의 생활 양식이 지극히 인간중심적이고, 자본중심적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스팔트로 뒤덮인 땅, 산맥처럼 이어진 마천루,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를 부추기는 지금의 체제에서 뭇 생명이 공생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학업을 마친 후 임금노동자로서 일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라면, 임금노동이 아닌 뭇 생명과 공생하며 절기의 흐름에 맞추어 살면서 소비하는 삶의 굴레에서 멀어지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자급농사를 짓는 농부로 살아가기 위해 귀농하였습니다.
귀농을 할 때 가장 고민되는 것은 ‘어디로’일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어디로 귀농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나 홀로 살러 가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큰 일입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마중물이 필요했습니다. 이곳저곳 귀농처를 찾던 중, 마침 전국귀농운동본부 홈페이지에서 항꾸네 협동조합의 청년자자공 참여자 모집공고를 보았습니다. ‘자자공’은 자연, 자립, 공유의 줄임말로 1년 동안 시골살이를 하며 자급농사와 자립기술을 배우는 귀농정착지원 과정입니다.
다음은 모집 공고의 일부입니다. “이런 ‘소비경제’와 ‘자본주의 성장’만을 지향하는 사회는 불행히도 많은 차별과 불평등, 환경 훼손, 기후위기 등을 낳았습니다. 현재 사회 구조와 흐름에 대해 의문을 갖고 ‘좋은 삶’에 대하여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 ‘청년 자자공’ 과정을 마치고 이곳 마을에서 농사짓고 살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자급하는 삶, 다른 존재들과 공생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저희와 함께 할 청년자자공 4기를 기다립니다.”
제가 찾고자 하던 삶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어 깊이 공감하며 청년자자공에 지원했고, 전남 곡성으로 삶터를 옮겼습니다.
자자공(자연, 자립, 공유) 과정을 마친 후에는 그동안 머무른 셰어하우스 ‘꿈엔들’(청년 자자공 과정 동안 청년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항꾸네 협동조합원들이 모금과 지원을 통해 손수 지은 셰어하우스) 인근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을 꼽자면, 비공식 경제 부문이 공식 경제 부문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끈끈하면서도 느슨한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성은 돈으로 해결되는 것을 대신하며 든든한 울타리망이 되어줍니다. 우리는 벼농사두레로 모이고, 시시때때로 모여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투쟁도 하고, 밥상과 술상에 둘러앉아 삶을 나눕니다.
농생태적 가치를 지향하며 서로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공유 공간, 공유 차량, 공유 공구, 공유 농기구 등을 함께 사용합니다. 자원을 사유화하고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셈법과 다른 커먼즈(commons, 공동체가 공유하는 자원)는 소유하지 않더라도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항꾸네협동조합 식구들뿐만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과의 관계도 저의 삶을 단단하게 해줍니다. 김장을 하시면 꼭 오셔서 김치를 주고 가시고, 어느 날은 고추를 수확했다고 풋고추를 주고 가시는 등 일상적인 나눔을 해주십니다. 저를 비롯한 마을의 귀농 청년들은 어르신의 휴대폰, 세탁기, 냉장고가 고장 났을 때 도움을 드리곤 합니다.
사실 전세계적인 산업화, 도시화, 자본주의화로 인해 토지가 수탈되고 공동체가 파괴되기 이전에는 경제지표가 담지 못하는 비경제적 부문이 넘쳐났습니다. 우리가 흔히 국가 성장의 지표라고 보는 GDP는 현재에 비하면 현저히 낮았겠지만 말입니다.
‘기후위기’라는 단어는 이제 도처에서 들립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람들은, 국가는, 정치는 기후위기를 진정한 위기로 여기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현 체제와 정치권은 탄소 중립, RE100(재생에너지 전기 100%)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았지만, 타 존재를 축출함으로써 풍요를 보장하는 제국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전혀 반성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을 가장 최우선으로 삼는 현 체제를 공고히 하려고 합니다. 기후위기에 대한 진정한 대응은 ‘탈성장’, 즉, 기존의 질서와 삶의 방식을 전환하는 것일텐데 말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삶의 방식의 다원성’을 회복해나가는 것은 지난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들려져야 되고, 더 많은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보여져야 할 것입니다.
