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와 공공성

식민지 시기의 여성: 연재를 마치며

손유경 | 기사입력 2004/10/24 [22:38]

젠더와 공공성

식민지 시기의 여성: 연재를 마치며

손유경 | 입력 : 2004/10/24 [22:38]
<일다는 퍼슨웹(www.personweb.com)과 공동기획으로 ‘신여성’에 관한 기사를 연재합니다. ‘신여성’의 연애와 사상, 직업과 지위 등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를 살펴보는 과정은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고 현재를 비추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연재기사의 필자는 김미지님(퍼슨웹 기획위원, 성공회대 강사)과 손유경님(퍼슨웹 기획위원, 아주대 강사, <대담한 책읽기> 공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프린느(Phryne)의 무죄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롬(Gerome)의 그림 “Phryne before the Areo pagus” (법정에 선 프린느) 속에는 법정에서 벌거벗겨진 아름다운 여인 프린느가 서 있다. 고대 그리스의 고급 창녀 프린느는 지금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질 위험에 빠져 있고, 프린느의 애인이자 그녀의 변호를 맡은 히페레이데스(Hypereides)는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그녀의 옷을 벗겨버린다. 그녀는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옷을 벗긴다? 심판관들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재판관들은 프린느의 아름다움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그녀의 애인, 아니 그녀의 온몸은 이렇게 반문한다. 아름다운 여인을 벌할 자 누구인가. ‘프린느는 아름답다(예쁘다). 예쁘면 다 용서된다. 따라서 프린느는 무죄이다.’

여기서 정의를 상징하는 오랜 상징인 저울과 칼은 美를 저울질하지도 재단하지도 못하는 무용물이 되고 만다. 이 그림을 앞에 두고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은 美를 지향하는 예술의 고유한 권리를 사법이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美’라는 추상적 가치의 우열을 논하는 데 있지 않고 ‘여성’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구체적 생존 방식을 따져보는 데 있다. 프린느는 왜 무죄인가?

여성스러움이라는 ‘능력’

우리 사회에서 ‘능력 있는 남자’의 준거를 보면 재력, 체력, 지력, 사교력 등이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음에 비해 여성의 능력에서는 ‘여성스러움’이라는 결정적 가치가 다른 웬만한 자질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같은 여성스러움의 극치는 보통 아름다움(美)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프린느의 무죄를 이끌어낸 것은 그녀의 돈도, 무력도, 지혜도, 인맥도 아닌, 그녀의 ‘아름다운 몸’이었다.

예쁠 능력이 없는 여성이라면 부드러움으로 승부해 볼만하다. ‘예쁜 것’, ‘부드러운 것’으로 집약되는 ‘여성스러움’은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다. 여성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여성스러워야 한다. 여성스러움만 제대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녀의 지력, 체력, 화술쯤이야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못난 여자고 잘난 여자고 할 것 없이 만일 그녀가 그 ‘여성스러움’이라는 가치를 내던진다면 사회는 그녀의 성공을 기꺼이 비웃어 줄 준비가 돼 있다.

‘여성스러운’ 여자는 자녀가 ‘밖’에 나가 잘 배우고 잘 자랄 수 있도록, 그리고 남편이 ‘밖’에 나가 일 잘 하고 돈 잘 벌 수 있도록 ‘안’에서 그들을 지켜주는 존재이며, ‘여성스러운’ 여자는 또한 몸소 ‘바깥’으로 나갈지라도 어디까지나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는 여성이다.

예컨대 가족적 분위기를 선도하는 여성 CEO, 자애로운 女상사, 누이 같은 女비서, 어머니 같은 女선생님. 이들은 괴팍한 여성 CEO보다도, 목소리 걸걸한 女상사보다도, 선머슴 같은 女비서보다도, 억척스런 女선생보다도 ‘능력 있는’ 일꾼이라 사회는 이야기한다. ‘여성스러움’이라는 타고난 천품을 가장 잘 발휘할 때 여성의 능력 또한 극대화될 수 있다는 논리다. 자명함을 가장한 이런 논리에 기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길러지는 것’이라는 기초 상식마저 결여돼 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전문성보다는 여성성을!

