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 곳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버팀목

전국여성노동조합 5년을 돌아보며

박민나 | 기사입력 2004/08/30 [01:19]

기댈 곳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버팀목

전국여성노동조합 5년을 돌아보며

박민나 | 입력 : 2004/08/30 [01:19]
느닷없이 불어 닥친 IMF 한파로 한국경제가 혼수상태에 빠졌던 20세기의 마지막 몇 년을 우린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대부분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여성노동자들은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체불된 임금명세서만 가지고 일터를 떠나야만 했다.
 
여성경제활동인구는 남성에 비해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고, 일터를 떠났던 여성들은 다시는 정규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에 의해 이후 이들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모두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노동자의 조직률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고,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노동현실에 효과적인 대처는 불가능해 보였다.

여성노동현실에 맞는 초 기업 단위 노조 건설

1999년 8월 29일, 이렇게 실업과 반 실업을 넘나드는 불안정한 지위의 여성노동자들의 일할 권리와 노동3권의 확보를 위해 전국여성노동조합이 출범했다. 업종과 지역에 관계없이 여성노동자라면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는 ‘전국단일 노동조합’이었다.

 
여성노동자가 단결된 힘을 갖기 힘든 이유는 우리 나라의 일반적 노동 형태인 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힘든 고용구조에 있었다. 즉 기업단위 노동조합을 운영하기 힘든 100인 미만 사업체에 대부분의 여성노동자가 근무하고 있었으며,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힘든 임시 일용직 종사 여성의 비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노동조합에 가입된 여성이라도 경기변동, 출산 육아를 이유로 취업과 실직을 반복해야 하고 그에 따라 종사하는 업종과 취업형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탓에 조합원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여성노동조합은 이 같은 여성의 노동 현실에 초점을 둬 회사와 직업, 지역과 관계없이 일하는 여성이면 평생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초 기업 단위의 노동조합을 결성해 여성노동자 권익확보와 조직 확대를 꾀했다.

2000년 3월 5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와 공동으로 '비정규직 여성 권리찾기 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를 알리는 캠페인을 전국 9개 지역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진행하며 상담 및 투쟁지원을 전개해 나갔다. 상담을 통해 파악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현실은 언론보도를 통해 이슈화 시켰다.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상담창구로 수많은 상담이 접수됐으며 여성노동자들의 여성노동조합 가입과 함께 모범적인 투쟁사례를 만들어 나갔다.

부당 해고된 계약직, 파견 여성노동자들 복직투쟁

2000년 1월 1일 00혈액원은 5년차 이상의 계약직 시간제 간호사와 헌혈권장원 15명을 해고했다. 이들은 모두 4~6차례에 걸쳐 재계약을 했는데, 혈액원측은 1999년 11월, 12월에 걸쳐 28명의 계약직 시간제 직원을 신규 채용하면서도 장기 근속자들에 대해 ‘근속년수 5년차 이상자, 근무성적이 저조한 자’를 기준으로 일방적인 계약기간 종료를 통보한 것이다.

 
전국여성노조 서울지부에서는 조합원 가입을 받고 ‘수 차례에 걸쳐 재계약을 한 비정규직의 경우 재계약 회피는 해고에 해당하고 따라서 정당한 해고사유가 있어야’ 하므로 해고조치의 부당성을 주장, 철회를 촉구하며 ‘출근투쟁’을 진행했고 결국 혈액원측으로부터 복직 통보를 받았다.

또 00국민차에 파견되어 일하는 150여명의 지게차 운전자 중 3명의 여성이 해고를 당하고 1999년 12월 17일자로 타 회사로 전출명령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상담과 가입을 받은 전국여성노조 마산창원지부는 남녀차별과 부당해고에 대해 파견회사와 교섭을 벌이는 한편 00국민차 앞에서 부당해고 항의 투쟁을 진행하였다. 또한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제기하고 복직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신분상 제약 때문에 언제라도 나가라고 하면 당할 수밖에 없었던 파견노동자의 부당해고 관행에 제동을 걸었던 중요한 투쟁이었다.

정규직 노동조합과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힘을 합쳐 ‘연대’의 중요성을 되새겨준 사건도 있었다. 00중공업의 사무직 여직원 사건의 경우 명목만 파견직이고 실제 7-8년씩 근무하면서 정규직의 일을 해온 상태였으며, 채용 및 해고에 관한 결정권을 파견회사가 아닌 00중공업이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75명(전체 사무직 여직원은 90명)중 66명에 대해 ‘1년 촉탁고용 39명, 해고를 전제로 인수인계 기간인 2개월 아르바이트직 27명’ 명단을 발표한 것이다.

 
반발한 여직원들이 여성노동조합 인천지부에 가입했다. 신속한 시간 내에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었으나 주체의 힘은 미약한 상태였다. 이에 전국여성노조의 이름으로 정규직 노동조합을 설득해 힘을 합쳐 투쟁한 결과, 전원 1년 직접 계약의 성과를 낳았다.

한편 2000년 2월 14일 전국여성노조는 진주 00대학교 중앙식당 운영 업체인 XX유통 사무실에서 ‘조리사들의 월차, 생리휴가의 보장, 토요일 잔업에 대한 임금지급, 정규직에게 휴가를 주면서 임시직에게 일을 돌리는 문제’ 등 요구안을 가지고 제1차 교섭을 진행했다. 00대 식당의 민영화에 따라 용역업체의 선정이 입찰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용역업체는 입찰가에 투자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식당 조리사들을 비정규직으로 바꾸고 음식의 단가를 낮췄다.

