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만 피하고 싶은 것.” (26세, 김주현)
“사람 잡는 괴물.” (33세, 이유지현) “죄스러움, 부담.” (30세, 김성아) “답답하고 억압적이다.” (27세, 백선희) “며느리가 세빠지게 고생하는 그런 이미지.” (28세, 이수미) ‘효’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한 여성들의 답변이다. 흔히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한다. ‘효의 나라’ 한국. 세대가 변했지만 변함없이 한국을 대표하는 덕목은 ‘효’라고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효’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혹자는 혀를 차며 버릇없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라며 개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에 대한 생각은 세대가 아닌 성별에 따른 차이를 보인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효’를 의무나 책임으로 부담스럽게 인식하고 있긴 하지만 “당연히 해야 하는 것”(30세, 안제헌), “본인이 건강히 잘 사는 것” (32세, 백경오), “대를 잇는 것” (28세, 박진만) 등 여성과는 달리 긍정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가치로 설명하고 있다. 여성 욕망의 거세 대학교 시절 부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현재는 빈민활동을 하고 있는 ㄱ씨(28세, 여)는 아직도 부모님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숨기고 있다. 사범대를 나온 ㄱ씨에게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임용고시를 본 후 교사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렇지만 ㄱ씨는 대학시절의 경험을 이어 사회 활동가의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직도 부모님께 들킬까 전전긍긍이다. ㄱ씨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더 이상 싸우기도 싫고 걱정 끼치기 도 싫어 숨기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걱정이 더 많으신 것 같다. 좋은 곳에 시집가 안정적으로 생활하기를 원하시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삶에 더 이상 맞춰 살기 힘들다”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한국 사회는 유독 자신 개인의 행복이나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각박하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기 이전에 부모가 원하는 것에 길들여진다. 성취의 욕구가 자신보다는 부모에 맞춰져 있다. 자신의 특기와 기질보다는 부모가 원하는 삶과 선택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흔히 “부모를 기쁘기 위해서”라는 효자의 말은 어릴 적부터 모범답안처럼 우리 귓가에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행복을 모르고 있다는 고백이 된다. 자기 행복보다는 부모의 기대에 맞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한국 사회 특유의 ‘효’ 문화는 실로 다양해지고 있는 여성들의 욕구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올해 29살인 ㅇ씨는 독립해서 혼자 살고 싶은 욕구가 가득하다. 직장이 광화문이고 집이 분당이라 출퇴근이 힘들다는 물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독립’에의 열망이 굴뚝 같다. 그러나 완고한 부모님은 한사코 반대 입장이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거든요. 그런데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절대 독립해 살수가 없는 거에요. 부모님은 어림도 없다고 하죠.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도 불효인데 결혼도 안 한 딸이 집 나가서 살겠다니까 이해를 못하세요. 나는 자격증도 따고 유학도 생각하고 그러는데 부모님은 그런 거 다 여자한테는 쓸데 없다고 하시고. 너무 답답하죠.” 혹자는 이제 여성의 자아나 독립, 욕망에 대한 실현이 가능한 개방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님 밑에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가는 것이 ‘효’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강요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불효’인 경우가 여전히 많은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욕구와 부모님들이 원하는 삶 사이에서 ‘효’라는 커다란 책임 아래 갈등한다. ㄱ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엄마를 정말 사랑해요. 힘들게 사셨고 저한테 많은 것을 걸고 주셨는데 속상하게 해드리기 싫죠. 그래도 제가 원하는 삶이 있는데 그걸 포기하긴 싫은 거에요. 가끔은 정말 ‘뭐 어렵다고 못해드리나, 그냥 다 관두고 안정적인 직장 잡고 결혼해버릴까’ 할 때도 있어요. 그게 효도라면 그거 뭐 어렵나 하다가도 정말 그렇게는 못하겠고 설득은 안되고 정말 힘들죠.” 부모님이 원하는 ‘효’란 그저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이지만 그 안에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가치관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즉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삶에 순응하는 것이 ‘효’라는 얘기다. ‘효’는 결혼을 원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효도냐”는 질문에 여성들은 “빨리 시집가는 것” (김민정, 29세), “미혼모가 안 되거나 카드 깡으로 부모 등 휘게 하거나 하지 않는 것, 평범하게 사는 것”(이혜영, 26세) , “적당한 나이에 시집 가 적당한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것,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김주현, 26세), “결혼 자금 마련해 빨리 결혼하는 것”(이선이, 29세) 등으로 대답했다. 특징적인 것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평범한 삶’의 절차에 있어 ‘결혼’이란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라는 점이다.