주요섭은 아무리 배운 여성이라 해도 여성의 근본적 욕망은 현모양처됨에 있다고 못박은 대표적 논자다. 그는 궁극적으로 현모양처 됨을 여성의 본능으로 환원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여성해방을 부르짖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논하는 현대라고 할지라도 여자의 근본적 욕망 또는 소원은 현모양처 됨에 있다. 신여성은 직업을 과도기로밖에 더 생각하지 않으며 좋은 배우자를 얻어 이상적 가정을 세웠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최고의 소원이다.”(주요섭, “신여성과 구여성의 행로”, 《신여성》 1933년 1월호)

한편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남편에게 양육비 4천원을 주고 이혼을 요구한 박인덕에 대한 《신여성》의 평가는 한 마디로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동물에 공통된 본능이거니와 더욱이 인류의 모성애라는 것은 가장 강렬하며 신성한 미덕의 하나이다. 비록 자기 몸은 다소 희생이 될지라도 자녀를 위하여 극진한 보호를 하고자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정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대 이제 박여사가 자기 일신의 자유를 위하여 어린 두 딸을 울게 한다는 것은 인정에 벗어나는 일이다.” (성북학인(城北學人), “박인덕 공개장-이혼소동에 관하여 그의 태도를 박(駁)함”,《신여성》 1931년 12월호)

식민지 시기 여성들의 ‘일’과 ‘사랑’이 《신여성》이라는 공론장에서 번역되는 방식은 대개가 이러했다. 일을 할 수도 있고 사랑을 할 수도 있다. 단, ‘현모양처 됨’ 혹은 ‘모성애’로 대표되는 ‘여성스러움’의 본능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

따라서 일하는 여성들의 성패 여부 또한 직업상의 전문성보다는 본능적 여성성과 관련되기 쉬웠다. 애초에 전문성은 기대되지 않았기에 따뜻하고 부드러워 좋긴 좋지만 믿고 맡기기는 좀 석연찮다는 결론 또한 손쉽게 도출됐다. 의전(醫專)을 졸업한 어느 여성의 말을 들어보자.

“학교만 마치면 나의 이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나의 희망을 그대로 들어 줄 것만 생각하며 … 그러나 지금 와서는 어떠합니까? 첫째로 가사로 인하여 멀리 갈 수가 없고 병원에서 연구한대야 남자로서 연구할 곳이지 여자를 위해서 연구할 곳은 되지 못하니 어찌 합니까. 그나 그뿐입니까. 모든 주의가 여자라면 내리 누르고 짓밟고 하시(下視)하고 신용을 아니하니 어찌합니까. 병자도 여의(女醫)라면 안 보이겠다지요.” (길O석(동경여자의전졸업), “졸업 후 1주년-학교처녀의 하염없는 꿈”, 《신여성》 1926년 8월호)

“여자는 으레 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머리에서부터 무시하는 생각이 있는 듯한 태도를 볼 때면 얼마나 비위가 상하고 눈에 거슬리는지 모릅니다.” (여교원 이O순, “직업부인들의 경험과 감상-남모를 쓴 경험”, 《신여성》 1925년 4월호)

탈성화되어야 하는 건 '사적 여성' 아닌 '공적 사회'

‘여성이라는 인간도 ‘公’(공)이라는 이념과 실재에 부합할 수 있을까?’ 뭘 해도 여자는 여자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에게 만약 이런 질문이 던져졌다면, 이는 극단적으로 말해 ‘남성이라는 인간도 과연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있을까’에 맞먹는 수준의 어이없는 질문으로 치부되었을지 모른다.

공적인 가치라든가 공공의 정신과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공적인 것이라 일컬을 만한 온갖 구체적 실재에 이르기까지 ‘공’은 어떤 경우에라도 ‘남성’이라는 암호를 입력해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근대적인 공공 영역과 공적 질서는 그것이 표방하는 공평무사라든가 공공성이라는 가치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니, 공평무사라든가 공공성이라는 이념 자체가 이미 남성에 의해 전유되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公’은 선별하고 배제한다.