전국여성노동조합 마창지부에서는 4달간의 교섭을 통해 '방학기간 중 일자리 제공, 미불임금 지급' 등을 확보했다. 현재는 XX유통의 부실운영으로 인해 학교측이 새로운 식당운영업자를 찾고 있으며, 이에 여성노조에서는 ‘고용승계, 체불임금 해결’을 요구하며 투쟁 중이다. 1년 내지 2년마다 운영업체가 바뀌면서 고용 및 근로조건 승계가 되지 않는 용역업체 종사 여성노동자들이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개선을 여성노조 활동을 통해 만들어 가고 있는 사례다.

경기보조원, 방송작가 등 특수고용 노동자 권리 투쟁

경기보조원, 학습지교사, 보험설계사, 우유배달원, 화장품외판원, 방송사 구성작가, 개인사업자등록을 한 텔레마케터 등 100만(정부통계는 70만 명)을 넘는 노동자들이 특수고용형태로 일하고 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회사의 직간접적 지휘 감독 하에서 일하면서도 개인사업자란 이름으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 업종은 노동시간이 비교적 유연해 여성들이 다수 취업하고 있으며 서비스산업의 발달로 점차 확대되고 있음에도 노동법 적용도 안 되는 실태는 그 동안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99년 10월, 경기보조원 최초의 노동조합인 전국여성노동조합 00골프장 경기보조원 분회가 결성됐다. 골프장에서 일하고 있는 2만 여명의 경기 보조원들은 노동법 적용이 되지 않아 골프채나 볼에 맞고 다치는 재해가 빈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부담으로 치료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 시에는 자진 퇴사를 해야 했고 손님들의 불만이 접수되면 일방적 징계를 감수해야 하는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에 1999년 12월부터 회사측에 단체교섭을 요청했으나 회사에서는 근로자가 아니라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교섭을 회피했다. 나아가 회사측은 4월 25일 분 회장 및 상임집행위원 전원, 핵심 대의원, 조합원 11인에 대해 근무정지 통보를 해 왔다.

 
노동조합 사수 및 부당징계 철회를 위한 20여 일간의 투쟁을 전개해 ‘근무정지 철회, 노조활동 인정’ 등의 성과를 안고 전원 복직했다. 또한 5월 16일 ‘00골프장 경기보조원이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임을 증명하는 행정해석을 끌어냈다. 이 투쟁은 골프장 경기보조원의 노동3권 및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 권리를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공감대를 넓힌 주요한 사례이다.

2001년 3월 26일, 마창 방송국 분회는 ‘근로기준법 적용, 4대 사회보험 가입, 방송 개편 시 협의체계 구성, 근속년수에 따른 임금체계, 그 외 식권 및 출장비’ 등에 관한 교섭을 신청했으나 사측은 고용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에 3월 29일, 30일 조합원들은 회사에서 집회를 가졌고 이후 요구안이 적힌 조끼를 입고 단체행동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노동자로 인정 받지 못하는 방송국 프리랜서(구성작가, 리포터, 진행)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자신들의 노동권을 선언한 최초의 사건으로 전국적 호응을 얻어 7월, 전국여성노동조합 방송사 지부 결성으로 이어졌다. 고소득 프리랜서 직종이라는 허울에 가려져 있던 구성 작가들의 열악한 근로조건과 노동환경을 사회적으로 알려내고 특수 고용 노동자들의 법적 보호 필요성을 사회적으로 공론화 한 사례였다.

가려진 노동자들의 성장 위해

그 외에도 2000년 노동계 최초로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했으며 기간제 교사, 임시강사, 전산보조, 영양사, 사서, 조리사, 조리보조원, 과학실험보조원, 전문순회코치, 사무보조원 등 10만 여명으로 추산되는 학교비정규직 문제 역시 중요한 투쟁사안으로 상정했다.

 
그 결과 일용잡급직을 폐지하고 학교회계직으로 통합, 연봉제 계약을 성취했으며 정규직과의 차별해소를 위한 근무여건 개선, 전국적으로 통일된 근로계약서 체결, 방학 중 임금지급과 연차수당 지급 등의 성과를 낳았다.

1995년 새로운 조직모델로 여성노동조합을 설정하고 수 없는 논의와 연구조사를 통해 4년째 되던 지난 99년 전국여성노동조합 출범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전국여성노조가 지나온 5년은 고난과 보람이 교차하는 세월이었다.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요구를 가지고 조합의 문을 두드리며 넘나드는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 힘을 키워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겨진 과제 또한 해온 일만큼이나 많이 쌓여있다. 여성노동자간 연대를 활성화해 주요 과제에 대한 공동행동과 힘의 집중이 시급하며 여성노동자 조직가의 양성을 위한 교육도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좀 더 집중적인 노력과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조합원 수가 4백명으로 시작에 이제 5천명에 이르는 전국여성노동조합은 현재 서울, 인천, 부산, 광주전남, 경기, 경남, 전북, 대구, 울산(추) 등 9개 광역시도에 지역지부를 두고 있으며 업종단위로는 방송사구성작가, 학교 비정규직 영양사, 학교도서관 사서지부, 과학실험보조원 지부 등 4개 전국지부가 있다. 조합원의 95%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며, 연령별로는 30-40대 기혼여성이 70%를 차지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서비스직, 생산직, 사무직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고 있으며, 여성노동자면 업종과 지역에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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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줌마 2004/08/30 [15:09] 수정 | 삭제
  • 5년 동안 참 어려운 일들 해오셨습니다.
    앞으로 조합이 더 커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축하드리고,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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