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 대안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농촌 현장에 찾아가 기후위기 여파를 몸소 체감하니, 그 무게가 물 밀듯 밀려들었다. 지금껏 편리함을 위해 내가 함께 쌓아 올린 위기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무해한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옷 사지 않기’, ‘플라스틱 제품 소비 줄이기’와 같이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기준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
조금씩 줄어가는 쓰레기에 만족하며 지냈지만, 장을 보고 나면 쏟아지는 쓰레기들은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들쭉날쭉한 퇴근 시간과 잦은 야근은 채소들을 냉장고에서 고이 썩게 만들었다. 아무리 소비를 줄여도 일상적인 식생활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줄일 수는 없는 걸까. 그 누구에게나 아름다울 수 있는 무해한 삶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도시 내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만드는 ‘최소의최선’ 열다
전북 진안에서 만난 은순 농부님의 밭은 그 삶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학교에서 2주간 진안으로 이동 학습을 떠났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자신 그리고 지구 공동체를 위해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10여년 동안 자연농으로 농사를 지어왔다는 은순 농부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자연농’은 나의 지표가 되었고, 마음으로만 그리던 무해한 삶을 현실로 꿈꾸게 했다. ‘무경운, 무제초, 무투입’을 원칙으로 농사를 짓는 자연농은 이전까지의 농에 대한 내 생각을 휘저어 놓았다.
제초로 인해 들풀이 스러지고, 잦은 화학 약품과 비료 투입으로 곤충과 벌레들이 사라지는 땅에서 홀로 남은 작물만이 알 수 없는 약을 먹으며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산업농이 희생시켜온 흙과 미생물의 존재를 알게 되니, 나의 식을 위해 단순히 쓰레기만이 아니라 이 땅의 여러 존재들의 희생도 함께 쌓여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은순 농부님 밭의 흙을 따라 걸으며, 그가 일군 밭과 정원에서는 다양한 생명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감각할 수 있었다. 자신과 여러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고민의 씨앗이 밭과 정원 곳곳에 심겨져 있었다.
그 씨앗은 나의 마음에도 내려 앉았고 2022년 여름, 마음 한가운데서 그 씨앗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도 무해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을까?’라는 물음을 갖고,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그 씨앗에 물을 주고 햇빛을 쪼였다. 머잖아 망울을 틔우려는 꽃이, 더 이상 타 존재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최소의최선〉이라는 이름으로 도시 내 제철농산물 무포장 소분 가게를 피워내고자 결심했다.
깊은 단절이 만들어 낸 식탁의 위기
시작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욕심이 하나 둘씩 덧대어져 지금의 위기를 만들었다. 현재의 농산물 생산, 소비, 유통 과정 또한 누군가에게 편의가 되고자 시작된 일이었지만, 결국 각 과정 사이마다 깊은 골짜기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골짜기는 생산자와 유통자, 소비자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들 내부에서도 깊은 단절을 불러일으켰다.
산업농은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이 아닌 땅에 대한 착취로써 농산물을 생산하고, 과잉으로 소비하는 시대에 발맞춰 대량 생산에만 초점을 맞춘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농업은 외주화되고, 그 속에서 생산자는 더이상 연결된 존재가 아니라 단절된 존재로서 고독하게 생산을 지속한다. 생산자의 철학과 마음이 생산물과 함께 전달되지 못한 채, 생산자는 얼굴 없이 어디까지나 수단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연결을 통해서만 이뤄낼 수 있는 무해한 식생활
‘단절’에서 비롯된 기후와 농업, 식량 문제를 ‘연결’을 통해 해결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최소의최선〉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최소의최선은 도시 한복판에서 자연과 닿아있는 농산물로 쓰레기 배출 없이 ‘식’을 행하는, 한마디로 지속 가능한 식문화를 피워내는 가게를 그린다.
