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몇몇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우연히 모유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한 친구는 요즘 모유를 먹이는 직장여성이 많다고 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의아해하는 내게, 직장에서 젖이 불때마다 짜서 특별한 용기에 그것을 담아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그 다음날 젖병에 담아 아이에게 먹인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보관된 모유는 하루 정도는 충분히 신선도가 유지되고, 유축기의 질도 좋아져 젖을 짜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돈도 벌어야 하지만, 모유도 먹여야 하는가 보다.
아기들의 몸에 우유보다 모유가 더 좋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여성들의 여건이 허락한다면 모유을 먹이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친구의 말을 들으며 분명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직장생활도 요구하고, 부지런을 떨어가며 아기들의 몸에 더 좋은 모유까지 먹이는 ‘슈퍼 어머니’까지 요구한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직업여성들이 아기들에게 모유를 먹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은 더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들이 일을 하면서도 아기들에게 젖을 먹일 수 있도록 직장 내에 보육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무관심한 양육정책에 대해 문제삼지 않으면서 무조건 여성들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젖을 먹여야 한다는 논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이 속에서 아이들 몸에 더 좋은 모유를 먹인다는 표면에 드러난 문제보다도 여성들에게 ‘모성적 역할’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보이지 않는 억압을 본다. 더욱이 자신의 희생까지 불사하는 자식들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이라는 ‘모성적 사랑’의 극단적인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성애’를 여성들의 타고난 본성으로 평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자녀들보다 자신의 인생과 행복을 생각하는 어머니들에게는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가 있냐’는 식의 질타가 쏟아지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모성애’라는 감정은 17, 18세기 이후에 생겨난 근대의 소산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이다. 그 전, 서구에서는 고대부터 지속되어온 자녀유기의 역사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아조절의 한 방법으로 신생아들을 살해했고, 그 중 여자 아이들은 더욱 많이 살해되었다. 중세에 와서는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아이들을 버렸다. 그러나 그곳 아이들의 90%이상이 들어와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한다. 더욱이 ‘모성애’라고 불리는 감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17, 18세기조차도 자녀유기의 역사가 결코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가문을 이을 아이를 제외한 여러 자녀들은 유모들에게 맡겨지는 것이 흔한 풍경이었다. 그나마 유모를 집에 두고 아이를 보살피게 한 것은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가능했었고,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멀리 시골에 아이들을 보냈다. 그러나 이렇게 보내어진 아이들의 약 75%가 한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자라서 부모들의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녀유기의 역사는 ‘모성애’라는 의식이 널리 퍼지면서가 아니라, 피임과 낙태 기술이 발달하면서 결국 끝이 났다. 게다가 역사 속에서 늘 모유가 찬양 받았던 것도 아니다. 17, 18세기 서양에서는 친어머니의 젖이 아이를 타락시킨다는 견해가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모유에 대한 당시의 생각은 여성들이 아이들을 직접 키우지 않고 유모에게 맡기는 현실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서구의 예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떻게 아이들이 양육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날 태아감별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 위의 예가 마치 딴 세상 일이라고 외면할 것은 아니리라. 결국, 태아감별로 죽게 되는 여아에게는 조금의 동정심도 없으면서, 태어난 아기들에게 광적으로 베푸는 것이 ‘모성애’라면 그것은 왜곡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어버이날이라고 주변은 다시 ‘어머님의 은혜’를 떠들면서 시끄럽다. 그러나 어버이날을 맞아 우리 어머니들은 좀더 진지하게 자신만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쩜 가장 좋은 어머니란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자녀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보상심리 없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애정을 베푸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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