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부터의 평화운동 상징, ‘피스 오사카’

일본 평화박물관을 찾아가다

최이윤정 | 기사입력 2004/07/19 [01:11]

아래로부터의 평화운동 상징, ‘피스 오사카’

일본 평화박물관을 찾아가다

최이윤정 | 입력 : 2004/07/19 [01:11]
일본 오사카에 있는 '오사카국제평화박물관'(OSAKA INTERNATIONAL PEACE CENTER)에 들어서면서 이미 십여 년 전에 만들어진 이곳 ‘피스 오사카’가 일본의 평화운동에 대한 이해와 함께 평화활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앞섰다. 국내에도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이 추진 중에 있는 만큼, ‘평화박물관’은 평화에 대해 고민하는 평화활동의 하나로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평화를 위한 새로운 지역활동의 성과물

오사카는 2차 세계대전 중 50차례가 넘는 공습을 받아 시가지의 주요부가 폐허로 변한 곳이다. 비단 오사카뿐만 아니라 전시 하에서 원폭 피해를 최초로 입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그리고 오키나와 등지의 수많은 일본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으며 무자비한 전쟁은 중국,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까지 심각한 피해와 상처를 입혔다.

‘피스 오사카’는 일본 곳곳에 있는 여러 개의 평화박물관 중의 하나로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인류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오사카의 시민에 의해 1991년 9월 17일 직접 세워졌다. “아직도 세계에는 수많은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에서 과거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고 평화와 안전을 위한 활동을 도모하고자 한다”는 것이 그 설립취지다.

피스 오사카는 “오사카의 전쟁 피해자에 대한 추모장임과 동시에 평화를 위한 새로운 지역적인 활동”을 여는 공간이다. 국가나 관 주도가 아니라 지역의 자치단체 즉, 시민운동의 결과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피스 오사카는 설립 의의가 남다르다. 이 건물의 건립 당시부터 일본 우익의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탄압과 간섭이 심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피스 오사카는 그 건립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시민운동, 평화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정체성 성찰

평화박물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 전시실은 ‘오사카 대공습’(전시실A), 만주사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15년 전쟁의 참상’(전시실B), 마지막으로 ‘평화에 대한 갈망’(전시실C) 순으로 관람하게 돼 있다.

50여 차례에 달하는 오사카 공습의 실태와 당시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전시실A는 영상으로 당시 공습 상황을 담은 장면과 실제 당시 투하됐던 1톤짜리 폭탄, 소이탄, 오사카시 전역의 군사시설 등을 생생히 보여준다. 비단 자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각국 등에 이르기까지 세계 2차대전이 남기고 간 전쟁의 참상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암시하는 대목이다. 즉 전쟁의 참상을 기억함에 있어 단지 자국민의 피해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자신이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메시지를 객관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그대로 재현하기도 한 일부 전시실은 전쟁 자체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을 기록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의 아픔은 계속 기억되어야 한다"

전쟁을 기억하고 보여주는 내용일지라도 그 목적과 의도에 따라 그것을 구성하는 자료와 의미는 달라진다. 우리 나라에는 이름부터가 아이러니한 ‘전쟁기념관’과 같은 곳에 전쟁에 대한 자료가 있는가 하면, 피스 오사카는 같은 전쟁이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배치된 전쟁의 기억을 제시한다. 참혹한 전쟁의 피해 사진보다 더 인상적으로 각인되는 자료는 폭격 흔적이 남아 있는 벽돌, 부삽 등 그냥 스쳐 지나갈 법한 물건이나 일상적인 흔적들 속에서 전쟁의 상흔을 찾아내고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오사카시 건물 곳곳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을 찾아 기록해둠으로써 우리가 일상적으로 전쟁을 얼마나 가까이에 두고 살고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전시실A에 있는 1945년 오사카 대공습 당시 체험자들의 명부와 증언은 ‘누가 전쟁을 기억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대한 하나의 좋은 사례다. 피스 오사카는 “전쟁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사라지더라도, 전쟁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넘어 전쟁의 아픔은 세대를 넘어 계속 기억, 공유되어야 한다”는 목적을 안고 기억에 관한 기록을 배치하고 있다.