농산물을 매개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다양한 연대 방식을 상상하고, 실험해보며,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살리는 식탁 만들기’를 목표로 둔 대안적인 유통망을 만들고자 한다. 적게 소비하고 적게 먹는 삶. 자연과 가까운 농산물을 최소로 소비하는 것이 도시 내에서 최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최소의최선 같은 유통망이 사라져도, 식탁에서 모두가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그 첫걸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감각하지 못하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365일 내내 마트 매대에 깔끔하게 세척되고 포장된 채 진열되어 있는 농산물들은, 소비자가 농산물이 자라온 자연과 농부의 손길을 까맣게 잊게 만들었다. 상품성을 위해 흠 하나 없는 모양으로 선별되어 사고 팔리는 농산물의 모습에서는 어느덧 ‘자연스러움’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지극히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은 농산물을 골라내는 과정은 많은 농산물들이 버려지게 만들고 생태계의 다양성을 폄하시키고 있다. 그 결과 소비자는 제철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많은 존재의 희생으로 일궈진 음식을 식탁에 올리게 되었다.
상품성만을 중시하는 문제를 해소하고자,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다리로서 직거래와 다름없는 농산물 판매를 시도해보았다. 이윤을 추구하는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은 최소화하고, 농산물의 이야기와 이를 키워내는 생산자의 노고 그리고 신념을 전면에 내세워 소개했다. 소비자가 자신이 먹을 농산물의 뿌리를 알고, 긴 시간 농산물을 보살핀 손의 온기를 감각할 수 있도록 북돋았다. 제주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슬기, 우람 농부님과 여러 차례 회의를 하며 제철 농산물과 농사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농산물의 자연스러운 유통 방식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눴다.
팝업에서 농산물 판매와 함께 농부님 소개와 시식을 진행했다. 기존에 접하던 농산물과 달리, 땅의 맛과 향을 힘껏 머금은 농산물의 풍미에 선뜻 구매를 자처하는 소비자, 농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후 농부와의 직거래를 희망하는 소비자, 자신이 실천 중인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시민들을 만났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팝업의 취지에 공감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새로운 방식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무해한 먹거리를 중심으로 연결이 확장되는 감각을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연결고리, 농부랑 ‘밥팔’ 맺을래요?
계절마다 각기 다른 농산물을 품는 밭과,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농부님들과 더 긴밀하게 연결되고자 제주도로 며칠 간의 여정을 떠났다. 매일의 날씨를 온몸으로 감각하고, 그에 따라 하루의 삶의 모습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농부님과 얘기를 나누며, 새삼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소비자의 시선 너머,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농부들이 겪는 고충은 당장 내일의 삶을 흔드는 위기이면서 도심에서 무뎌진 감각으로 일상을 보내는 모두에게 닥칠 문제이기도 했다. 효율을 우선시하며 변화한 농업 시스템이 생태계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여전히 생계를 위해 그에 맞춰 농산물을 공급할 수밖에 없는 농부들의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현재의 생산과 유통 과정, 그리고 소비 시장에 문제의식을 갖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당장 귀농 귀촌할 순 없지만, 곁에 농부 친구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고 들어서 참여하게 되었어요.” 몇 주 전 갈무리된 ‘농부와 밥-pal 맺기’ 프로그램 참가자의 말이다.
그러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면으로 만나는 일에는 물리적 거리, 시간적 한계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최소의최선은 그 거리를 좁혀보고자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연결고리 만들기’, ‘먹거리를 통해 다양한 존재와 연대하기’를 목표로 ‘농부와 밥-pal 맺기’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서로의 얼굴조차 모르지만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았던 애틋한 펜팔(pen-pal) 시대를 추억하며, 먹거리와 편지를 매개로 농부와의 거리를 좁히고자 했다.
그런 포부를 담아 시작한 프로그램은 총 4회차로 이루어졌으며 그 중 1, 2회차는 강화도 연두농장의 윤현경 농부님과 3, 4회차는 제주생명밥상의 김슬기 농부님과 함께했다. 농부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현실 저 멀리 놓인 세계가 아니었다. 기후위기의 세상에서 대안을 외치는 이들에게,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또 다른 희망을 보여주는 뚜렷한 지표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를 착취하고 희생시키는 관계로부터 벗어나 모두와의 연결을 도모하고자 애쓰고 있는 이들이다.
