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꾸는 확고한 꿈

뮤지션 차효선

문이정민 | 기사입력 2003/05/08 [01:59]

천천히 꾸는 확고한 꿈

뮤지션 차효선

문이정민 | 입력 : 2003/05/08 [01:59]
비 오는 날, 밤 10시가 넘어 신촌의 한 술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왠지 어울리는 날씨라고 생각했다. 하늘거리는 긴 파마 머리 탓이었나. 그런데 그녀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고 했다. 햇빛 쨍쨍한 날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둠이 어울릴 것도 같은데 빛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 식이었다. 언뜻 보면 다소 우울한 눈빛과 나른한 표정이 불건전한(?) 습성을 표출할 것도 같은데 지독히도 건전하고 착하다. 그런데 진부하지는 않다.

네 멋대로 해라

90년대 전세계 젊음을 열광시켰던 밴드 ‘너바나(Nirvana)’.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후죽순으로 너바나 카피밴드가 생겨났다. 그 당시 스무 살 언저리에 있던 청춘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커트 코베인의 ‘떡 찐’ 단발머리를 동경했을 것이다. (공연장 앞 쭉 줄 서있는 남성들 대다수가 그 머리를 시도하기도 했다.)
지금은 확 떠버린 ‘크라잉 넛’ 등 많은 밴드들이 홍대 앞 클럽으로 모여들 무렵, 묘한 동질감으로 흥분하던 스무 살 그녀는 홍대 앞 클럽 드럭(DRUG)에 발을 디뎠다.

“너바나 추모공연이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나도 음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공연 하나 보고 음악 하겠다고 하다니 ‘너무 무모하지 않나’ 생각할 법도 한데 하여튼 그때는 그랬다. 기타나 악보를 몰라도 한번 ‘멋대로’ 해보자는 펑크 정신이 열정을 집어삼킬 때였으니까.

여하튼 그래서 그녀는 바로 어쿠스틱 (Acustic) 기타를 샀다. 그리고 한달 정도 기타 학원을 다닌 후 친구들과 합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배울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음악을 하겠다’는 결심을 해버렸다.

Melody A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내가 ‘통로’가 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 자신이 외부에서 무언가 받아들이는 드럼통이 되고 뭔가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그런 느낌. ‘멜로디’란 외부에서 오는 어떤 목소리를 의미해요. 그때부터 ‘멜로디’를 주제로 곡을 썼는데 처음 쓴 곡이 ‘Melody A’에요.”

< Melody A>는 나른하고 몽롱한 곡이다. ‘지저스 앤 메리 체인(The Jesus & Mary chain)’의 강렬하고 감각적인 노이즈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슈게이징(Shoegazing) 사운드에 열광했던 그녀의 전적(?)이 얼핏 감성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한 템포 다른 색깔이다. “더 이상 내 안에서 폭발하는 어떤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고백이 곡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노이즈(noise)한 사운드를 좋아했던 작업 초기에 그녀는 주로 ‘열망’이나 ‘질투’ 같은 주제로 곡들을 썼다. 혹은 세상에 갑자기 내던져진 듯한 낯설고 미숙한 감수성들.

“아이들이 친구를 찾으러 어디론가 갔는데 어느새 왜, 어디서 온지도 잊어버리고 남아있다는 내용이에요. 내가 그랬어요. 어느 순간 서울에 살고 있는데, 내 인생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왜 여기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느낌. 찾으려고 하지도 않고. 아이 같다는 느낌.”

그럼, 지금은 어른이 되었나? 수줍게 웃으면서 “아직. 아닌 것 같아” 하고 짧게 대답한다. 하지만 사랑의 경험이 그녀를 많이 ‘다르게’ 만들었다. 조금 더 넓고 느리게. 그리고 그녀는 ‘상실’에 민감해졌다.

“헤어질 때 뭔가가 색깔 별로 내 안에서 한꺼번에 녹아 내려가는 느낌이었어요. 밤에는 몸이 들어 올려질 정도로 뭔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데 지금은 많이 건조해졌어요. 영원히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일시적이라는 느낌이 드니까 참 힘들었어요.”

