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상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피해자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강간죄가 실제 보호하고 있는 법익은 가해자인 상대 ‘남성의 성적 결정권’이다. 이러한 모순은 아는 관계에서 발생한 강간사건들을 강간이 아닌,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강간 사건의 대부분이 아는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상대 남성의 성적 결정권에 기준을 둔 법의 모순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형법상 체계의 메커니즘을 살펴보면, 형법상 판단기준인 ‘합리성’의 구현과 작동이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가치중립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하는 형법상 개념인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 여성을 완전한 주체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강간 사건에 있어서 구체적인 개인의 피해를 드러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사실(fact)’ 그 자체보다는 여성의 도덕성이나 품행, 남성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고 평가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성의 주체성 인정하지 않는 '강간죄' 이런 현실 속에서 형법상 강간죄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의 성적 자유권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법원은 구체적인 사건을 다룰 때 (가해) 남성의 관점에서, 피해 여성의 행위를 판단하고 의심하고 평가한다. 피해자의 거부의사가 가해자에 의해 무시돼 강간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통념과 마찬가지로 법원 역시 피해자의 거부의사만으로는 그것이 합의된 성행위인지 강제적인 성행위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합리적인 일반인의 경험칙’에 기초해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불평등한 사회문화적 각본에 따라 피해자의 행위를 평가한다. 불평등한 각본 속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다른 근대적 인권이 가지는 보편적 특성과는 달리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아내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연인 관계의 여자도 상대 남성과의 관계에서 마찬가지다. 더구나 특정한 범주의 여성들(예를 들어 성매매 피해여성들)은 모든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위한 대상이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남성과의 관계에서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할 수 없다. 이는 강간죄가 보호하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피해 여성과 가해 남성간의 관계에 의해 한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별 불평등한 사회에서 성행위를 할 것인가 혹은 어떤 상대와 어떤 방식으로 성행위를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란 여성에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법이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의사만으로는 강간죄 성립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의 강간 당시 행위나 심지어 과거의 행위까지도 문제 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강간죄가 보호하고자 하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여성을 주체로 구성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인권의 일부로서 개인의 자유권을 보호하는 강간죄가 실제 보호하는 것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다. 결국 형법의 강간죄 자체가 여성의 주체성을 부인하고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인가 혹은 강제로 일어난 것인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에서 여성의 관점, 경험, 해석은 배제되고 삭제된다. 법적으로 무혐의 처리된 강간은 여성을 이등시민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피해자의 동의여부, “No”라는 말로 충분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의 판례에서 비롯된 일리노이 주의 새로운 강간법은 이러한 한국의 법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리노이주의 새로운 강간법은 “성관계 혹은 성적 접촉에 대해 동의한 사람이 성관계 혹은 성적 접촉의 과정에서 동의를 철회한 후에도 상대편이 성행위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강간으로 처벌 받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아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관계에 동의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는 강간이다”라는 강간의 실질적 정의를 확인시켜준 것이며, 강간 피해자의 ‘동의여부’는 ‘피해자의 저항’이 아니라 “안 돼”라는 말로도 충분하게 되었다는 것("no" means "no")을 의미한다. 여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빈곤한 언어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현실에서 개별 여성의 목소리들은 존재하고 있다. 일리노이주의 새로운 강간법은 그 목소리의 실제를 인정하고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되찾아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한국의 현행 형법에서 제대로 보장된 바 없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법의 영역에서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는 과거 법의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여성의 경험을 대상화시키고 주변화시켜 온 과정을 드러내고, 기존의 법에서의 ‘합리성’이나 이를 바탕으로 정의되는 권리 개념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법의 합리성 개념에 여성의 관점과 언어를 개입시킴으로써 기존의 불평등했던 지형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고 법이 ‘합리적 판단’의 이름으로 여성 경험을 대상화시키고 주변화시키는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에 대해 문제제기하기 위해서는 결국 다시 다양한 축들이 경합하는 구체적인 경험의 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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