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IMF 시절’에 떠오른 화두는 ‘아버지 기 살리기’였다. 정리해고, 명예퇴직 등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이 땅의 아버지들’에 대한 격려가 요구되던 당시였다. 회사에서도 쫓겨나고, 집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아버지들에 대한 연민을 담은 메시지가 온갖 매체와 문화 영역에도 스며들었다. 반면 경제불황으로 인해 더 빨리, 더 많이 해고되는 기혼여성들과 급속도로 비정규직화되는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난 연말, 연초에 TV와 신문을 끊임없이 장식하던 것도 ‘어려운 경제 상황'이다. 청년실업, 구직 포기자에 대한 보도가 계속됐다. 이런 와중에 새해가 되자 사람들은 ‘희망’을 말하고 싶어했다. 각종 특집 프로그램에서도 ‘이웃들과 희망을 나누는’ 내용을 만들어 내보냈다. 기업들도 발맞춰 그런 메시지를 담은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는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데 주력한다. 요즘도 TV를 보다 보면, 아버지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CF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요즘 한창 자주 등장하고 있는 모 보험회사의 광고의 모토는 ‘브라보 유어 라이프’다. 이 광고는 시리즈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새해가 되어 새롭게 선보인 아이템이 바로 ‘아버지’다.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편집하여 만든 이 CF는 “아버지 사랑합니다. OOO이 당신을 응원합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마무리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는 모 은행의 광고 역시 새해가 되면서 비슷한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바뀌었다. 편안한 음악이 깔리면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아빠가 다니는 회사가 잘 되어야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됩니다”라는 음성이 나온다. 이 차분한 음성을 듣다 보면 마치 ‘아빠’만 회사에 다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식의 광고에 깔려있는 건 ‘아버지’에게 힘을 주는 것이 곧 ‘가정’에 힘을 주는 것이며, 결국 ‘나라’에 힘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위에 언급한 보험회사 CF 안내글을 봐도 잘 드러난다. “새로 선보인 브라보 유어 라이프 캠페인 광고 ‘아버지’편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누구나의 마음 속에서 응원하고 싶은 존재인 우리들의 '아버지'를 응원하는 내용으로, 고객에 대한 우리 회사의 응원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반면 CF 속에서 유독 ‘어머니’의 역할이 강조되는 건 양육, 교육과 관련한 분야다. 분유 광고, 학습지 광고에는 “우리 아이 잘 키우자”고 말하는 엄마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모 학습지 광고에서는 아예 아빠가 나와서 “엄마는 가장 좋은 선생님입니다”라고 말한다. 아이 교육은 부모가 아닌 ‘엄마’의 몫이라는 것처럼. 이 회사는 올해의 자사 광고에 대해 “가르침보다 더 큰 사랑과 관심으로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지혜로운 엄마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냈다”고 설명한다. 21세기가 되었지만 TV광고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은 아직도 확실히 구분된다. 그것은 사회에서, 노동시장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다르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광고가 이를 더욱 강화해간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TV를 보는 많은 아이들은 이런 광고를 접하면서 ‘아빠는 회사에 가고, 엄마는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 ‘경제와 기업은 남자와 관계된 것이다’, ‘아빠의 일이 가정과 국가의 근간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들이 TV광고를 일상적으로 흡수하고, 쉽게 기억하기 때문에 기업들은 CF에 승부를 거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고의 영향력과 파급력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터, 그것이 성별분업을 견고히 함과 동시에 차별을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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