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행복을 <딸기쇼트케이크>

간만에 등장한 매력적인 ‘여성만화’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3/05/10 [23:08]

일상에서 행복을 <딸기쇼트케이크>

간만에 등장한 매력적인 ‘여성만화’

김윤은미 | 입력 : 2003/05/10 [23:08]
strawberryshortcakes(딸기쇼트케이크)(1,2/완간/나나난 키리코/하이북스)

닫힌 여자들

2년 전 서점 구석에 기대어 읽은 나나난의 <호박과 마요네즈>는 인상깊은 만화였다. 주인공 츠치다가 전 애인 하기오과 현 애인 세이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스토리는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했지만, 그 스타일은 보기 드물게 매력적이었다. 단조로운 선으로 꼭 필요한 것만을 표현하고 여백을 남겨둔 그림과 그림 사이에 배열된 짤막한 대사들은 일종의 절제미가 가득했고,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정서들과 잘 맞아떨어졌다.

최근작 <딸기쇼트케이크>역시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딸기..>의 여자들은 말수가 적었다. 그녀들은 사회 주변을 서성이는 20대의 소심하고,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학교와 가정처럼 인간들을 매일 보는 공간을 벗어나, 홀로 지낸다. 직장과
 자취방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 좁은 관계망, 빈곤한 경제, 초라한 작은 방. 대화를 나눌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여자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대도시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녀들은 ‘닫힌' 것이다.

영속적인 관계와 진정한 소통을 열망하는 ‘닫힌’ 여자들. 이는 <딸기..>의 주 테마를 이룬다. 그러나 <호박..>의 츠치다가 전 애인과 현 애인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착한’ 여자라면, <딸기..>의 여자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든 몸부림친다.

 
자폐적인 여자 토우코는 성공한 일러스트레이터지만, 오랫동안 사귄 애인이 자신을 버렸기에 자괴감에 시달린다. 상처 받은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그녀는 속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폭식과 구토를 반복한다.
 
토우코의 동거인 치히로는 귀여운 외모 탓에 인기가 좋지만, 그녀의 애인은 치히로와 일상을 공유하지 않고 답답한 그녀는 울음만을 터트린다. 열정적인 여자 아키요는 채소를 사서, 집에서 부쳐주었다는 핑계를 대고 사랑하는 친구 기쿠치를 만난다. 그녀는 기쿠치가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애증에 사로잡혀 괴로워한다.
 
혼자 공원에서 군옥수수 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 무덤덤한 여자 사토코는 사랑에 빠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언젠가 자신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토우코와 치히로, 아키요와 사토코 모두 진정 어린 소통이 가능한 관계를 부여잡기 위해 힘겹게 혹은 덤덤하게 살아간다.

매력적인 나나난식 스타일

<딸기..>의 매력은 그 스타일에 있다. 물론 <딸기..>는 20대 여성의 소외된 일상과 소통 및 치유에의 열망을 짚고 있기에, 주제적 측면에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한국 작가 중에서는 한혜연이 20대 여성의 사랑과 일상을 담담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나난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혜연이 여성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포착하고 긍정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편이라면 나나난은 그 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딸기..>의 풍경은 등장인물들의 민감하고 예민한 시선을 통해 한 차원 걸러진 까닭에 단조롭다. 그녀들은 자신과 관련된 것에 극도로 민감한 반면, 관련 없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그 둔감성은 때로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토우코와 치히로의 어긋난 소통에서 잘 드러난다. 민감성과 둔감성이 공존하는 그녀들의 세계는 나나난식의 절제된 연출을 통해 민감한 부분이 극대화된다.

 
그녀는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소외와 단절, 외로움의 정서를 그녀만의 스타일을 통해 환기시킨다. 굵고 막 그린 듯 하나 실은 매우 단련된 선, 과감한 생략과 여백의 배치, 짤막한 대사가 그것이다. 여자들의 손과 얼굴에 집중된 화면은 여자들의 심리 변화를 하나하나 쫓는다.
 
나나난의 여자들에게 주류만화적인 표정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증오" "반짝이는 눈동자=기쁨" 과 같은, 주류의 일본 만화적인 공식은 찾아볼 수 없다.

힘겨운 일상에서 행복을

나나난은 <호박..>의 츠치다가 현 애인 세이와 다시 만난 것처럼 <딸기..>의 여자들에게 진정성 어린 해피엔딩을 안겨준다. 치히로는 반복된 구토에 시달리던 토우코를 안아주고 기쿠치는 사랑을 말하는 아키요에게 눈물을 보인다. 좁은 일상에서 찾아낸 탈출구란 옛애인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거나(토우코) 시골로 돌아가는 것(치히로)처럼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그녀들의 소외된 상황은 결론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 우리들의 이 흔해빠진 일상은 실은 아주 망가지기 쉬워서 끝내 잃어버리지 않는 건 기적이다. p202 <호박..>

… 애정이었든 이용이었든 마차의 말처럼 나를 움직이게 해서 내 일을 궤도에 올려놓은 것은 너야. 증오하면서도 감사하고 있어. p145 <딸기..>

특히 아키요와 사토코는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다. 사토코는 영속적인 관계가 없어 혼자만의 일상을 견디는 허무한 사람이지만 가공의 ‘허니'와 대화를 나누며 오늘도 좋은 하루를 보냈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실로 발랄하다. 사랑의 열병 때문에 금붕어의 물을 갈아주지 못한 아키요는 그 때문에 죽은 금붕어 ‘흐물이'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격렬한 감정들을 승화하고, 기쿠치를 만나 담담하게 고백한다. 아키요는 ‘신이여, 정말은 당신 따윈 없어. 나는 이런 식으로 기쿠치를 손에 넣은 거야.' 라는 문장으로 <딸기..>를 마무리한다.

 
나나난은 소외와 상처에 의한 여성들의 강렬한 자의식들을 <딸기..>에서 능숙하게 다룬 듯 하다.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운 여자들, 그녀들은 결국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일상에서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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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루마녀 2003/05/18 [20:35] 수정 | 삭제
  • 나나난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어요 ..

    이런 좋은 작품을 안 읽고 무엇을 했던 것인지 . -_-;;
  • 2003/05/11 [13:06] 수정 | 삭제
  • 보고나면 눈물이 났어요.
    해피엔딩이고 울고짜는 만화도 아닌데 왜 그럴까.

    그건 작품속 그녀들의 일상이 힘들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힘든 일상이 바로 내가 겪는 일상이기 때문이죠.
    나나난은 여성의 일상이 힘겹다는 걸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좋아요.
  • 만화사랑 2003/05/11 [00:58] 수정 | 삭제
  • 담담한 필치에 반했던 작가에요.
    너무 일상적인 이야기라 스토리를 적을 수도 없을 정도인데,
    책을 덮으면 큰 감동이 밀려오는 작품이죠.

    차기작도 보아야겠네요. ^^
    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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