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순이’에서 노동자투쟁의 주체로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발간

문이정민 | 기사입력 2004/02/29 [22:06]

‘공순이’에서 노동자투쟁의 주체로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발간

문이정민 | 입력 : 2004/02/29 [22:06]
1970년대, 그녀들은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동생이나 오빠 학비를 벌기 위해 그들은 공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악착같이 일했다. 그들은 가난을 이기겠다고 한눈 한번 안 팔고 일만 하는, 그야말로 칭찬 받는 모범생 ‘공순이’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똥물을 뒤집어쓰고 쇠파이프, 주먹질, 발길질에 이를 악물면서 동지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결국 열악한 한국의 노동운동사를 바꾸는 ‘여성노동자’가 됐다.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해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아름다운 사람들, 1만 5천원)는 암울한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혀야 했던 다섯 명의 여성노동자들의 생생한 경험을 역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총각(전 동일방직 노동위원장), 최순영(전 YH무역 노조위원장), 박순희(전 원풍모방 노조부위원장), 이철순(전 한국여성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정향자(전 전남제사 노조위원장). 이 다섯 명의 여성들이 들려주는 생생한 증언은 어쩌면 1970년대 굵직한 노동운동사에서 그야말로 ‘숨겨져’ 온 스토리였는지도 모른다. 어용노동조합을 민주노동조합으로 바꿔놓는 역사의 현장에 ‘그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불행히도,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을 통해 동일방직 똥물사건, 신민당사 점거사건, 원풍모방 등 치열하게 얼룩진 1970년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한가운데에 존재했던 여성노동자들의 모습을 선연하게 볼 수 있다. 순박하기만 했던 그녀들은 고분고분 죽어라 일했지만 찢어지는 가난을 모면할 수 없었고, 그제서야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현실이 너무나 부당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역사의 장으로 뛰어들어가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여성노동자들의 자신들의 권리를 짊어지고 있는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투쟁할 수 밖에 없었다.

“동일방직 민주노동조합을 어떻게든 부수겠다는 사람들은 여성노동자들의 몸에 똥을 뿌리고, 밤새 일을 하고 난 배고픈 그이들 입에 똥을 집어넣었다.” (p34)

“고가 사다리차, 물탱크차, 조명용 소방차, 연막가스탄, 철모, 곤봉….그리고 ‘돌격! 죽여!’라는 소리. 아무도 여성노동자들을 지켜줄 수 없었다. ‘101호 작전’이라 이름 붙은 경찰의 폭력진압이 끝나고 스물 한 살 김경숙은 4층 강당 아래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p107)

순박하기만 했던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나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배우고 깨우쳤지만 또 하나의 화두를 끌어안게 된다. 여성. 그들은 ‘여성노동자’였다. 당시만 해도 여성이 노동조합 집행부를 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짓이었다. 또 결혼을 하면 치열했던 투쟁의 삶도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이었다.

‘여성노동자’로 정체화하다

“다른 공장처럼 동일방직도 지부장을 비롯해 집행부 전원이 남자였다. 어쩌다 선심 쓰듯 부녀부장 자리 하나 여성에게 넘겨 줄 뿐이었다. 노동조합 교육도 시키지 않는 노동조합, 단지 조합비만 가져가는 노동조합, 그들이 노동자 편에 서서 회사와 싸우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 언제까지고 그럴 것 같았지만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금을 내었다.” (P 25)

“여성은 이렇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하지 않으면 나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고 보편적인 여자들하고 똑같이 살수밖에 없고, 내가 치열하게 살았던 삶은 그걸로 남는 것이지 연장은 아니다, 연장하려 하면 여기서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P281)

“76년에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를 만들었어. 그때는 딸이라서 받은 설움 때문에 만나면 노다지 울었어. 왜 그렇게 부수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많아. 우리는 여성들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고자 했지.” (p163)

이 책에 나오는 다섯 인물들은 거창하지 않게, 노동자 투쟁의 선봉에서 어떻게 ‘여성’이라는 자아정체성을 갖게 됐는지 서술하고 있다. 또 ‘여성’으로 모인 이들 사이에 형성된 보이지 않는 응집력이 운동을,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또 다른 여성노동자들의 ‘언니’가 되어 믿음으로 뭉쳤다. 삶의 조건이 너무나 같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믿고 의지하며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운동하면서 내가 희생했다기보다는 옳다고 생각한 그 길로 갔을 뿐이고 오히려 삶의 중요한 가치를 찾았습니다. 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만족을 느끼는 거고 산다는 거 자체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거지 무슨 남을 위해 희생을 합니까. 그런 생각은 건방진 생각 아닌가요. 그러니까 결국은 나중에 가서는 ‘내가 고생했는데 이 정도야 지금’ 하는 거죠. 이런 건 정말 위험한 운동의 자세입니다.” (p127)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정립한 이들의 ‘운동론’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도 이 책의 커다란 감동 중 하나다. 이들이 공장에 들어가 불합리한 현실을 맞닥뜨려 저항하는 과정 속에서 각각의 정체성과 운동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의식의 선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현재의 그들과 만나게 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 ‘공순이’들은 이제 희끗희끗한 흰머리의 중년을 넘어섰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현장에서, 조직에서 운동을 꿋꿋하게 해나가고 있다. 흔히들 ‘이제 여자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됐다’고 하지만 여성노동자에게 세상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것 투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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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력사 2004/04/27 [01:34] 수정 | 삭제
  • 여성들이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묻혀가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런 책이 나와서 정말 좋습니다.

    책이 온날 그날 다 읽어버렸답니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읽어보시면 후회없습니다.
  • 호호 2004/03/03 [13:31] 수정 | 삭제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고 그 시대를 볼수 있는것은.
    언제나 즐겁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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