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효’란 ‘결혼’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20대 후반의 미혼 여성들은 특히 결혼에 대한 억압을 많이 표출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에게도 자신의 일을 선택하고 성공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고 있지만 여전히 결혼이란 ‘효’의 가장 으뜸 덕목인 것이다. 올해 30살인 ㅇ씨는 결혼하라는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왔다. “이 나이에 가출이라니 우습죠. 명절 때만 되면 모든 친척들이 치워버리라고 하고. 부모님들도 내 딸이 뭐가 부족한가 싶으니까 자꾸 선 보라고 강요하고, 사사건건 개입하고 심지어는 일도 관두라는 거에요. 아무하고나 짝 지워져 결혼할 수는 없었어요.” 가부장제 사회는 결혼제도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공고화 된다. 이런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 안 하겠다는 발칙한 여성들을 ‘효’라는 당위로 제재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어보인다. ‘그’의 가정을 지켜라 지난해 ‘노모를 죽인 비정한 며느리’ 등 선정적인 타이틀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어머니를 굶겨 숨지게 한 혐의로 아들과 며느리가 재판대에 올랐다. 당시 경찰은 아들과 며느리를 모두 존속유기치사 혐의로 입건한 뒤 아들을 구속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검찰은 며느리를 구속하라고 지휘했다. 당시 수사를 지휘한 검사는 “아들은 낮에 일하러 나가지만 며느리는 가사를 돌보는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시어머니를 돌봐야 할 책임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사건을 송치 받은 검사도 며느리는 구속, 아들은 불구속 상태로 기소한 뒤 아들에게 징역 5년, 며느리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이 사건 이후 여론은 대대적으로 여론은 ‘며느리 죽이기’에 집중됐다. 노모를 굶겨 죽인 패륜적인 범죄자 며느리, 그러나 아무도 아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노모가 굶어 죽기까지 아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단지 카메라에 비춰진 것은 고개 숙인 며느리일 뿐이었다. 모든 책임은 그 여성에게만 있다는 듯이. 이후 각 채널에서는 가정의 달 특집으로 뼈빠지게 고생하는 여성들 시리즈를 경쟁하듯 기획했다. 8남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치매에 걸린 시조모, 반신 불구가 된 시아버지, 치매와 중풍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힘겹게 살아온 한 여성의 삶은 훈훈한 미담처럼 사회에 퍼져 나갔다. 50대 후반의 ㅇ씨는 정작 자신이 손주까지 본 할머니이면서도 시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시기 때문에 며느리 역할 하느라 365일 집안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외출 한번 제대로 못하고, 자신의 꿈이 뭔지 묻지도 못한 채 젊은 시절 다 보낸 ㅇ씨는 지금도 하루 세끼 시부모임 식사 챙기고 돌보느라 시간이 다 간다. 어떤 자유도 없다. 집에 묶여 여행 한번 편히 갈수 없는 그에게 노년의 여유란 너무나 먼 이야기다. 기혼여성에게 ‘효’라는 것은 더욱 큰 부담으로 다가선다. 핏줄관계, 호적관계로 얽힌 한국의 가족관계 안에서 결혼은 여자들한테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 “결혼하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여성들은 결혼 한 뒤에는 남편의 가족이 돼 남편의 부모를 최우선으로 모시면서 평생 남편의 가정을 지켜나가야 하는 의무를 떠안게 된다. 많은 여성들이 효도하겠다고 막상 결혼하고 나서는 정작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한테는 얼굴 한번 비추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결혼한지 30년이 넘은 ㅇ씨(여, 55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어머니 보러 제때 내려간 적이 없어요. 신혼 초에 두어 번 갔나. 시부모님 모시고 사는데요. 남편은 우리 아버지 제사 때라도 내가 시골 내려가는 걸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거에요. 지네 부모 밥 줘야지 어딜 가냐는 거지. 정말 화가 치밀었어요. 지금은 우리 엄마한테 효도하고 싶어도 이 세상에 없으니.” 결혼 4년차인 ㅅ(34세)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직장 여성이 많아지는 요즘 갈등은 더 심해진다. “여편네 잘못 만나 불효자 됐다 그러는 거에요. 야근하고 새벽에 들어와서도 아침은 차려야 되는데 반찬이 부실하거나 하면 난리가 나요. 나도 일하는데 자기 부모 거하게 밥상 안 차린다고 나만 천하의 나쁜 년 되는 거에요. 아기 맡기는 것도 괜히 눈치가 보이고. 그러니 계속 일할 수 있겠어요? ” 남성들 역시 한국 사회에서 아들에게 지워지는 역할에 대한 억압, 재정적인 책임과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다. 그러나 “남자이기 때문에 효에 대한 부담은 느끼지 않는다” (정봉재, 28세)는 고백처럼 남성들은 아들이 짊어진 ‘효’의 개념에서 부모님 뒷바라지 하는 실제적인 노동은 아내의 몫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 여자들 치고 효에 대해 할말 없는 사람이 있겠냐”는 이유지현 씨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람 잡아먹는 이유 중 하나도 우리 사회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목놓아 외치는 ‘효’를 온통 여자 쪽의 일거리로만 잡아 놓는 것이 아닌가. 남자 부모들한테 효도하라고 결혼하라는 것 아닌가”라고 강변한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해 이루는 ‘가정’은 여성들의 무보수 노동을 전제로 운영되는 공간이다. 가정 안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노동은 여성이 떠안고 책임 역시 여성의 몫이다. 우리 사회는 ‘효’라는 거대한 이름으로 여성에게 책임을 손쉽게 전가하고 있다. 가정의 달,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뒤에 묶여있는 여성들의 삶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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