귀농에 관심을 갖기 전에는 내 삶과 농(農)이 무관하다고 여겼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을 만날 일도 전무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선생님에게서 ‘그렇게나 많던 농민이 사라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제노사이드(학살)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과 함께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었습니다. 우리 삶을 재생산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대지에 발을 딛는 삶, 토지에 씨앗을 뿌리는 삶입니다. 스스로 삶을 재생산해낼 수 있는 수단을 빼앗는 것은 사람의 주체성에 대한 침해이며, 권력과 자본에 쉽게 굴종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입니다.
미미하고 느려 보이지만 ‘청년 자자공’ 과정과 ‘소농학교’ 교육을 통해 사라져가는 바로 그 ‘농민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매년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청년 자자공을 수료한 이들 증 10명은 항꾸네협동조합이 위치한 곡성군 겸면에서 자급하는 소농으로서의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이 마을에 방문합니다. 그럼 그 방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 그 사람의 지인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느리고 미미해 보일지라도, 분명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야기가 확장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책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의 저자가 독자에게 묻는 ‘우리는 정말로 하나의 인류인가?’에서 어떤 단어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질문은 두 가지가 됩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의 인류인가?(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다양한 방식을 한 가지로 환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는 우리는 정말로 하나의 ‘인류’인가?(인류가 아닌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의존적 네트워크로 봐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답을 찾으면서 스스로에게 되묻게 됩니다. ‘우리’란 도대체 누구일까요?
‘우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누구를 떠올리는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에게 ‘우리’는 바위, 산, 강과 같은 것들을 포함합니다. 기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과 자연의 분절된 관계와 그 관계 위에 형성된 모든 학문, 사고, 정책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지와 대양, 대기, 그 안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뭇 생명을 인간 하위의 존재 혹은 자원으로만 여기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올해 새로운 농지를 두 곳 빌렸습니다. 그 중 하나는 느티나무에 둘러싸인 곳입니다. 이번 봄에서 여름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는 너무나 가물었습니다. 밭 근처에 사용할 수 있는 물과 스프링클러 같은 장치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작물이 시들지 않도록 물을 주려면 품이 많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밭은 한 켠에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밭 둘레에는 나무들이 그간 떨어뜨린 낙엽들이 쌓여 있으며, 적절한 시간에 나무그늘을 만들어 주는 덕분에 다른 곳에 비해 가뭄을 견디기 수월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 저절로 감사함을 느낍니다. 졸졸 흐르는 냇물에게 감사를, 매년 겨울 낙엽을 떨어뜨려주며 한낮더위에 그림자를 드리워주는 나무들에게 감사를.
또한,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들풀의 생애를 유심히 보게 됩니다. 풀들이 어떤 꽃을 피우는지 전에는 관심을 안 가졌는데, 올해는 특별히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연과 더불어 사는 해가 거듭될수록 보이는 것이 다르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달라지며, ‘우리’라는 단어에 제가 심고 가꾸는 작물, 밭에서 뛰어다니는 개구리, 꽃들에 푹 들어가서 수정을 도와주는 벌, 가끔 밭에 내가 심어놓은 작물을 먹는 고라니와 멧돼지가 포함되며 확장됩니다..
그렇기에 기후위기 시대, 그 영향의 가장 최전선에 놓여 있는 농사 짓는 이로서 ‘농생태’를 말하게 됩니다. (농생태 관련 기사: 기후재난…대안 농업 제시한 ‘농생태학’의 선구자들 https://ildaro.com/9963)
[필자 소개] 연어. 생태적이고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다 전남 곡성으로 귀농한 3년차 농부, 주된 일상은 밭살림이며, 지금의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선 농생태적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항꾸네 협동조합 일원으로 느슨한 공동체 살이를 하며 이웃들과 지역에서 틈을 내는 활동을 포함하여 저항과 돌봄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기후위기 체감하는 여성 농부들의 메시지’ 기록은 아름다운재단(beautifulfund.org) 지원으로 제작하였습니다.
이 기사 좋아요 22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녹색정치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