여성이라는 암호를 넣고도 ‘公’적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비정상적(?) 루트를 통하거나 혹은 여성 스스로 여성됨을 포기하는 길이 그것이다. 전자는 ‘여성’이 자신의 생물학적 ‘여성성’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과시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경우가 해당되겠고(앞서의 프린느가 여기에 속한다), 후자는 남잔지 여잔지 구별이 안 될 만큼 철저하게 탈성화에 성공한 경우이다.

《신여성》에는 ‘망신’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약방의 감초처럼 숨어 있다. 대체로는 ‘여성스러움’이라든가 ‘여자다움’이 손상될 때 빚어지는 해프닝들이다. 버스에서 자신이 뀐 방귀를 아들이 뀐 것처럼 하려다 발각된 어머니의 이야기(“어머니 방귀”, 《신여성》 1924년 6월호), ‘사랑하는 S씨의 품에’라고 쓰인 편지 봉투를 차에 흘려 망신당한 여학생 이야기(“색상자”, 《신여성》 1925년 2월호), 전차 안에서 궐련(담배)을 빠뜨려 망신당한 여학생 이야기(“색상자”, 《신여성》 1926년 3월호), 여선생들이 망년회 겸 술을 마시고 취해 소동을 벌여 망신당한 이야기(“색상자”, 《신여성》1932년 3월호), 속옷 끈이 끊어져 망신당할까봐 잘 걷지도 못했다는 여학생 이야기(“색상자”, 《신여성》 1933년 7월호) 등은 그야말로 여자 망신 시리즈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망신당한 이야기 시리즈에서 우리가 찾아낸 것은 ‘망신당한 여성’이 아닌 ‘남성적 시선’이다. ‘찻간’이 상징하는 공공 영역에서 여성이 망신을 당하는 이유는 한결같다. 방귀를 끼거나 연애편지를 흘리거나 담배를 빠뜨리거나 술에 취하거나 속옷 끈이 풀어지거나. 즉 밖에 나가서 지켜야 할 ‘여자다움’에 치명적 손상이 가해졌을 경우들이다. 밖에 나간 여성들을 사회적 공인으로 평가하기 전에 생물학적 여성으로 관찰하는 시선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즉 프린느를 둘러싼 재판관들의 성적(性的) 다양성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사실. 재판장의 프린느는 ‘예뻐서’ 용서받은 것이 아니다. 그녀를 재판한 것이 바로 ‘남성 권력’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용서받은 것이다. (프린느처럼) 예쁘다고 대접하는 시스템, 여자라고 봐주는 시스템의 부당성을 감지했다면 손을 봐야 하는 것은 당연히 바로 그 시스템이다. 요컨대 탈성화 혹은 혼성화의 과제를 떠맡은 주체는 공적 영역에 나선 여성 개개인이 아닌 ‘사회의 시선’이다. 결국 남자‘처럼’ 행동함으로써 살아남겠다는 말은 남성 중심적 시스템에 가장 확실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스토리 2004/10/28 [13:35] 수정 | 삭제
  • 또 새로운 연재가 시작되길 바래요.
  • Ann 2004/10/27 [14:17] 수정 | 삭제
  • "밖에 나간 여성들을 사회적 공인으로 평가하기 전에 생물학적 여성으로 관찰하는 시선들."

    아직도 지속되는.. 예전보다 약간 덜한 걸까.. 별반 다를 바 없게 느껴지는.. 따라다니는 시선들.. 그래서 가부장제가 무서운 것인가 봐요.
  • 리사 2004/10/26 [02:33] 수정 | 삭제
  • 보통 신여성 하면 자유연애 이런 걸 떠올리는데. 다양한 기사들을 통해서 좋은 정보를 얻은 것 같습니다. 신여성의 직업 얘기도 좋았어요.
  • 2004/10/25 [16:46] 수정 | 삭제
  • 매번 재밌게 봤구요.
    10회 연재인 건가요?
    좋은 자료인 것 같아요.
    신여성을 훑어보는 재미도 있었고..
    생각해볼 거리들도
    많더군요.
  • 애독자 2004/10/25 [14:51] 수정 | 삭제
  • 진짜로 끝인가 보네요..
    식민지 시기, 신여성에 대해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다양한 얘길 해주신 것 같아서 재밌게 잘 봤습니다.
광고
광고