“돈이 많으면 더 좋겠지만, 없으면 없는 채로. 대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아봤어요. 시골살이의 좋은 점은 맛있는 제철 먹을거리, 이웃과의 친밀한 교류, 자연과 더 가까운 일상이에요. 돈은 좀 못 벌더라도 더 잘 누리고 잘 노는 행복한 삶을 택했어요.”(윤현경 농부)
참가자들의 기대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입을 모은 것은 ‘농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농부의 이야기를 통해 농부로 살아내는 매일과, 농산물을 길러낸 마음을 전해 들었다. 제철농산물을 다듬어 ‘최소 레시피’로 비건 요리를 만들었다. ‘최소 레시피’는 최소의 재료와 제철 농산물을 기반으로, 나 자신 또는 공동체를 위해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레시피이자 비건 레시피이다. 요리를 만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멋진 식탁을 완성했다. 처음 만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도, 매번 함께 식재료를 다듬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다정한 부엌의 풍경이 만들어졌다.
1회차 때는 어색하게 눈웃음을 나누던 사이였지만, 회차가 무르익을수록 익숙한 얼굴에 반가워하고, 없으면 아쉬워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식탁 위로 싹튼 다정한 연결은, ‘식구(食口,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풍성한 식사 후 밥상을 치우고서, ‘먹거리를 매개로 한 연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농부에게 편지 쓰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한 참가자가 나누어준 이야기다.
”우리가 먹는 농산물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먹으니 그 기쁨이 배가 되었어요. 생명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식사는 그 수많은 마음을 나누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참가자 A)
프로그램의 마지막 활동으로 강화도 연두농장 현경 농부님의 텃밭을 방문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풍경을 실제로 마주하니 참가자들도 감회가 새로운 듯 했다. 밭을 둘러보며 곳곳마다 걸음을 멈추고 농산물을 직접 따 먹어보았다. 평소에는 생으로 맛볼 생각조차 못한 농산물의 고유한 맛과 향을 낯설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밭을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었던 시간을 지나 밭 한가운데서 거꾸로 선 채 옹골차게 여문 오크라와, 햇빛 아래 윤 나는 고추와 가지, 파프리카, 그리고 스치기만 해도 향이 새어나오는 잎채소들을 수확했다. 여전히 숨 쉬는 듯한 농산물들을 슥슥 썰고 손 가는 대로 만든 소스를 버무리니, 금세 여름 향을 잔뜩 머금은 샐러드가 완성됐다.
최소가 최선이 되는 삶을 바라며
최소의최선은 지속가능한 식(食)을 통해 나의 몸과 마음을 살피며 스스로 돌봄을 시작하는 것을 우선으로, 그러한 개인들의 중심에서 연결의 감각을 일깨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서로 이어보고자 한다. 앞으로도 최소의 농법과 포장과 식사가 모두를 풍요롭게 한다고 믿으며 식문화를 고민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모인 최소의 점들이 만들어낸 선(善)이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지구를 연결하는 선(line)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온 마음으로 바란다. 훗날 모두가 먹거리의 주체로서 지속가능한 식을 삶에서 실현하고, ‘나’를 보살피는 감각을 넘어 ‘우리’를 돌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필자 소개] 최소의최선(루나, 무민, 썸머) @small.good.veg 최소의 농법, 포장, 식사가 지구 공동체에 최선이 될 것이라 믿으며 그를 위한 다양한 식문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구 공동체에 무해한 농법을 실현하는 여성 소농을 소개하고, 최소의 포장과 식사를 지향한다. 기후위기의 원인을 연결의 ‘단절’로 바라보며 멀어진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둔다. 씨앗에서 출발한 작물들이 식탁에 오를 때까지,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식탁을 만들고자 한다.
-‘기후위기 체감하는 여성 농부들의 메시지’ 기록은 아름다운재단(beautifulfund.org) 지원으로 제작하였습니다.
이 기사 좋아요 13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많이 본 기사
녹색정치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