'Handing Down the Air Raid Stories'이란 이름의 이 코너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평화에 대한 이상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면서 전쟁의 비극적 이야기를 계속해서 쓰고 증언들을 담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평화를 말하기는 쉽지만 평화를 만드는 건 더 어렵다는 말처럼, 그것에 대해 증언하고 기록해나가는 등 실제로 내용을 채워가는 게 이곳 평화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자 성과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당시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습의 피해를 입은 일반인들의 이름이 몇 권의 책자로 정리돼 있고, 그 옆에는 체험자의 증언들이 있다. 당시 13살의 소녀, 22살의 청년, 11살, 16살의 학생 등인 증언자들이 자신의 이름과 당시의 기억을 일기 식으로 꽤 길게 정리해놓은 이 글들에는 당시 상황을 “B-29기로 꽉 찬 하늘”, “폭격으로 머리 없는 아기를 업고 있는 여성”, “참혹하고 끔찍한 모습”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메시지 담아

피스 오사카는 폭격으로 휩싸인 전쟁의 충격이 그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전시실A 한켠에 마련된 전시 ‘오사카의 사회상’은 오사카의 사회적 조건, 생활, 학교 교육 등을 볼 수 있도록 교과서 자료 등을 배치해놓았다. 그 설명을 보면 “당시 14세 이상의 소년은 군입대에 자원하도록 교육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 당시의 모든 교육 내용은 국가주의적, 친전쟁의 분위기(pro-war sentiment)에 초점을 맞춰 이뤄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전쟁이 사회를 얼마나 폭력적으로 만드는가를 일면 볼 수 있는 것으로 당시 일본의 피해의식이 잘못된 방식의 애국심, 왜곡된 군국주의로 이어진 것에 대한 따끔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 오사카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곳곳의 전쟁이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얼마나 무뎌지게 하는가에 대한 성찰로도 읽힌다. 이라크 전쟁 이후 전쟁의 참혹한 피해로 인해 이라크인들이 어린 소년, 소녀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을 “순교자적 행위”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이라크 내에 이미 만연해 있다는 소식은 피스 오사카가 보여주는 당시 사회상이 단지 전쟁을 경험했던 지역의 ‘과거사’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시관 내 특별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는 남아프리카 내전으로 인한 어린이들의 사진들은 마치 무기를 장난감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옆에 차고 있는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피스 오사카는 세 번째 전시실을 평화에 대해 고민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핵폭발이 일어났던 시간에 멈춰있는 <운명의 날의 시계>, 2차 대전 후 지역분쟁, 전쟁에 관한 영상, 평화와 관련된 영상물과 서적을 모아둔 도서실 등으로 채워져 있다. 도서실 자료는 일본어로 된 자료가 대부분이지만, 주제와 내용은 일본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의 전쟁, 평화 자료들의 번역서들도 상당하다. 또 여기에는 오사카의 각 자치단체에 의한 평화활동 자료들을 모아두고 있어서 지역의 평화운동과의 교류도 가능하다. 이는 평화박물관이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 역사를 기록하고 만들어내고 있는 평화활동의 장으로서 유지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자신의 경험과 고통 속에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이 출발한다. 피스 오사카의 전시물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자국이 경험한 전쟁의 역사를 기록, 보관함으로써 피해자인 동시에 침략국으로서의 ‘일본’이라는 위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전쟁과 폭력 자체에 대한 반대 의지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기 위한 다양한 고민들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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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lnut 2004/07/20 [19:18] 수정 | 삭제
  •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인지, 또 다른 적개심을 키우고 무기 생산과 구입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인지,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평화박물관을 건립하려고 하고 있다지요?
    참고로, 우리나라 전쟁박물관에선 신비의 인체탐험전이 진행중입니다. -_-;
  • 이수효 2004/07/19 [17:44] 수정 | 삭제
  • 안녕하세요~
    저는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위(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수효라고 합니다.
    최이윤정님이 쓴 일본 피스 오오사카 관람기 잘 보았습니다.

    사실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위도 지난 6월에 일본 평화박물관 답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아직 활발하게 답사기를 대외외적으로 기고하고 있진 않지만
    조만간 일본 평화박물관 "슬라이드 쇼"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아뭏튼 일본 평화박물관 관련 기사를 보고 반갑니 좋았습니다.
    "일다"에서 자체적으로 기획연재하는 "꼭지"인지요..

    혹 평화박물관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해서 여쭈어 보는 겁니다.
    수고하시고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 다람쥐 2004/07/19 [14:48] 수정 | 삭제
  • 일본의 한 평화운동가가 오사카평화박물관 얘기가 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피해자 명부에 대한 이야기가 감동적이었죠.

    일본은 늘 우리에게 가해국이란 이미지가 있어서인지, 원폭 피해국이라는 것은 생각을 미처 못했었는데, 그런 전쟁피해당사자로서의 정체성이 일본의 평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더군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염려하며, 그와 맞서서 싸우는 그 분들의 활동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람 2004/07/19 [14:27] 수정 | 삭제
  • 역사는 과거만이 아니겠죠.
    우리나라 평화박물관 얘기도 궁금해지는군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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