일상의 아름다운 순간들

“하루에 한번이라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이 없으면 못 참아요. ‘그냥 하루가 가나보다, 생활이 그런 거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해요.”

“오늘 느낀 아름다운 순간은?” 하고 묻자, 생기 있는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어제 <쵸콜렛>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조니 뎁이 쥴리엣 비노쉬에게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조니 뎁의 눈빛 속에서 옛날에 사랑하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나도 누군가를 저런 눈빛으로 쳐다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참 좋았어요. 그 기운이 오늘까지 가더라고요.”

‘뭐,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었군’하며 심드렁해질 뻔도 했는데 일상을 아름답게 채색할 줄 아는 감수성이 어쩔 수 없이 예쁘다.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 아름다운, 그런 순간들이 중요해요. 나는 공기나 냄새 그런 것에 민감해요. 가령 봄인데 어느 순간 여름의 조각이 냄새로 느껴질 때. 그런 순간들.”

그녀는 자신을 “느리고 맹하다”고 표현하지만 감수성은 예민하고 빠르며 자기 내부의 기운에 무척 민감하다. 문득 ‘소녀 같다’는 생각이 스치자 고등학교 시절 그녀의 행적이 궁금해졌다. 그리고는 웃음 터지는 대답이 나온다.

“반장이 되면 교실에서 나팔꽃을 키우거나 어항에 물고기 키우며 좋아하고 그랬어요. 나 싫어하는 애들도 많았어요. (웃음) 그때 생각하면 나만의 ‘이상’에 빠져 있었던 거 같아요. 내 머리 속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했어요.”

뭐랄까. 엇박자의 매력이 느껴진다.
진지하지만 웃음을 자아내는, 자아도취적이지만 담백한.

한 호흡 머금고

스무 살에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지금까지는 클럽 ‘빵’에서 자신이 작곡한 음악으로 친구들과 퍼포먼스한 것이 무대경험의 전부다. 오후1시부터 9시 반까지 학원에서 초등학생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을 하고 싶다”는 삶의 목표는 확고하고 별로 조급해 하지도 않는다.

“예술에 있어서 일 따로 음악 따로 영역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조화를 이루는 것, 균형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죠. 초등학생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 안에서도 뭔가 끄집어내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관계, 상황에서 얻는 것들은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예술 하는 사람이니까 이 일은 단지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뿐’ 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일상을, 삶 자체를 예술로 느끼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녀는 음악작업을 꾸준히 해서 레이블(label)에 소속된 직업적인 뮤지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꿈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자신을 다그치지는 않는다.

“스무 살 때부터 음악을 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어요. 하지만 내 인생에서 음악이 최고의 우선순위가 된 적은 별로 없죠. 돈도 벌어야 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은 부정할 수 없지만 지금은 꼭 음악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만약 되지 않으면 난 내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주위 친구들이 그녀를 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아는 사람”이라고 평하는 걸 보면 결국 그녀가 ‘뮤지션의 꿈을 진정으로 원했다’는 것을 확인하고야 말 것만 같다. 낙천적이지만 결코 무기력하게 늘어질 눈빛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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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i~ 2003/05/13 [19:54] 수정 | 삭제
  • 몇년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효선이를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감동이네요^^

    어여.. 효선이 친구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친구에게..
    알려줘야겠네요^^

    멋지게 살고 있음에 더 기분좋구요~
  • 반가운이 2003/05/10 [15:37] 수정 | 삭제
  • 그래그래해서 음악을 했었군요. 정말 멋진걸. 음악한다는 얘길 들었을때, 와, 멋지다,했었는데, 정말 멋지군. 그때 그 퍼포먼스를 정말 보았었으면 좋았을걸,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음악연습 많이 하세요. 그래서 정말 멋진 뮤지션이길 바랍니다.
  • 빠스칼 2003/05/09 [19:16] 수정 | 삭제
  • 저는 예술하는 사람이니까 이 일은 단지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죠. -_-

    초등학생들 가르치는 거 쉽지 않을텐데 거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니 부럽네요. 고등학생 한두명 가르치는 것도 고달파하는 저에 비하면 멋진 인생을 사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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